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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칼럼

[김세곤 칼럼] 해방정국 깊이보기 ④소련, 북한을 통치하다

[김세곤 칼럼] 해방정국 깊이보기 ④소련, 북한을 통치하다

 

김세곤 컬럼리스트 | segon53 @hanmail.net | 2025.01.31 11:29:59

[프라임경제] 1945년 8월19일에 일본 관동군이 마침내 소련군에 항복했다. 이후 소련군은 파죽지세로 원산과 함흥에 진출했다. 8월24일 함흥에 비행기로 도착한 소련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는 시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 소련의 북한 통치 

8월24일에 소련은 평양에 들어왔다. 8월25일에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는 포고문에서 '조선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고 발표했다. 

'조선 인민들에게! 조선 인민들이여! 붉은 군대와 연합국 군대들은 조선에서 일본 약탈자들을 몰아냈다.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신조선 역사의 첫 페이지가 될 뿐이다. 화려한 과수원은 사람의 땀과 노력의 결과이다. (...) 조선 사람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당신들의 수중에 있다. 당신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죄다 당신들에게 달렸다.'(강준만 저,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 편 1권, , 인물과 사상사, 2004, p 51)

8월26일에 치스차코프 사령관은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조만식 위원장과 현준혁 조선공산당 평남지구 위원장을 만나 행정권 이양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평남인민정치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위원장에는 조만식, 부위원장에는 현준혁이 맡았다. 

이어서 평안북도는 8월27일, 함경남도는 8월30일, 황해도는 9월8일에 인민정치위원회가 결성되었고, 다른 도에서도 인민정치위원회가 9월 말까지 결성되어 행정권을 장악했다.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산책 1940년대 편 1권, p 52 ; 김성보 외 2인,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 웅진지식하우스, 2004, p 17-25)

이처럼 소련군은 직접 통치를 하지 않고 북한 정치인들에게 통치를 맡기는 간접통치 방식을 택하였다.

하지만 소련은 제25군 사령부에 민정 담당 부사령관을 두어 정권을 세우는 일뿐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안문석 지음, 북한 현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6, p 29) 

한마디로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한편 소련군은 8월26일부터 38도선을 공식적으로 봉쇄했다. 남과 북을 잇는 경의선, 전화 통신, 사람과 물자의 왕래 등 모든 것을 다 끊었다. 다만, 소련군은 북한 사람들의 남한으로의 이동은 한동안 모른 척 했다.

◆ 소련군의 강간과 약탈

1945년 해방 후에 이 말이 유행했다. '미국을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라. 일본이 다시 일어난다.' 북한 주민들은 해방군을 자처한 소련군에 속았다. 소련군은 강간과 약탈 등 엄청난 만행을 자행했다. 한마디로 '마오제'였다. (마오제는 함경도 사투리로 '막 굴러먹은 놈'이라는 뜻이다.)

김학준은 '북한 50년사(1995년)'에서 '북한 점령을 맡은 제25군은 중앙아시아의 감옥에서 풀어내 징집한 죄수 출신 사병들이 많았다. (...) 거지 떼 모양의 소련군은 강도와 강간의 길에 나섰다.

소련군은 아무것이든 빼앗았다. 그들은 특히 시계를 좋아해 평양 거리에는 팔에 시계를 네댓 개씩 차고 다니는 소련 병사들이 수두룩했다. 일본 여자들의 경우에는 대낮에도 강간 당했다.

그래서 상당수의 일본 여자들은 아예 머리카락을 완전히 깎고 얼굴에 숯검댕이를 바른 채 남장을 해야 했다. 마침내는 야밤에 조선 여자들도 당하기 시작했다.' (강준만 저, 위 책, p 54) 

브루스 커밍스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일본인과 한국인들에게 강간과 약탈을 포함한 파괴행위를 저질렀으며 그것은 아주 광범위했다.'고  적었다. (브루스 커밍스, 김자동 옮김, 한국 전쟁의 기원, 1986, p 492, 강준만 지음, 위 책, p 55에서 재인용)

그런데 소련군은 개인적 만행 뿐만 아니라 점령군 차원에서 착취가 심각했다. 소련군은 북한의 주요 물자와 시설을 소련으로 반출해갔다. 북한 전체를 하나의 전리품으로 본 것이다.

동유럽에 진주한 소련군이 그랬듯이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소련은 함흥과 원산, 진남포, 청진 등지의 대규모 공장에서 공작기계와 방직기계, 전동기 등을 가져갔다. 9월에 소련은 평양 고무공장의 기계를, 10월에는 수풍발전소에 있던 10만 kw의 발전기 3대를 뜯어갔다. 이 과정에서 소련군을 저지하려던 발전소 기술자가 소련군의 총에 맞는 사고도 발생했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대한제국 망국사’ 저자 )

쌀도 대량으로 반출했다. 1945년에 244만섬, 1946년에 290만섬을 가져갔다. (안문석 지음, 위 책, p 25-27, 82) 

브루스 커밍스는 '소련 점령하의 첫 몇 주일간 평양시장을 지낸바 있는 한근조에 따르면 소련은 인민위원회에서 비축한 식량의 3분의 2를 징발해 갔다'고 적었다. (강준만, 위 책, p 55)

그 밖에도 소련군은 1945년에 소 15만마리, 말 3만마리, 돼지 5만마리를 반출했고, 1946년에는 소 13만마리, 말 1만마리, 돼지 9만마리를 소련으로 가져갔다. 심지어 소련군은 1946년 1월1일에 철도 시설을 경비하는 부대인 철도 보안대까지 창설했다. (안문석 지음, 위 책, p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