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의 역사칼럼]해방정국 3년 톺아보기(71)
-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이승만의 정읍선언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946년 6월초 한반도는 콜레라의 습격으로 몸살을 앓았다.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 휴회되자, 이승만은 다시 남선 순행을 떠났는데, 이승만은 공산주의를 콜레라에 비유하였다.
“공산주의는 무서운 전염병 콜레라와 같다. 극렬분자들과는 협력은커녕 타협도 불가능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굴복하느냐 저항하느냐이다. 한국의 자유 독립을 달성하려면 신탁통치와 소련 공산주의를 철저히 거부하고 물리치는 길뿐이다.”
6월 3일에 이승만은 전라북도 정읍(井邑)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정읍 발언’을 하였다. 바로 ‘6.3 정읍 선언’이다.
다음은 6월 4일의 ‘서울신문’ 기사이다.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미소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南方)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다. 그리고 민족통일기관(民族統一機關) 설치에 대하여 지금까지 노력하여 왔으나 이번에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 통일기관(統一機關)을 귀경한 후 즉시 설치하게 되었으니 각 지방에 있어서도 중앙의 지시에 순응하여 조직적으로 활동하여 주기 바란다.”
이승만은 6월 4일 전주 공설운동장에 모인 5만 환영인파 앞에서 정읍 연설과 같은 요지의 연설을 했다. 6월 5일 이리(지금의 익산시)에서는 거듭하여 남한 단독정부 수립 주장을 폈다.
「이승만, 이리에서 남한 단정수립에 대해 사견 피력
이리에 도착한 이승만은 5일 하오 6시경 하지 중장과 전화로 연락 요담하였는데 전화가 끝난 후 이 박사는 기자에게 남조선 단독정부수립 운운(云云)에 언급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계속 토의할 희망이 보이지 아니함에 일반 민중이 초조해서 지금은 남조선만이라도 정부가 수립되기를 고대하며 혹은 선동하는 중이다. 나의 관찰로는 조만간 무엇이든지 될 것이니 아직 인내하고 기다려서 경거망동이 없기를 바란다.”」(서울신문 1946년 6월 8일)
6월 6일에 이승만은 군산에서 20여만 명의 환영대회에서 연설하였다. 연설 요지는 이랬다. “공산 극렬분자에 대해서는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손을 잡고 말리기 바란다. 미소회담을 기대하였으나 소련의 고집으로 무기 휴회되었다. 우리는 냉정히 참고 참되 끝이 아니날 때에는 내가 명령을 내릴 터이니, 이때는 죽음으로 독립을 찾아야 한다.”(대동신문1946.6.8.)
이후 이승만은 6월 7일 충남 공주와 8일 충북 청주, 9일 진천(鎭川)과 장호원(長湖院) 까지 강행군을 하고, 9일 밤에 서울 돈암장에 돌아왔다.
한편, 이승만의 정읍 발언에 대하여 좌우를 막론하고 비난이 빗발쳤다. 심지어 조선어학회와 헤이그 특사 이준의 아들 이용도 비난 성명을 발표했다.
6월 8일의 ‘서울신문’을 읽어보자.
「이승만의 남조선 단정설에 대해 이극로와 이용(李鏞) 반대 담화
최근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에 누차 언급한 이승만의 연설을 크게 주목을 집중케 하고 있는데 이에 관련하여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주간(主幹) 이극로(李克魯)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에는 찬성할 수 없다. 적어도 3천만 우리 조선 동포는 3천리 강산을 한 나라 한 덩어리로 여기고 있는 만큼, 단독정부는 단호 반대한다. 일반 정치가들은 좀 늦어지더라도 성의를 보여 통일정권을 수립해 주기 바란다. ... 내 희망으로는 3천 리가 한 나라가 되기만 바랄 뿐이다. 그리고 미소공위(美蘇共委)는 재개되리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우리의 뜻하는 바 문제를 우리의 뜻대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는 꼭 믿을 수 없다.”
아울러 얼마 전 해외에서 돌아온 혁명투사 고(故) 이준의 아들 이용(李鏞)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설은 3상회의(三相會議)를 주요시하지 않는 언동이라고 본다. 2)그것이 일부 민의라 할지라도 지도자로서는 통일을 목표하고 민중을 인도하여야 한다. 3)3천만 동포로서 신탁통치에 찬성을 표시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완전독립은 3국(미·영·소)과 심각한 관련성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합국(聯合國) 의사(意思)를 존중하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일반 대중들의 이승만 지지는 최고조에 달했다.
정병준에 따르면 “이승만이 군산을 방문하기 위해 전북 지경리-군산간 약 8개 마을을 지날 때 모든 마을 주민들이 이승만을 환영하기 위해 길을 덮었고, 이리에서는 8천명의 군중들이 빗속에서 이승만의 도착을 두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지방 순회를 통해 이승만의 개인적 인기는 귀국 이래 최고조에 도달해 있었다.”(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 비평사, 2005, p 559)
(참고문헌)
o 강준만 저, 한국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1권, 인물과사상사, 2004, p 253-255
o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타베이스, 한국현대사료 DB, 자료 대한민국사 제2권 194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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