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예술과 혁명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16) 에르미타시 박물관(10)- 루벤스와 반종교 개혁
승인 2019-11-11 10:4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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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플랜더스의 개'는 1872년에 출간된 영국의 여류 작가 위다(Ouida)의 소설을 1975년에 일본 쿠로다 요시오 감독이 각색한 것이다. 고아인 넬로는 안트베르펜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들은 주인에게 버림받은 개 파트라슈를 키운다. 넬로와 파트라슈는 우유 수레를 끌며 우유를 팔면서 생계를 이어간다.
그런데 화가가 꿈인 넬로는 여자 친구 알루아즈에게 초상화를 그려준다. 곡물상인 알루아즈 아버지는 딸이 넬로와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할아버지를 여윈 넬로는 방화범 누명을 쓰고 마을에서 쫓겨난다.
추운 겨울날, 갈 곳 없는 넬로는 파트라슈와 같이 안트베르펜 대성당에서 루벤스의 그림을 보게 된다. 다음날, 사람들은 대성당 그림 앞에서 죽어있는 넬로와 파트라슈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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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루벤스 그림의 성모마리아의 모습은 자식을 잃었어도 담담하다.
반면 프라도 미술관에서 본 베이덴(1399~1464)이 1435년경에 그린 ‘십자가 강하’에는 성모 마리아가 실신하여 성 요한과 한 여인의 부축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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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1606~1669) 방에서 본 그림도 성모 마리아가 실신 상태로 두 여인의 부축을 받고 있다. 렘브란트가 1634년에 그린 이 그림은 나폴레옹의 부인 조세핀의 컬렉션이었다가 알렉산드르 1세가 1814년에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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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성모마리아의 모습이 이리 다를까? 어떤 종교사학자는 이는 카톨릭과 개신교의 차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하면 루벤스의 그림은 가톨릭의 반종교개혁과 관련이 있다.
그러면 종교개혁부터 알아보자. 1517년 10월 31일 수도사이며 신학교수인 마르틴 루터(1483~1546)는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 성(城)교회 정문에 면죄부 판매를 항의하는 ‘95개조의 논제’를 붙였다.
수도사 테첼은 면죄부를 팔면서 연옥에 있는 영혼을 구해준다고 약속했다. 면죄부 판매 대금은 성 베드로 성당 건축자금이었는데, 이는 로마 교황청의 타락의 전형이었다.
루터는 ‘95개조의 논제’ 중 제36조에서 “진정으로 참회하는 모든 사람은 면죄부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에도 그리스도로부터 자신의 죄를 사면 받을 권한을 가진다.”라고 주장하며 면죄부 판매에 정면 도전했다.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긴 것이다. 루터의 반박문 95개조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쇄되어 독일 전역에 퍼졌다.
위기를 느낀 로마 교황청은 1520년 11월에 루터를 파문했다. 그러자 루터는 12월 10일 비텐베르크 광장에서 교황의 파문장과 교회 법전 등을 불태웠다. 1521년 4월에 루터는 보름스 의회에 소환되어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단호하게 거부했다. 감금 직전이었던 루터는 작센의 제후 프리드리히 공의 보호를 받아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도피했다. 그곳에서 그는 1522년에 독일어판 신약성서를 출간하여 대중에게 보급시켰다. ‘오직 성경’, ‘오직 믿음’이었다. 이후 루터파 교회는 북부 독일을 중심으로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등으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
그런데 종교개혁의 주동자는 2세대인 장 칼뱅(1509~1564)이었다. 1536년에 칼뱅은 제네바에서 '기독교 강요(綱要)'를 출간해 ‘예정설’을 주장하고 노동과 금욕을 중시하였고, 신에 의해 이미 결정된 소명 즉 ‘직업’에 충실해야 한다고 설교했다. 칼뱅주의가 시민들에게 직업에 대한 자긍심을 자극시키자 칼뱅의 교리는 프랑스·스위스·프랑드르 지방·영국·스코틀랜드 등지로 확산되었다.
한편 가톨릭은 신교의 종교개혁에 가만히 손 놓고 있지는 않았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년~1563년)를 통한 교리의 정립, 무능하거나 타락한 성직자에 대한 처벌과 규제, 예수회의 활발한 선교와 교육 사업, 그리고 기존의 교리와 성찬식 고수, 성상(聖像)과 성화(聖畵)의 유지 등을 통하여 신교의 도전에 정면 대응했다. 이른바 반종교 개혁이었다.
여행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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