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인물기행
제24회 죽천 박광전, 1566년 겨울에 퇴계 이황을 만나다. (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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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성 자 | 김세곤 | 등록일 | 2012/02/08 | 조 회 | 5 |
첨부파일 | 산앙정현판.jpg (974 kb) | ||||
![]() 제24회 죽천 박광전, 1566년 겨울에 퇴계 이황을 만나다. (3) 박광전은 21세에 장흥 문씨에게 장가를 들었다. 처남은 문위세였다. 문위세(文緯世 1534년∼1600년)는 미암 유희춘,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호는 풍암 楓庵. 문익점의 9대손인데 1567년에 진사가 되었다. 문익점 文益漸 (1329-1398)은 원나라에서 목화 종자를 몰래 붓대 속에 넣어 가지고 우리나라에 돌아왔다. 그는 실을 뽑는 물레 만드는 법을 가르쳐 백성들이 의복을 짜서 입도록 하였다. 칼 찬 선비 남명 조식은 문익점의 그러한 공을 기려 훗날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이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후직씨와 같다(衣被生民 后稷同).”는 시를 지어 찬양한 바 있다. 보성에는 문익점의 부조묘가 있고 그 후손들이 보성에 살고 있다. 문위세는 1592년 임진왜란 때 박광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군량조달 등의 공을 세워 1595년 용담현령 龍潭縣令에 임명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백성을 동원, 왜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많은 왜적을 무찔렀다. 한편 문위세의 어머니는 기묘명현 해남출신 윤구의 딸이다. 윤구(1495년∼미상)는 호가 귤정 橘亭으로서 윤효정의 아들이다. 1519년 기묘사화 때 삭직되어 영암에 유배되었는데 퇴계 이황과 인연이 깊었다. 죽천은 그의 나이 22세인 1547년에 능주에 있는 송천 양응정을 찾아가 수학한다. 양응정(梁應鼎 1519년∼1581년)은 호가 송천 松川이고 조광조의 시신을 수습한 학포 양팽손(1488-1545)의 셋째 아들이다.
당시 양응정은 부친인 양팽손의 상을 당하여 시골에서 거상 居喪중 이었다. 이 때는 1545년에 11세의 명종이 즉위하자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와 외삼촌 윤원형이 조정을 쥐락펴락하였다. 1545년에 을사사화가 1547년에 정미사화가 일어나 지조 있는 선비들이 거의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를 가는 때이었다. 전라감사를 한 규암 송인수가 사약을 받았고 미암 유희춘이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를 간 것도 이 당시이다. 이런 시기에 양응정은 은인자중하면서 선비로서 성리학 공부에 열중하였다. 1552년에 송천 양응정은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에 임명된다. 1555년(명종10년) 5월에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왜구가 70척의 배를 이끌고 달량포(영암의 한 포구)를 침입하여 영암, 장흥, 강진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장흥군수가 전사하고 영암군수가 포로가 되는 등 국방에 구멍이 크게 뚫리었다. 1556년 2월 명종 임금은 모든 관리들에게 남쪽의 왜구와 북쪽의 오랑캐를 물리칠 대책을 적어 내라고 하였다. 당시 병조좌랑이었던 양응정은 이 시험에 장원을 하고 곧 승진하여 이조좌랑에 오른다. 그런데 그는 기개가 너무 강하여 굽힐 줄 몰랐다. 당시 실세였던 명종 비 심왕후의 외삼촌 이량은 그를 밉게 보아 그는 조정에서 근무하지 못하고 관서, 관북평사로 발령이 난다. 이때부터 그는 외직으로 내몰리는 고난이 시작된다. 양응정은 자신을 “나는 글 쓰는 일에는 자신이 없고 다만 센 활로 오랑캐를 쏘아 마칠 줄을 알 뿐이다”라고 자탄을 한다. 1558년에 양응정은 다시 내직으로 들어간다. 이 때 그는 정사룡과 함께 별시의 고시관이 된다. 양응정은 '천도책 天道策'을 시험문제로 낸다. 이 문제는 천문이나 바람의 순행과 기상의 이변에 대한 이치를 찾는, 이름 그대로 하늘의 도에 관한 것이었다. 이 때 별시에 응시한 율곡 이이(1536-1584)가 유창하게 답안을 쓴다. 그가 쓴 답안의 요지는 이기합일 理氣合一과 천인상감 天人相感이다. 즉 이와 기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며 사람의 기가 바르면 천지의 기도 역시 바르다는 것이다. 또한 하늘과 사람이 서로 감응하여야 천지가 평안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천지가 안정되려면 덕 있는 군주가 정치를 잘 하여야 한다고 끝맺는다. 천도책은 명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중국의 사신이 이를 보고 “천하문장의 책제이요, 일대현사의 답안이다”라고 칭송하였다. 천하 문장(송천 양응정)이 낸 시험문제이고 일대의 현명한 선비(율곡 이이)가 쓴 답안이라는 뜻이다. 1574년에 양응정은 경주부윤으로 재직 중에 또 한 번의 시련을 겪는다. 1571년에 진주목사로 근무할 때에 청렴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된 것이다. 경주부윤에서 파직된 양응정은 낙향하여 능주에서 나주 박산으로 거처를 옮긴 후, 임류정 臨流亭을 짓고 유유자적한 삶을 산다. 1577년에 양응정은 성절사로 명나라에 간 이후 대사성 벼슬을 한 것을 마지막으로 은퇴한다. 이후 그는 인재 양성에 전념한다. 그의 제자들 중에는 정철, 박광전, 최경회, 최경창, 백광훈등이 있다. 그는 아들에게도 공부를 가르쳤는데 병법도 가르쳤다. 한번은 군사훈련도를 가르치면서 “나라의 형세가 위태롭기 짝이 없는데 나라를 지키는 자는 허술하기 이를 데 없고, 문무의 관리들은 맡은 일을 게을리 하고 세월만 보내며 환난에서 벗어날 대책은 마련하지 않고 있으니 걱정이다. 남쪽의 근심이 멀지 않는데 나야 그 환난을 보지 않을 것이나 너희들은 고난을 당할 것이다. 배운 것을 게을리 하지 말고 잘 대비하라”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을 예견한 듯 한 말이다.
송천은 문장에 능하였다. 시문에 뛰어나 선조 시절에 팔문장가로 알려졌으며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도 호남의 대문장가 10걸 중 한사람이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박호동에는 임류정, 임진왜란 때 순절한 양응정의 아들 양산숙 등 충신 ․ 효자 ․ 열녀를 모신 양씨삼강문 등 양응정의 흔적이 있다. 다시 <죽천연보>를 읽어 보자. 1550년, 25세의 박광전은 첫 아들을 보았다. 이름을 근효라고 지었다. 큰 아들 박근효 朴根孝는 호가 만포 晩圃로서 성혼 · 이이의 문인이다. 1591년(선조 24) 진사시에 합격하고 학문에 힘쓰던 중,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우 박근제 朴根悌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함께 금산·무주 등지에서 적을 격파하여 군세 軍勢를 크게 떨쳤다. 이러한 사실이 보고되어 그는 군자감정 軍資監正 · 장수현감 등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29세에 죽천은 동당초시에 1등으로 합격하였다. 31세 때는 한윤명과 함께 경전의 옛 뜻을 토론하느라 1년 동안 함께 공부하였다. 우뚝한 모습으로 단정히 앉아 한밤중까지 촛불을 밝히고 닭이 울면 세수한 뒤 서로를 경계하고 질책하면서 학문을 독실하게 연마하였다. 1557년에 죽천은 보성 죽천 뒷산(지금의 광탄천 부근 역과리)에 정사精舍를 짓고 위기도학 爲己道學에 정진하였다. 이 냇가는 우리말로는 ‘대내’라고하며 보성군 노동면 광곡리에 있는 광탄천을 말한다. 지금은 이곳에 죽천정이 자리 잡고 있다. 당시 박광전은 그의 호를 해교 海嶠라고 썼는데 죽천정사에서 공부를 한 때부터 호를 죽천 竹川으로 하였다. 한편 이 당시에 왜구가 제주등 해안가를 자주 침입하자 죽천은 매일 활쏘기 훈련을 하면서 국난 대처를 역설하였다. 죽천의 나이 33세에 문인 선정달이 초사 楚辭를 배우고자 하였다. 초사는 초나라 재상 굴원이 지은 글 등을 모은 책이다. 죽천은 초사 책가위에 오언절구 시를 써주었다. 선정달의 초사 책에 적다. 굴원의 초사를 배우려면 먼저 굴원의 생각을 알아야 한다네. 그대 보게나, 병들지 않은 사람이 어찌 그처럼 신음할 수 있으리 욕학굴자사 欲學屈子辭 선심굴자의 先尋屈子意 군간불병인 君看不病人 나득신음사 那得呻吟似 죽천이 지은 이 시는 글이나 시의 의미를 알려면 작가의 마음 상태와 시작 詩作 의도를 알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점은 요즘도 통용되는 시, 소설 등 문학 감상법이다. 초사를 알려면 먼저 굴원 屈原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굴원은 누구인가. 굴원 (BC 339-278)은 초나라 사람으로서 초나라 회왕과 양왕 시대에 살았던 정치가이다. 그는 회왕의 신임을 얻어 왕을 보좌하고 국사를 도맡으면서 국빈을 접대하는 등 요즘 같으면 국무총리와 외교부 장관직을 수행하였다. 그런데 조정대신들의 시기를 받아 점차 회왕과 거리가 멀어지면서 결국 추방당하고 만다. 그 당시는 진나라, 제나라, 초나라 등 열국들이 서로 견제하고 다투는 전국시대였다. 굴원은 회왕에게 제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를 견제할 것을 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도리어 진나라는 재사 才士 장의를 초나라에 파견하여 초나라 귀족들이 회왕을 견제토록 하였다. 회왕은 무능하여 결국 진나라에게 농락을 당하고 제나라와 단교하고 말았다. 그 후 초나라는 고립되어 회왕은 진나라에서 죽고 말았다. 이어서 즉위한 초나라 양왕은 굴원을 더욱 핍박하여 굴원은 다시 추방을 당하고 멀리 양자강 남쪽 강남지방으로 내쫓기는 몸이 되었다. 결국 굴원은 조국 초나라가 망해 가는 것을 알면서도 추방당한 자신의 처지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울분과 비통에 찬 자신의 심경을 노래한 이소 離騷, 어부사, 사미인등 여러 편의 초사 楚辭를 남기고 양자강 지류인 멱라강에 돌을 안고 스스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하고 만다. 이때가 음력 5월 5일 단오절이다. 이 날은 한국에서는 창포에 머리를 감는다. 중국에서는 이 날에 만두를 빚어 먹고 용선 龍船 축제를 한다. 이는 굴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한다. 중국에서는 단오절이 되면 종자라고 하는 만두 비슷한 떡을 만들어 서로 나누어 먹고 댓잎이나 갈잎에 싸서 강과 바다에 던지며 뱃놀이를 하는 행사가 열린다. 원래 이 행사는 비통한 삶을 살다간 초나라의 충신 굴원의 죽음을 애도하는 초나라 사람들이 죽통 竹筒에 쌀을 담아 강물에 던져서 교룡 蛟龍이 그것을 대신 먹고 굴원의 시신은 해치지 말아 달라고 한 연유에서 시작되었다 한다. 굴원의 작품들은 고대 중국 전국시대의 시집인 〈초사 楚辭〉에 실려 있다. 초사는 양자강 중류지역의 노래로 중국남방 특유의 지방색채가 농후한 새로운 형식의 민간의 노래이다. 초사에 실린 글 중에서 대표작이 바로 굴원의 ‘이소 離騷’이다. ‘슬픔을 만나 떠나다’는 뜻의 시름의 노래(이 離는 이별하여 떠난다는 뜻의 한자이고 소 騷는 근심의 뜻인 한자이다) ‘이소 離騷’는 충성스런 굴원이 간신들의 모함으로 임금으로부터 의심을 받아 근심이 생기고, 임금과 이별하면서 결국은 죽기를 작정한다는 굴원의 처지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다. 박광전은 34세인 1559년에는 보성 천봉산 아래 대원사에서 공부를 가르쳤다. 그는 틈틈이 臺를 건축하고 못을 파 수양할 곳을 만들었다. 이때 그는 우계기 遇溪記 글을 쓴다. 우계기는 1559년 봄에 친구인 의봉 남언기와 제자 선정달과 함께 천봉산 대원사 근처에서 강학할 대를 짓고 근처의 절경 20군데를 찾은 것을 글로 쓴 기문이다. 절경 20군데의 이름은 운혜, 구정, 예정, 풍주, 구암, 유하대 등이다. 죽천의 친구인 의봉 남언기는 거북바위에 우계 遇溪 두 글자를 바위에 새기었다. 이 글씨가 있는 곳에 지금은 산앙정이 있다. 산앙정은 대원사 바로 들어가는 길목 왼편에 있다. (사진 참조) 훗날 남언기가 죽천이 지은 우계기를 송천 양응정에게 보이자 송천은 감탄하여 칭찬하였다 한다. 농암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은 후일 우계기를 읽고 명문장임을 칭송하였다. 김창협은 당대에 명문 출신으로 아버지 김수항과 형 김창집이 모두 영의정을 지냈다. 육창(六昌)으로 불리는 여섯 형제 중에서 특히 창협의 문(文)과 동생 창흡(昌翕)의 시는 당대에 이미 명망이 높았다.
여느 사람 같았으면 한참 출세의 길을 모색하기에 여념이 없을 30대에 죽천은 보성 죽천정사에서 학문 연구에 정열을 쏟았고 또 천봉산에 들어가 강학에 전념하는 등 실로 도학을 갈고 닦았다. 이 무렵 어릴 적 스승 홍섬이 다시 조정에서 재상 벼슬을 하자 그를 한번 보고 싶어 하였으나 죽천은 선비가 권문에 아부하는 혐의가 있다하여 일부러 찾아보지 않았다. 홍섬은 1558년에 좌찬성으로 이조판서를 겸하고 1563년 판의금부사로 복직되어 예문관 · 홍문관의 대제학을 지냈다. 1567년 예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하자 원상 院相으로 서정 庶政을 처결하고 이어 우의정에 올랐고 1571년(선조 4) 좌의정이 되어 궤장 几杖을 하사받고 영의정에 승진되어 세 번이나 중임하였다. 1561년, 죽천의 나이 36세에 중국 사신이 입국하게 됨에 판서 윤의중이 접반사가 되었다. 윤의중(尹毅中 1524년∼미상)은 호는 낙촌 駱村으로 기묘명현 윤구 尹衢의 아들이며, 고산 윤선도의 할아버지이다. 그런데 윤의중과 죽천의 처남인 문위세는 서로 이종 간이었다. 윤의중은 1548년(명종 3)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1553년 부수찬이 되고, 1557년 의정부검상·사인을 거쳐, 응교 · 직제학 · 예조참의· 승정원 동부승지 등을 지냈다. 윤의중은 죽천을 종사관으로 추천하였으나 죽천은 사양하였다. 이후 죽천은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의관을 단정히 하고 불러 깨우치기를 “사람이 배우는 데에는 다만 쓰고 외우는 것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하여 학문이 있으니, 만약 배우고 싶거든 어찌 자신을 위하는 학문의 본뜻을 생각지 않겠는가?” 하였다. 1566년 겨울, 41세의 죽천은 마침내 퇴계 이황에게 주자학을 배우기 위하여 경상도 예안현(지금의 안동시)으로 길을 떠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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