6. 외국인 친위대 고용과 김홍륙 독다사건
# 외국인 친위대 고용 사건
1898년 9월 15일에 상해에 체류 중인 5개국 퇴역군인 30명(미국인 9명, 영국인 9명, 프랑스인 5명, 독일인 5명, 러시아인 2명)이 서울에 들어왔다. 8월에 고종 황제는 미국 법무 고문관 그레이트 하우스와 장봉환을 상해에 파견하여 이들을 친위대로 고용한 것이다.
9월 17일에 독립협회는 외국인 용병의 즉각 귀환을 요청하는 항의문을 해당 부서에 전달하고, 9월 18일에 외부(外部) 문 앞에서 대규모 민중대회를 열어 외국인 용병의 즉각 철수를 요구했다. ‘독립신문’도 이 사실을 규탄했고, ‘제국신문’ 주필인 이승만도 9월 19일 자 ‘제국신문’ 논설에서 ‘상하가 함께 부끄러운 큰 괴변’이라고 주장했다.
9월 19일에 열린 의정부 회의에서 대신들은 만장일치로 외국인을 친위대로 고용하려는 것에 반대했다. 이러자 외국인 용병들은 9월 24일에 철수해 27일에 제물포항을 떠났다. 9월 29일에 플랑시 프랑스 공사는 외국인 친위대 해산 및 외국인 송환을 위한 경비 지출 상황을 보고했다.
“대한제국 정부는 9월 26일에 친위대를 해산하며 외국인 용병들에게 상해로 돌아간다는 조건으로 1년 치 고용비 840 피아스터를 지급했습니다. 결국 25,200 피아스터를 앉은 자리에서 낭비한 것입니다.”
고종 황제는 외국인 용병을 단 하루도 근무시키지 못하고 고용계약에 명시된 임금 전액을 지급했다. 국제적 망신이었다.
# 김홍륙 독다사건(毒茶事件)
1898년 9월 11일에 ‘김홍륙 독다사건’이 터졌다. 고종 황제 독살 미수사건이었다. 1896년 아관파천 시절부터 커피를 좋아한 고종은 커피 냄새가 이상하다고 생각해 한 모금 입에 넣자마자 뱉었지만, 황태자(나중에 순종)는 그냥 몇 모금을 마셔 토하고 쓰러졌다. 궁중은 아수라장이 됐다.
9월 14일에 종신유형(終身流刑) 죄인 김홍륙이 사주했음이 밝혀졌다.
김홍륙은 1895년에 이범진이 러시아 공사 웨베르와 조러통상조약을 체결할 때 러시아어 통역관이 돼 출세의 기회를 잡았다. 그는 1896년 아관파천 시절에는 비서원 승(祕書院 丞)으로 근무하면서 고종의 전담 통역관이 됐다. 이어서 김홍륙은 1896년 11월 15일에 학부협판(차관)으로 승진했고, 1898년 3월 11일에는 한성부 판윤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김홍륙은 고종의 총애와 러시아의 세력을 배경으로 권력을 남용하고 뇌물을 탐해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그를 규탄하는 방서(榜書)가 나붙기도 했다.
8월 25일에 고종은 김홍륙이 공무(公務)를 빙자해 사욕을 채우는 것을 추궁하여, 그를 흑산도로 종신 유배 보냈다. 그런데 김홍륙은 유배 떠나는 날에 고종 독살 음모를 했다. 김홍륙은 한 냥의 아편을 전선사(典膳司) 책임자 공홍식에게 주면서 수라상에 섞어서 올릴 것을 사주했다.
이러자 공홍식은 보현당 창고지기로 서양 요리사 김종화를 만나서 아편을 고종에게 올리는 커피에 섞어서 올리면 은(銀)1,000원(元)을 주겠다고 말했다. 김종화는 아편을 소매 속에 넣고 주방에 들어가 커피 찻주전자에 넣어 진어(進御)했다.
김홍륙 독다사건이 일어난 지 1주일이 지난 9월 18일에 현학표 등은 역적을 엄중히 다스리도록 연좌(連坐)와 노륙(孥戮)법을 부활하라고 상소하였다. 연좌제(緣坐制)는 죄인뿐만 아니라 그 아내와 아들 그리고 친족까지도 연대 처벌하는 제도이고, 노륙법은 죄인의 아내와 아들도 참형을 적용시키는 법으로 이 법들은 이미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9월 23일에 의관(議官) 서상우 등이 중추원 회의에서 노륙법과 연좌법 부활을 주장하였다. 이에 법부대신겸 중추원 의장 신기선 이하 의관 34명이 동조하여 정부에 정식으로 요구했다. 9월 24일에는 서상우를 소두(疏頭)로 하여 상소하였다.
그런데 경무사 민영기는 이 사건으로 체포된 부녀자와 무고한 사람들까지 무참히 고문하였다. 고문을 받던 공홍식은 자살을 시도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러자 독립협회가 반발하고 나섰다. 비록 김홍륙 같은 역적이라도 법률에 의해 처벌되어야 하고 고문은 용납될 수 없으며, 연좌와 노륙법 부활은 절대 불가라고 주장한 것이다.
9월 25일에 독립협회는 반역사건을 규탄하고 사건의 철저한 조사를 촉구하면서도, 죄인에 대한 고문과 이미 폐지된 노륙법과 연좌법의 부활 반대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9월 26일에 독립협회는 법부대신 겸 중추원 의장 신기선에게 서한을 보내 의장과 서명한 의관의 사직을 요구하였다. 9월 27일에 신기선은 갑오개혁 이후 역적을 다루는 데 교수형만 적용시키니 역변(逆變)이 그치지 않아 노륙법을 부활시키지 않을 수 없고, 또 대신의 진퇴는 독립협회가 말할 바가 못된다고 답신했다.
10월 2일에 독립협회는 중추원 앞에서 민중대회를 열고 대표를 뽑아 신기선의 사직을 권고하였다. 신기선이 불응하자 독립협회는 신기선을 고등재판소에 고발하였다.
고발장을 접수한 고등재판소가 법부대신은 황제에게 상주한 후에야 구금할 수 있는데 법부대신 신기선 자신이 피고이므로 상주할 사람이 없어 이를 처리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에 독립협회는 10월 6일에 고등재판소 앞에서 민중대회를 열었다.
이 날 의정부 의정 심순택이 고종에게 법부대신 신기선을 면직(免職)하도록 아뢰었다. 하지만 고종은 신기선에게 1개월 감봉 조치만 내렸다. 10월 7일에 독립협회는 경운궁 인화문 앞에서 농성하면서 신기선등 관련자 처벌을 요구했다.
하지만 고종은 도리어 법부와 중추원을 두둔하였다. 이에 독립협회는 더욱 강경해졌다. 10월 10일에 독립협회의 윤치호 등은 경운궁 앞에서 농성을 계속하면서 신기선, 이재순 · 민영기 등 일곱 대신의 파면을 요구했다. 그런데 11일에 고종은 법부대신 신기선과 판사 이인우를 파면시키고 의정부 찬정 서정순을 법부대신으로 임명했다.
이 날 농성 중인 의관(議官) 윤치호가 심순택 등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고, 독립협회는 경운궁 앞에서 농성을 계속했다. 종로 시전 상인들도 모두 철시하고 농성에 가담하였다. 농성 중인 윤치호는 상소하여 심순택, 신기선, 민영기 등 일곱 대신의 파면을 거듭 촉구했다.
고종은 12일에 고종은 윤치호를 중하게 견책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이날 소학교(초등학교) 학생들까지 참여하여 농성 참가자는 1만 여명으로 늘어났다. 궁지에 몰린 고종은 의정부 찬정(贊政) 박정양을 의정부 의정 서리로, 조병호를 탁지부 대신으로, 민영환을 군부 대신으로 임용하였다. 결국 심순택, 신기선등 일곱 대신이 파면되고 노륙법과 연좌법 부활 기도도 사라졌다.
10월 12일 저녁에 독립협회 회원들과 시민들은 만세를 부르면서 해산했다.
각국의 외교관들은 대한제국에서 민중운동에 의해 개혁 정부가 수립된 사실에 놀랐다. 주한미국공사 알렌은 ‘하나의 평화적 혁명(a Peaceful Revolution)’이 일어났다고 미국 국무부에 보고할 정도였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1 열강의 이권 침탈과 독립협회, 탐구당, 2003, p 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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