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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

[김세곤의 역사칼럼]해방정국 3년 톺아보기(72)김구, 이승만의 정읍선언을 지지하다

 

[김세곤의 역사칼럼]해방정국 3년 톺아보기(72)

  •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김구, 이승만의 정읍선언을 지지하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이승만의 ‘6.3 정읍선언’에 대하여 가장 신속히 지지의사를 밝힌 건 한민당이었다. 한민당은 “일부에서는 무슨 역적질이나 한 것처럼 선전 하니 그 이유를 알수 없다.”면서 이승만을 옹호하고 나섰다.

뿐만 아니라 한민당은 장덕수를 중심으로 이른바 ‘선거대책 예산’이라고 이름 붙여진 단독정부 수립에 대비한 선거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이 대책은 240명의 한민당 후보자들을 내세워 정국안정을 도모하고, 조직을 강화해 전국 각지의 동과 리에 이르기까지 한국민주당의 조직을 갖추어 공산당의 침투를 저지하는 것을 주요내용으로 삼고 있는데, 이를 위해 선거예산으로 1인당 100만 원씩 총 2억4천만 원을 계산하여 놓았다.(강준만 저, 한국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1권, 인물과사상사, 2004, p 255 )

한편, 이승만과 미군정 사이는 관계가 악화 상태였다. 6월 4일에 하지는 이승만의 고문인 로버트 올리버에게 이승만이 공산주의에 대한 공격을 자제해주길 요청했다. 올리버는 하지 및 군정장관 아처 러치와 가진 그 날의 회동에 대하여 자신의 비망록에 이렇게 기록했다.

“그들은 모두 리 박사가 과대망상으로 거의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실상 하지 장군은 어떤 정신병 의사로 하여금 리 박사와 다소 은밀하게 면담을 가지도록 일을 진행시킨 바도 있다. 그들은 그가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때에는 매우 유쾌하고 좋은 사람이지만 공식회합에서는 아주 난폭한 사람이 되어 소련과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을 비난함으로써 저기들의 직무를 더욱 난처하게 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는 리 박사가 군정에 쓸모있는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하며 자기가 리 박사를 공개적으로 비난함으로써 그를 망신시켜야 할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로버트 올리버, 박일영 옮김, 대한민국 건국의 비화 : 이승만과 한미관계, 계명사, 1990, p 73-74 ; 강준만 저, 한국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1권, p 256에서 재인용)

 

그런데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김구도 1946년 5월경부터 미군정에서 배제되어 가고 있었다. 5월 22일 미 국무부 점령지구 담당 차관보 존 힐드링은 “김구를 지지하는 것이 장기 말을 잘못 쓴 것임을 인정해야 할 때가 왔다”고 말했고, 주한 미영사이자 하지의 정치고문인 윌리엄 랭던은 “우리는 대체로 김구를 무시하고 있는데 김구는 자신의 정치적 실수로 말미암아 정치 무대에서 거의 떨어져 나갔다”고 말했다.(강준만, 위 책, p 254)

그래서였을까? 동병상련이었을까? 김구는 이승만의 정읍 선언에 대하여 성원을 보냈다. 이승만이 정읍 선언을 했을 때 김구는 탈장증으로 용산 성모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김구의 제자인 상공회의소 강익하가 성모병원에 찾아와 300만 원의 수표를 내놓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께서 정치자금으로 쓰시라고 전국 경제인들이 갹출한 돈이니 받으십시오. 이 박사에게는 따로 500만 원을 전달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김구는 거절하면서 “국사를 하는 데 쓰일 돈이라면 나보다도 이 박사에게 드려 외곬으로 쓰이는 것이 나을 걸세. 내가 필요한 것 있으면 이 박사에게 가서 얻어 쓰지.”

 
 
 

리니지2M 5주년

 

강익하는 개인적으로 쓰라고 다시 주어도 김구가 받지 않아 결국 그 돈을 이승만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6월 11일에 독촉국민회 전국대표회의가 정동교회에서 개최되었다.

이승만은 이날 연설에서 ”소련 사람을 내보내고 공산당이 이 땅에 발 못 붙이게 하자“고 역설하면서 ”최고사령부라 할까, 최고의 명령을 내리는 기구를 조직할 터이니 이 명령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였다.

 
 

놀라운 건 김구의 화답이었다. 김구는 이 대회에서 “우리는 죽음으로써 이승만 박사에게 복종하기를 맹세한다.”고 외쳤다.

6월 29일에 이승만은 국민운동 총본부 조직으로 민족통일총본부(민총)의 설치를 발표하였고, 이후 본격적인 단독정부 수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민총의 총재는 이승만, 부총재는 김구였다.

훗날 강원용은 “어떻게 김구가 단독정부 얘기를 들고나온 이승만과 손을 잡았는지는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는데 아닌게 아니라 이승만과 김구의 관계는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너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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