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의 역사칼럼]해방정국 3년 톺아보기(70)
-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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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4.11.18 12:54
좌우합작 추진(2)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미군정은 김규식 설득도 애를 먹었지만, 여운형 설득도 만만치 않았다. 버치 중위는 여운형을 민전 및 조공과 분리시키려고 애를 썼지만, 여운형은 한사코 거부했다. 이러자 버치는 여운형의 조선인민당에 타격을 입히는 공작을 추진하여, 5월 11일에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을 비롯한 94명의 간부를 조선인민당(朝鮮人民黨)에서 탈당시키고 자금을 지원하여 사회민주당(社會民主黨)을 창당케 했다.
5월 22일에 여운홍, 최근우 등 104명이 모여 사회민주당을 결성했고, 8월 3일 중앙대표 73명, 지방대표 22명이 모여 발당식을 개최하였다.
사회민주당은 폭력혁명론을 주장하는 극단파와는 달리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표방하였다. 당의 강령은 ①완전독립과 민주주의국가 건설 ②계획경제확립과 균등생활 ③민족문화의 함양 등인데, 이는 여운형이 이끌던 조선인민당의 노선과 내용적으로는 거의 같았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이렇게 적었다.
“여운홍과 사회민주당의 기교가 여운형을 난처하게 만들기는 했으나 여운형을 민전과 조공과 완전히 결별시키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버치는 공산주의자들이 여운형의 약점을 잡아 그를 협박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 그 약점이란 아마도 여운형이 전쟁 중 여러 차례에 걸쳐 일본을 방문한 데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리하여 일본 정부 기록을 조사하고 과거 한국에 있었던 일본인 관리들을 심문하고자 미국관리들이 일본으로 파견되었다. 그 결과 여운형은 사냥개 이빨만큼이나 깨끗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결국 여운형은 민전과 조공과 결별하지 않은 채 좌우합작에 참여하게 되었다.(강준만 저, 한국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1권, 인물과사상사, 2004, p 250-251)
(한편 서중석은 하지 장군의 합작 권유에 김규식은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여운형은 흔쾌히 응했다고 적었다. - 서중석,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2021년, p 72)
1946년 5월 25일 신당동에 있는 버치 중위의 집에서 좌우합작 첫 회의가 열렸다. 우익 측은 김규식과 원세훈, 좌익 측은 여운형, 황진남이었고, 미국 측은 버치 중위와 선교사이며 배제학교 교장인 아펜젤러가 참석했다. 5월 30일에는 버치 자택에서 원세훈과 민전 의장단인 허헌의 2차 회합이 열렸다.
두 차례의 예비 접촉 후 10일 후인 6월 11일에 여운형은 ‘진정한 통일정부는 좌우합작에서 수립될’ 것이라는 공식 성명을 발표하였다. 6월 14일에는 제3차 예비회담이 버치의 집에서 김규식, 원세훈, 여운형, 허헌의 4자회담으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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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6월 29일에 러치는 하지에게 입법기관의 설치를 제안하였고, 다음 날 하지 중장은 김규식과 여운형의 좌우합작을 적극 지지한다는 특별성명을 발표하였다.
한편, 미군정은 좌우합작을 위한 경비를 지원하였다. 하춘식 명의로 된 조선은행 통장에 600만원이 입금되었는데, 하춘식이라는 이름은 하지의 ‘하’, 춘곡 원세훈의 ‘춘’, 김규식의 ‘식’을 따서 합성한 가명이었다. 이 돈은 중도우파 김규식이 관리하면서 좌우합작비용으로 사용되었다.
김규식(1881년생)과 여운형(1885년생)은 서로 ‘형님’, ‘아우’ 하면서 오래전부터 독립운동을 한 막역한 사이여서, 초기에 좌우합작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았다. 우익은 7월 7일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의원의 연석회의를 통해 김규식·원세훈·김붕준·안재홍·최동오 등 5명의 대표를 선발했다. 좌익은 7월 12일 여운형·허헌·김원봉·정노식·이강국 등 5명의 대표를 선발했다.
좌우합작위원회의 정식회담은 7월 25일에 시작되었으며,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를 목표로 하는 정치적 연합이라는 틀로 갖추어졌다.
그러나 좌우합작의 세력은 약했거니와 권모술수에도 능하지 못해 이후 좌우 양쪽으로부터 격렬한 공격을 받아 비틀거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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