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회 죽천, 함열, 회덕현감으로 근무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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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성 자 | 김세곤 | 등록일 | 2012/04/20 | 조 회 | 5 |
첨부파일 | 산앙정_우계비_0405.jpg (1662 kb) | ||||
![]() 제39회 죽천, 함열, 회덕현감으로 근무하다.
1583년 여름에 죽천 박광전은 왕사사부 임기가 만료되어 감찰을 제수 받았다. 그리고 그 해 겨울에 죽천은 함열현감에 제수되었다. 함열현(咸悅縣)은 전라북도 익산시 함열읍 · 함라면 · 황등면 등 일대에 있던 옛 고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함열현은 동쪽으로 익산군 경계에 이르기까지 13리, 서쪽으로 충청도 한산군(韓山郡) 경계에 이르기까지 9리, 남쪽으로 임피현 경계에 이르기까지 10리, 북쪽으로 용안현 경계에 이르기까지 14리, 서울과의 거리는 4백 66리이다. 죽천이 길을 떠나려고 왕자에게 아뢰니 왕자가 수심에 잠긴 표정으로 강가에 까지 와서 전송하려고 하였다. 죽천은 “왕자는 사사로운 일로 성 밖을 드나들 수 없습니다.”하고 사저에서 이별하였다. 마지막 까지 왕자에게 원칙과 기본을 가르친 사례이다. 정실에 휩싸여서 정치를 하여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그만큼 죽천은 원칙주의자였다. 1584년 초에 죽천은 함열현에 도착한다. 그 해 봄에 죽천은 몸소 관내를 순시하면서 씀씀이를 검소하게 절약하니 창고가 가득 넘쳤다. 그는 관저와 동헌 벽 위에 “視民如傷 시민여상 (다친 사람을 보살피듯이 백성들을 사랑하고 가엾게 여긴다.)”네 글자를 크게 써 붙여 놓고 백성을 자애롭고 편안하게 다스렸다. 시민여상 視民如傷! 이 말은 <춘추좌씨전> 애공(哀公)에 나오는 말로, 여기에는 “나라의 흥성은 백성 보기를 다친 사람을 보는 것처럼 하는 데 있으니 이것이 복이 되고, 나라의 쇠망은 백성을 흙이나 쓰레기처럼 하찮게 여기는 데 있으니 이것이 재앙이 된다. (國之興也 視民如傷 , 是其福也, 국지흥야 시민여상, 시기복야, 其亡也 以民爲土芥, 是己禍也 , 기망야 이민위토개, 시기화야)”라는 글이 있다. 이렇듯 죽천은 솔선수범하여 백성을 다친 사람처럼 대하니 백성들이 모두 부모처럼 친근히 따랐다. 죽천은 공무를 마친 뒤에는 시간을 내어 몸소 학교로 찾아가서 학생들에게 경전과 역사서를 강론하였다. 죽천은 젊어서부터 기쁘거나 화나는 감정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집안에서는 일찍이 어린 노복에게도 죄를 묻지 않았지만, 관직에 있을 때는 혹 문밖을 지나치게 드나드는 자가 있어도 엄하게 매로 다스리며 용서하지 않았으므로 관아가 숙연하였다. 이에 앞서 전주부윤이 암행어사의 논죄를 받게 되었는데 죽천이 암행어사와 오래된 친구였다. 전라감사가 이를 의심하고 다른 일에 얽어 넣어 장계를 올려 죽천을 파직시켰다. 박광전은 일정을 계산하여 양식을 챙기고 그 밖에는 손을 대지 않아 창고 곡식의 잉여분이 수천 포에 이르니 사람들은 그 곡식이 허튼 곳으로 돌아갈까 염려하여 감영에 보고하고 국고에 저장시킬 것을 청하였다. 죽천이 말하기를 “ 후임 현감이 어찌 감히 제멋대로 사용하겠는가? 또 그대들의 말처럼 시행 한다면 나의 공을 자랑하는 데 가깝네.” 하고 따르지 않았다. 1587년에 죽천은 장원서에 근무하도록 제수되었다. 장원서 掌苑署 는 조선시대 원(園)·화초·과일 등의 관리를 관장하기 위해 설치된 관서이다. 그런데 죽천은 장원서에 근무하기도 전에 회덕현감에 제수되었다. 회덕현(懷德縣)은 현재 대전광역시 동구 · 대덕구 일대에 있었던 옛 고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8권을 보면 충청도 회덕현은 동쪽으로는 옥천군(沃川郡) 경계까지 22리이고, 남쪽으로는 전라도 진산군(珍山郡)경계까지 30리 이고, 서쪽으로는 공주(公州) 경계까지 9리이며, 북쪽으로는 문의현(文義縣) 경계까지 29리이다. 서울과의 거리는 3백 20리이다. 회덕현에 도착하니 어떤 왕실의 종친이 촌민과 노비 문제로 송사를 벌였으나 11명의 관원이 바뀌도록 해결되지 못하고 미결로 남아 있었다. 죽천은 문적을 살펴보고 정상 情狀을 알아 촌민에게 승소 판결을 내리었다. 그 종친은 자신의 권세를 믿고 죽천을 사헌부에 꾀어 바쳤다. 사헌부에서 이 일을 확인하여 보니 죽천이 제대로 일을 처리한 것이 밝혀졌다. 그 종친은 기가 꺾여 조용할 수밖에 없었다. 또 한 번은 감사가 어떤 사람의 촉탁에 의해 과부집 여자를 무고하여 죽이려 하였다. 현감 박광전은 그 원통함을 밝히자 감사가 격노하였다. 그는 시비를 구분하여 강력하게 변론하였다. 이내 감사가 부끄러워하여 승복하고 말았다. 업무를 공정하게 처리하고 시비를 가리는 죽천의 강직함이 돋보이는 사례이다. 그런데 이런 일로 말미암아 그는 재상어사 우준민에게 미움을 받아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간다. 죽천이 고향으로 가게 되자 그 고을 사람 강부(1536 - ?)가 시를 지어 이별하였다. 맑은 절개가 백옥대에 성하니 어찌 조 · 증과 같은 소국의 재목이랴. 주공과 공자가 서로 전수하지 않았는데 시례 詩禮와 거문고 소리 크게 열렸네. 淸節宜盛白玉臺 청절의성백옥대 豈爲曺鄫小邦才 개위조증소방재 周公孔子非相受 주공공자비상수 詩禮絃歌巳大開 시례현가사대개
회덕에서 벼슬을 삼년도 채우지 못했건만 어사는 어찌하여 구월에 왔는가? 이별할 때에 남긴 사랑 다시금 알았는데 찬바람 부는 벼슬길이 마음을 어지럽히네. 會稽未盡三年計 회계미진삼년계 御史如何九月來 어사여하구월래 酌水更知遺愛在 작수경지유애재 西風官路別腸廻 서풍관로별장회 죽천처럼 강직하면 부러진다. 본인이 피해를 입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있어야 맑은 사회가 된다. 우리가 죽천에게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공정한 사회. 권력에 아부하지 않는 공직자. 그런 우직한 모습을 우리는 배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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