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회 죽천, <주자서절요> 공부에 탐닉하다.
퇴계 이황과 헤어지고 고향 보성으로 돌아온 죽천은 1567년 2월에 퇴계가 이별 선물로 준 <주자서 절요>의 서문 뒤에 글을 적는다.
이를 읽어보자
주서절요서 후지 朱書節要序 後識
선생(퇴계 이황)은 가정 계묘년(중종 38년, 1543)에 처음으로 회암 주부자의 책을 얻어 보고, 그 중에서 더욱 학문에 관계되어 수용하기에 절실한 것을 구하되, 오직 요지를 얻는데 힘썼으며, 글씨를 잘 쓰는 벗들로 하여금 권수를 나누어 깨끗이 베끼도록 하여 모두 15권 8책으로 만들었다. 무오년(명종13년,1558)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하고 그 일을 서문으로 적어 상자 속에 보관하였다.
병인년(명종21년 1566) 겨울에 선생을 찾아가 제자의 예를 갖추니, 선생이 말하기를 “수사(洙水와 泗水, 공자가 사는 노나라의 강 이름, 공자 문하라는 의미임)이후, 이전의 성인이 미처 드러내지 못한 것을 밝힌 사람으로 주자처럼 그 종지 宗旨를 얻은 분이 없었네. 찾아오는 후학들을 끝없이 기다려 힘써 배우기를 보살피기를 그치지 않을 것이다”하고 <절요> 8책을 주면서 “절대로 남에게 보이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대개 선생의 숨은 뜻은 글을 짓는다고 자처하지 않으면서 지결 (지결: 중요한 뜻)을 강구하여 밝히고 공부의 과정을 권면하려는데 있었다.
아울러 서문을 경건히 받고 의심난 것을 질문함으로써 선생의 해설을 얻어 그 정밀한 뜻을 탐구하였으며, 밝혀지지 않으면 그만 두지 않았다. 친히 가르침을 받고 깊이 성찰하여 경계한 바를 깨달아 여기에다 적으니, 아마도 선생께서 교육해 준 뜻을 저버리지 않게 되리라.
- 가정 정묘년(명종 22, 1567) 2월 모일에 문인 박광전이
삼가 지음
이 ‘주서절요서 후지’를 읽으면서 우선에 두 가지가 궁금하다. 첫째 주자서 절요란 무엇인지? 둘째 퇴계가 지은 ‘주자서절요서 序’는 어떤 내용인지이다.
먼저 한국고전번역원의 고전종합DB의 <퇴계집>에서 퇴계가 1558년에 지은 <주자서절요서>를 찾았다. 이를 읽어 보자.
주자서절요 서 (朱子書節要 序)
회암(晦菴) 주부자(朱夫子 : 주자)는 아성(亞聖 : 성인(聖人)다음이란 뜻)의 자질이 뛰어나 하락(河洛)의 전통을 이어 도덕이 높으며 공업(功業)이 크다. 경전(經傳)의 뜻을 밝혀 천하의 후세 사람에게 다행하게 가르친 것이 귀신에게 물어도 의심이 없고, 백 대 후에 성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려도 의혹되지 않을 것이다.
부자가 돌아가신 후 두 왕씨(王氏)와 여씨(余氏)(두 왕씨는 왕잠재(王潛齋)와 왕실재(王實齋)를 말하고, 여씨는 여사로(余師魯)를 말한다.)는 부자가 평일에 지은 시문류 (詩文類)를 전부 모아 <주자대전(朱子大全)>이라 이름 하였으니, 모두 어느 정도의 분량이 되었다. 그 가운데 공경대부(公卿大夫)와 문인, 그리고 친구와 왕래한 편지가 많아서 48권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글이 우리나라에 유행된 것은 아주 드물었으므로, 선비들이 얻어 본 것은 아주 적었다. 가정(嘉靖) 계묘년(1543, 중종38)에 우리 중종 대왕이 교서관(校書館)에 인쇄하여 반포하도록 하였으므로, 나도 비로소 이런 책이 있음을 알고 구하였으나, 아직껏 그것이 어떠한 종류의 책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책을 싣고 시골에 돌아와서 날마다 문을 닫고 조용히 앉아서 이 글을 읽어 보니, 점점 그 말이 맛이 있고 그 뜻이 무궁함을 깨달았으며, 더욱이 서찰에 느낀 바가 많았다.
대개 그 책 전체에 관해서 논한다면, 땅이 만물을 싣고 있고 바다가 온갖 만물을 포용한 것과 같아서 없는 것이 없으나, 어려워서 그 요점을 얻기가 어렵다. 그러나 오직 서찰은 각각 그 사람의 재주의 고하(高下)와 학문의 천심(淺深)을 따라 병을 살펴서 약을 쓰며 물건에 따라 알맞게 담금질을 하는 것과 같아서, 혹은 눌리고 혹은 들추며, 혹은 인도하고 혹은 구원하며, 혹은 격동하여 올리고 혹은 물리쳐 깨닫게 하여서, 심술(心術)의 은미한 사이에는 그 악을 용납하지 못하게 하고, 의리(義利)를 궁구히 하는 즈음에는 홀로 먼저 조그마한 착오도 비추어 보니, 그 규모가 넓고 크며 심법(心法)이 엄하고 정밀하다. 못에 다다르면 얼음을 밟는 것과 같아서 조심하고 조심하여 잠깐이라도 쉴 때가 없다. 분노를 징계하며 욕심을 막아 선에 옮기며, 악을 고치기에 불급(不及)할까 두려워한다. 강건하고 독실하여 빛이 나서 날로 그 덕을 새롭게 하니, 힘쓰고 힘쓰며 따르고 따르기를 마지않음이 남과 자기의 사이가 없다. 그러므로 그 사람에 고한 것이 능히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하고 흥기하게 함이 당시 문하(門下)에 직접 배운 사람만 그럴 뿐 아니라, 비록 백대 후라도 진실로 이 글을 보는 자는 직접 가르침을 받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아아, 참 지극하도다.
그러나 그 책이 너무 많아서 연구하기가 쉽지 않고 겸하여 그 책에 실려 있는 제자의 물음이 혹 득실이 있음을 면하지 못하였다. 내 어리석은 것은 스스로 헤아리지 않고, 그중에 더욱 학문에 관계되고 수용에 간절한 것만을 뽑아내되, 편장(篇章)에 구애되지 않고 오직 그 요긴함을 얻기에만 힘쓰고, 이에 글씨를 잘 쓰는 벗과 아들과 조카들에게 주어 권(卷)을 나누어 쓰기를 마치니, 무릇 14권 일곱 책이 되었으니 대개 그 본서에 비교하면 감해진 것이 거의 3분의 2이다. 참람한 죄는 피할 바가 없다.
그러나 일찍이 송 학사(宋學士)의 문집을 보니 거기에 기록하기를, 노재(魯齋) 왕 선생(王先生)(송나라 왕백(王柏 : 1197~1274)을 말한다. 자는 회지(會之)이며 저서에 <독역기(讀易記)>등이 있다.)이 뽑은 주자서를 북산 北山 하선생 何先生 (송나라 하기(何基 : 1188~1269)를 말한다. 자는 자공(子恭)이며, 황간 黃榦을 통하여 주희의 학문을 전수받았는데 왕백 王柏을 가르친 적이 있다.)에게 교정하기를 청하였다 하였으니, 옛사람이 이미 이런 일을 하였다. 그 뽑고 교정함이 응당 정밀하여 후세에 전할 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송공(宋公)이 오히려 그 책을 얻어 보지 못하였다고 탄식하였는데, 하물며 우리는 해동에서 수백 년 후에 태어났으니, 또 어찌 그 책을 보고서도 좀 더 간략하게 만들어 공부할 자료를 삼으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성경(聖經)과 현전(賢傳)은 어느 것이나 다 실학(實學)이 아니겠는가. 또 지금 주자가 경전에 집주(集註)한 모든 말을 집집마다 전하고 사람마다 외우니, 모두가 다 지극한 가르침인데, 자네는 홀로 부자의 편지에만 관심을 가지니, 어찌 숭상함이 그리 편벽되고 넓지 못하는가?” 하였다. 나는 대답하였다. “자네의 말이 근사하나 그렇지 않다. 대개 사람이 학문을 하는 데는 반드시 단서(端緖)를 열어 흥기할 곳이 있어야 성취하게 될 것이다. 또 천하의 영재가 적지 않으며, 성현의 글을 읽고 공자의 말을 외기를 부지런히 하지 않는 것이 아니건만, 끝내 이 학문에 힘을 쓰는 자가 있지 않는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그 단서를 열고 그 마음에 징험함이 있지 않는 까닭이다.” 지금 이 서찰의 말은 그 당시 사우(師友)들 사이에서 성현의 요결(要訣)을 강명하고, 공부를 권장한 것이었으니 저들과 같이 범범하게 논한 것과는 다르고 어느 것이나 사람의 뜻을 감동시키며 사람의 마음을 흥기시키지 않은 것이 없다.
김세곤 (역사인물기행작가, 한국폴리텍 대학 강릉캠퍼스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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