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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왜 망했나 부패망국

아관파천 (俄館播遷)

1. 아관파천 (俄館播遷)

 

# 아관파천

 

1894110(양력 210)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분노해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들이 봉기했다. 고종이 친정한 1874년부터 1894년까지 20년간 백성을 수탈한 민씨 정권에 대한 저항이었다.

 

427(양력 531)에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놀란 고종과 민왕후는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한 외세의존병이 또다시 도진 것이다.

 

독립운동가 박은식은 1915년에 상하이에서 출간한 한국통사(韓國痛史)에서 이렇게 적었다.

 

임금과 왕비가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청나라 군대를 불러서 자기 백성을 진압하려 했으니 이게 제정신인가?”

 

6월 초에 청군이 아산에 도착했고 천진조약에 의거하여 일본군도 인천에 들어왔다. 611일에 동학농민군은 전라감사와 화약(和約)한 후에 해산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물러나지 않고 723일에 경복궁을 점령했고, 725일에 일본 해군은 아산만 풍도 근처에서 청나라 군인이 탄 배를 기습했다. 일본은 81일에 정식으로 선전포고 했다.

 

18952월에 청나라 북양함대마저 궤멸당하자 이홍장은 일본으로 달려갔다. 이홍장은 피습을 당하는 수모를 겪으면서 417일에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다.

 

1.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임을 승인한다.

2. 요동반도·대만·팽호 열도를 할양한다.

3. 2억 냥의 전쟁배상금을 지불한다.

 

시모노세키조약 제1조는 조선이 독립국임을 확인했다. 이는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 포기였지, 조선이 독립국임을 국제적으로 확인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엔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려는 속셈이 있었다.

 

그런데 423일에 러시아·독일·프랑스 3국이 일본의 요동반도 점유를 반대하고 나왔다. 429일에 일본은 와신상담하며 요동반도 반환을 결정했다.

 

이러자 고종과 민왕후(18511895, 1897년 명성황후로 추존)인아거일(引俄拒日)’로 기울었다. 위협을 느낀 일본은 1895820(양력 108)에 낭인을 동원하여 민왕후를 경복궁 건천궁에서 시해했다. 세계는 일본의 만행을 규탄했다. 이후 사실상 연금 상태인 고종은 1011(양력 1127)에 미국 공사관으로 파천을 시도했지만 미수에 그쳤고(춘생문 사건), 1896년 양력 211일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아관파천에 일본은 닭 쫓던 개였다.

 

# 고종의 친러 정책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한 지 4일 후인 215일에 웨베르와 스페이어 두명의 러시아 공사에게 다음 내용을 러시아 정부에 전달하여 신속한 수용을 촉구했다. 즉 행정 고문 파견, 재정지원, 군사고문 파견과 3천 명의 러시아군을 보내달라는 요구였다. 223일에도 고종은 재차 요구했다.

 

그렇지만 러시아 정부는 서두를 것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아관파천을 통해 일본의 한반도 지배 저지를 한 이상 일본과 충돌 하는 것 보다 속도 조절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었다. 더욱이나 러시아는 한반도보다 만주의 시베리아 철도 건설에 더 관심이 많았다.

 

1896년에 311일에 고종은 러시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민영환을 특명 전권공사로 보냈다. 민영환에게 러시아 정부와 직접 담판하여 아래 요구사항을 관철하라는 것이었다.

 

1. 조선 군대가 신뢰할 만한 병력으로 훈련될 때까지 국왕의 보호를 위한 경비병 제공

2. 군사교관 제공

3. 고문관들 제공 (국왕 측근에서 궁내부 일을 돌볼 고문 1, 탁지부 고문 1, 광산과 철도 고문관 1명 등)

4. 조선과 러시아 두 나라에 이익이 되는 전신선의 연결과 전문가 1명 제공

5. 일본 빚을 청산하기 위한 300만 엔의 차관 제공

 

한편 아관파천으로 다급해진 일본은 어떤 형태로든지 러시아와 타협해야만 했다. 322일에 고무라 주한 일본 공사는 러시아 공사 웨베르에게 4개조로 된 각서 초안을 제시하였다. 이후 협상이 지속되어 514일에 경성 의정서라고 불리는 4개조의 웨베르-고무라각서가 조인되었다. 각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 국왕의 환궁은 국왕의 판단에 일임하되, ·일 양국 대표는 적당한 시기에 환궁을 충고한다. 둘째, 현 내각은 국왕의 자유 선택 에 의해 임명되었으며, ·일 양국 대표는 금후에도 관대 온후한 인물이 조선의 대신에 임명될 수 있도록 권고한다. 셋째, 부산·경성간을 잇는 일본전신선 보호를 위해 일본군을 헌병으로 바꾸고 대구, 가흥에 50, 기타 10개 처에 각 10인 씩 합계 200명을 배치하며 장래 조선 정부가 평온을 되찾게 될 때 점차 철수한다. 넷째, 조선의 정치 상황이 평온해 질 때까지 일본은 경성, 부산, 원산에 도합 800명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러시아도 동 지역에 일본의 병력 수를 초과하지 않는 범위에서 위병(衛兵)을 둘 수 있다.

 

그런데 이 각서는 당사자인 조선이 배제된, 코리아패싱아래 이루어진 협정이었다.

 

526일에 민영환은 모스크바 크레믈린 궁에서 거행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뒤, 65일에 러시아 외상에게 고종의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그런데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는 청나라의 이홍장, 일본의 육군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도 참석했다. 이들도 러시아와 협상을 추진했다.

 

63일에 청나라와 러시아 간에 비밀동맹조약이 체결되었다.

주요 내용은 (1) 일본이 극동의 러시아 영토, 청국, 조선을 침략하는 경우 상호 원조한다. (2) 전쟁 중에는 청국의 모든 항만을 러시아 군함에 개방한다. (3) 청나라는 러시아의 시베리아 철도가 흑룡강성, 지린성을 횡단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르도록 하는 철도건설에 동의한다. (4) 유효기간은 철도건설이 발효한 때로부터 15년으로 한다 등 6개 조항이었다.

 

이로써 러시아는 만주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연결하는 시베리아 철도건설권을 얻었다. 러시아의 극동 아시아 남하정책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69일엔 로마노프야마가타 의정서가 체결되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처음엔 러시아에 ‘39도 한반도 분할론을 제안했다. 하지만 러시아가 일본의 제안을 받아들일 리 없었다.

 

로마노프야마가타 의정서는 조선에 대한 문제를 담고 있었다. 조선의 재정문제는 러일 양국이 공동으로 대응하고, 러시아와 일본은 같은 수의 군인을 주둔시키며, 일본은 기존의 전신선을 유지하고 러시아는 서울에서 국경까지 전신선을 가설한다는 내용이었다.

 

613일에 민영환은 로바노프 외상을 만나 러시아 군인 및 군사교관과 재정고문 파견, 300만엔 차관 제공 등을 요청했으나 러시아는 난색을 표명했다. 결국 민영환은 1021일에 러시아 군사교관 13명과 함께 귀국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