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회 연재를 마치면서 – 다시 죽천 박광전을 생각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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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성 자 | 김세곤 | 등록일 | 2012/05/03 | 조 회 | 26 |
첨부파일 | 죽천_신도비_미력면.jpg (1155 kb) 죽천_유적_화산재_입구_안내문.jpg (2431 kb) 회전_죽천_신주_(겸백면_사곡리_화산재).jpg (1456 kb) | ||||
![]() ![]() ![]() 제42회 연재를 마치면서 – 다시 죽천 박광전을 생각한다.
이제 보성의 인물, 죽천 박광전 (1526-1597) 기행 연재를 마친다. 2011년 10월부터 2012년 4월까지 7개월 동안 41회에 걸쳐 보성군청 인터넷 홈페이지에 글을 연재하였다. <국역 죽천집>, <박죽천연구논총>, <책문>등 박광전 관련 문집과 <퇴계의 생애와 학문>, <도산잡영>, <은봉전서> , <임진왜란사> , <이순신 백의종군>, <난중일기> 등 관련 책을 읽으면서 죽천의 생애와 사상을 탐구하고 보성, 화순, 안동, 전주 등 관련 유적지를 답사하면서 죽천의 체취를 느끼었다. 보성 관아 자리인 보성군청 답사 때는 박광전이 임진왜란 때 전라좌의병을 일으킨 큰 뜻을 새기었고, 보성군 문덕면 천봉산 아래의 산앙정과 대원사 그리고 화순군 동복면 등을 찾았을 때는 정유재란 의병장 박광전의 체취를 느끼었다. 열선루가 있었던 보성군청 뒤 교회 앞에서 필자는 어쩌면 죽천과 이순신 장군이 만났을 것이라는 상상도 하였다. 죽천의 제실인 보성군 겸백면 화산재를 두 번째 갔을 때 박씨 문중 분이 보관하고 있는 <주자서 절요> 원본을 보았다. <주자서절요>는 퇴계가 죽천과 이별하면서 준 책이다. 440년이 넘은 고서적을 보고, 화산재 마루에 걸린 퇴계가 죽천에게 건네준 이별시 5수를 읽으면서 죽천이 퇴계의 고제 高弟임을 실감하였다. 글을 연재하는 동안에 다시 안동을 방문하였다. 퇴계 종택과 태실 그리고 도산서원을 찾았다. 도산서원 들어가자마자 있는 도산서당에서는 오래 발길을 멈추었다. 이곳 암서헌에서 죽천이 퇴계에게 공부를 배우고 절우사 화단에서 매화를 보고 산책하였으리라는 생각애 잠기었다. 기숙사인 농운정사에서 잠자고 시습재, 관란헌에서 동료들과 토론하며 지냈으리라는 생각도 하였다. 또한 전주 한옥마을 안에 있는 경기전과 전주사고를 답사하여 죽천의 경기전 참봉시절을 회상하였고, 강암 송성용 서예관에서 신도비를 지은 전우의 글씨도 보았다. 죽천 묘소 및 신도비, 용산서원 유허비와 용산서원 터 등도 답사하였다. 죽천 박광전 연재 글은 크게 3부로 나누어진다. 1부 임진왜란, 2부 죽천과 퇴계의 만남, 3부 죽천의 출사이다. 먼저 제1부 임진왜란을 살펴보자. 제1부는 41회 연재의 절반인 21회를 차지한다. 연재는 “국난 중에도 민생안정이 먼저입니다. - 죽천 박광전, 광해군에게 시무책을 올리다.”부터 시작한다. 1593년 12월에 광해군의 사부였던 죽천은 전주로 달려간다. 그는 세자 광해군을 만나서 시무책을 올린다. 시무책의 핵심은 국난을 극복하려면 먼저 민생을 안정시키고 백성을 어루만지며 농사를 장려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은 조선왕조가 세워진지 200년만에 최대의 위기였다. 국난을 극복하려면 왜적과 싸워 이기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런데 거기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 민생안정이라고 죽천은 역설한다. 이를 보면 죽천은 왕조 시대에 임금에게만 절대 충성하는 사람이 아닌,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소위 맹자의 왕도정치에 가장 충실한 유학자임을 알 수 있다. 이어서 연재 한 글은 “죽천, 보성에서 전라좌의병을 일으키다.”이다. 고경명이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이후 죽천은 보성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이 때 그가 지은 격문은 가히 압권이다. 아쉽게도 그는 병이 나서 임계영이 의병장이 되고 처남인 문위세와 두 아들 박근효와 박근제가 의병에 참여하였다. 이후 필자는 “전라좌의병, 제1차 진주성 싸움에 참전하다. 경상도에서 왜군을 무찌르다. 전라좌의병장 임계영, 전공을 세운 의병들을 상 주도록 하는 상소를 올리다. 전라좌의병 부장 장윤, 진주성 2차 싸움에서 순절하다.”를 연재하였다. 이 연재를 통하여 전라좌의병이 경상도에서 왜적과 오랫동안 대치하였고 두 차례의 진주성 싸움에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난다. 호남은 임진왜란 때에는 왜적의 침범을 안 당하였으나, 정유재란 때는 초토화되고 말았다. 전라도 백성들이 모두 피난을 가야 했고, 산하가 온통 불탔다.
박광전은 다시 의병장으로 나섰다. 보성의 천봉산에서 피신하다가 의병을 모아 동복에서 왜적을 물리쳤다. 각 고을의 수령들이 산속으로 피신한 상황에서 이긴 값진 승리였다. 그 당시에는 의병으로 나선 이도 거의 없었지만 설령 나섰어도 패전한 의병들이 많았다. 그런데 관아를 버리고 도망간 고을 수령들은 관내를 이탈한 죄도 매우 큰 데 마치 철면피처럼 박광전의 공을 시기하여 전라감사에게 모함하였다. 죽천은 별세하기 한 달 전에 전주의 전라감영까지 가서 조사를 받아야 했다. 정말 울분이 치솟는다. 정의가 사라지고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의인은 설 땅이 없는 것일까? 특기할 사실은 정유재란 시 이순신 장군이 보성에 머물렀다는 점이다.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1597년 8월15일에 열선루에서 한산도가를 읊었다. 또한 선조임금이 수군을 육군에 복속시키려고 하자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나이다. 今臣戰船尙有十二 ”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런데 열선루가 아직 복원이 안 된 점이 아쉽다. 아무튼 1부 임진왜란 연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죽천 박광전 입장에서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었고, 전라좌의병의 발상지인 보성의 위상을 다시 확인하는 좋은 기회였다. 제2부는 ‘죽천, 퇴계를 만나다.’이다. 이 글은 14회 연재하였는데 죽천은 1566년 겨울, 그의 나이 41세에 퇴계에게 공부를 배우기 위하여 안동에 간다. 2부는 1566년까지의 죽천의 40년 생애를 살피는 일부터 시작하였다. 어린 시절에 그는 고흥으로 귀양 온 홍섬에게 공부를 배운다. 1547년에는 송천 양응정의 문인이 된다. 이어서 죽천정과 대원사 근처에서 공부한다. 죽천은 미암 유희춘과 처남 문위세의 소개로 퇴계를 만난다. 1566년 겨울 한 철을 안동에서 지내고 보성으로 돌아오면서 죽천은 퇴계로부터 <주자서 절요> 한 질을 받는다. 퇴계가 죽천에게 준 이별시 5수는 인연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제3부 출사는 죽천의 공직생활이다. 죽천은 1568년에 증광회시에서 용철고비부 勇撤皐比賦를 지어 2등을 하였다. 용철고비부는 용기 있게 스승의 자리를 걷어버린 북송의 유학자 장재를 칭송하는 부이다. 박광전은 “정벌이냐 화친이냐?”는 책문 시험도 치른다. 시험문제는 “같은 정벌이라도 흥하고 망한 차이가 있고, 같은 화친이라도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진 차이가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대개 정벌을 주장하는 사람은 화친하는 것을 나라의 모욕이라 여기고, 화친을 주장하는 사람은 정벌하는 것을 분쟁의 단서라고 여긴다. 어떻게 해야 올바른 도리로 외적에 대해, 나라가 욕을 당하거나 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이었다. 죽천은 책문에 답한다. 정벌의 원칙은 힘을 헤아리는 데 (量力)있고, 화친의 원칙은 형세를 살피는 데 (審勢) 있다고 전제한다. 따라서 힘을 헤아려서 대처하면 이길 수 있고, 형세를 살펴서 대처하면 상대방의 침략의도를 사전에 분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힘과 형세를 살펴서 힘에 의거하여 정벌을 할 만하면 정벌을 해야 하고, 형세를 살피어 화친 할 만하면 화친을 하여야 한다고 대책을 제시한다. 죽천은 그의 나이 46세에 비로소 출사한다. 전라감사 유희춘은 박광전을 전주 경기전 참봉으로 특별 채용한다. 1573년에 죽천은 헌릉 참봉에 임명되었고 1581년부터 1583년 여름까지 어린 임해군과 광해군의 사부가 된다. 1583년 겨울에는 전라도 함열현감에 제수되었다. 그는 관저와 동헌 벽 위에 “視民如傷 시민여상 (다친 사람을 보살피듯이 백성들을 사랑하고 가엾게 여긴다.)” 네 글자를 크게 써 붙여 놓고 백성을 자애롭고 편안하게 다스렸다. 시민여상 視民如傷! 이 말은 <춘추좌씨전> 애공(哀公)에 나오는 말로, 여기에는 “나라의 흥성은 백성 보기를 다친 사람을 보는 것처럼 하는 데 있으니 이것이 복이 되고, 나라의 쇠망은 백성을 흙이나 쓰레기처럼 하찮게 여기는 데 있으니 이것이 재앙이 된다.”라는 글이 있다. 이어서 죽천은 회덕현감이 된다. 이 때 회덕현에는 왕실의 종친이 촌민과 노비 문제로 송사를 벌였으나 11명의 관원이 바뀌도록 해결되지 못하고 미결로 남아 있었다. 죽천은 문적을 읽고 정상 情狀을 살펴서 촌민에게 승소 판결을 내리었다. 패소한 종친은 자신의 권세를 믿고 죽천을 사헌부에 꾀어 바쳤다. 사헌부의 조사결과 죽천이 제대로 일을 처리한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죽천은 나중에 모함을 받아 파직된다. 죽천처럼 강직하면 부러진다. 피해를 입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있어야 정의로운 사회가 된다. 우리가 죽천에게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공정한 사회를 위하여 권력에 아부하지 않는 공직자. 그런 우직한 모습을 우리는 죽천에게서 배운다. 1590년에 죽천은 보성으로 내려온다. 이 때 죽천은 선산에 성묘하고 죽천정 근처에서 감회시 8수를 지었다. 마지막 41회 글은 화산재와 신도비 그리고 묘소, 용산서원 유허비 답사 기행 글이다. 올해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420년 되는 해이다. 임진왜란 7주갑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한 말 “호남국가지보장, 약무호남 시무국가”가 생각난다. 호남은 조선을 살린 원동력이었다. 호남의 선비들과 백성들이 나라를 구하였다. 그 한 축이 바로 전라좌의병이다. 금년 중에 보성군청이나 보성 문화원이 앞장서서 전라좌의병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하였으면 좋겠다. 죽천 박광전에 대한 재평가도 곁들였으면 한다. 이제 연재 글을 모두 마친다. 글을 마치면서 다시 죽천을 생각한다. 죽천 박광전. 그는 백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민생이 가장 먼저임을 몸소 실천한 선비였다. 시민여상 視民如傷을 체화한 선각자였다.
김세곤 (역사인물기행작가, 한국 폴리텍 대학 강릉 캠퍼스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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