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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 김일손

무오사화와 김일손: 4회– 연산군, 김일손을 창덕궁 희정당에서 친국하다. 5회 연산군, 김일손을 친국하다.

무오사화와 김일손: 4연산군, 김일손을 창덕궁 희정당에서 친국하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498711일에 이극돈 등이 올린 김일손의 사초(史草) 6조목을 읽은 연산군은 분노했다. 세조(연산군의 증조부)의 궁금비사(宮禁秘事)등을 사초에 적었기 때문이었다.

 

712일에 연산군은 "별감(別監) 세 사람에게 상등(上等)의 말을 주어서 세 곳으로 나누어 보내어 기다리다가, 잡아오는 사람이 바라보이거든 차례차례로 달려와 아뢰도록 하라."고 전교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7121번째 기사)

 

겸사복장(兼司僕將)에게 명해서 겸사복(兼司僕 왕의 신변 보호와 왕궁 호위를 맡은 친위대)등을 거느리고 건양문(建陽門) 밖으로 나가, 연영문(延英門) 빈청(賓廳) 등처를 에워싸고 파수를 보면서 사람의 출입을 금지하도록 하라.”고 전교했다. (연산군일기 14987122번째 기사)

 

건양문(建陽門)은 창덕궁의 동남쪽 모서리에 있었던 창경궁으로 통하는 문이다. 지금의 검표소 근처이다. 연영문(延英門)은 승정원(承政院)의 남문(南門)인데 지금은 없어지고 주변이 소나무로 덮혀있다.

 

이윽고 의금부 낭청(郞廳) 홍사호가 김일손을 끌고 들어오자, 연산군은 의금부에 명하여 허반(許磐)을 잡아오게 하였다. 이 때에 김일손은 1496년 윤 3월에 모친상을 당하여 경상도 청도군에 있었는데 상복을 벗자 풍병이 나서 함양군 청계정사에서 요양중이었다.

 

김일손은 잡혀오면서 사초 때문임을 직감했다. 그는 홍사호에게 처음 체포될 적에 이는 필시 성종실록에 대한 일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홍사호등이 어째서 그렇다고 생각하느냐?” 고 묻자, 김일손은 나의 사초(史草), 이극돈이 세조 조에 불경(佛經)을 잘 외운 것으로 벼슬을 얻어 전라도 관찰사가 된 것과,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의 상()을 당하여 장흥(長興)의 관기(官妓) 등을 가까이한 일을 기록하였는데, 듣건대, 이극돈이 이 조항을 삭제하려다가 오히려 감히 못했다고 한다. 실록이 빨리 편찬되지 못하는 것도 필시 내가 임금에 관계되는 일을 많이 기록해서라고 핑계대고 비어(飛語)를 날조하여 임금에게 아뢰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니, 지금 내가 잡혀가는 것이 과연 사초(史草)에서 일어났다면 반드시 큰 옥()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연산군일기 7124번째 기사)

 

연산군이 수문당(修文堂 희정당의 옛 이름) 앞문에 납시니, 윤필상·노사신·한치형·유자광·신수근과 사관인 주서(注書) 이희순이 입시하였다.

 

연산군은 김일손을 좌전(座前)으로 나오게 하고 친국하였다.

 

연산군 : "네가 성종실록에 세조조(世祖朝)의 일을 기록했다는데, 바른대로 말하라."

 

김일손 : "신이 어찌 감히 숨기오리까. 신이 듣자오니 권귀인(權貴人)은 바로 덕종(德宗)의 후궁(後宮)이온데, 세조께서 일찍이 부르셨는데도 권씨가 분부를 받들지 아니했다.’ 하옵기로, 신은 이 사실을 썼습니다."

 

연산군의 맨 처음 친국은 연산군의 증조부 세조(14171468 재위 1455-1468)에 관한 일이었다. 김일손은 연산군이 세조조(世祖朝)의 일이라고 물었는데도 금방 알아차리고 세조와 권귀인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아뢰었다.

 

권귀인(1)은 세조의 큰 아들 의경세자(14371457)의 후궁이다. 의경세자는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보위에 오르지 못하고 145792일에 별세했다. 나이 20세였다.

 

이러자 의경세자의 동생 예종(재위 1468-1469)이 세조의 뒤를 이어 19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예종 역시 보위에 오른 지 12개월 만에 죽었다. 이러자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자산군이 13세에 임금이 되었다. 바로 성종(14571494, 재위 1469-1494)이다. 성종은 즉위 후 아버지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추존하였다.

 

그런데 김일손은 세조가 며느리인 권귀인을 일찍이 부르셨는데도 권씨가 분부를 받들지 아니했다.’고 사초에 쓴 것이다. 이 일은 왕실에서 가장 숨기고 싶은 세조(시아버지)와 권귀인(며느리)간의 모종의 이야기였다.

즉 궁금비사(宮禁秘事)였다.

 

무오사화와 김일손 : 5연산군, 김일손을 친국하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498712일에 연산군은 세조(연산군의 증조부)와 덕종(세조의 장남이자 성종의 부친인 의경세자)의 후궁 권귀인과의 궁금비사(宮禁秘事)에 대하여 친국하였다.

 

연산군 : "어떤 사람에게 들었느냐?"

 

김일손 : " 전해 들은 일은 사관(史官)이 모두 기록하게 되었기 때문에 신 역시 쓴 것입니다. 그 들은 곳을 하문하심은 부당한 듯하옵니다."

 

연산군 : " 실록은 마땅히 직필(直筆)이라야 하는데, 어찌 망령되게 헛된 사실을 쓴단 말이냐. 들은 곳을 어서 바른대로 말하라."

 

김일손 : "사관이 들은 곳을 만약 꼭 물으신다면 아마도 실록이 폐하게 될 것입니다.”

 

연산군 : "그 쓴 것도 반드시 사정이 있을 것이고 소문 역시 들은 곳이 꼭 있을 것이니, 어서 빨리 말하라.”

 

김일손 : "옛 역사에 이에 앞서[先是]라는 말도 있고, 처음에[]’라는 말이 있으므로, 신이 또한 감히 선조(先朝)의 일을 쓴 것이오면, 그 들은 곳은 바로 귀인(貴人)의 조카 허반(許磐)이옵니다."

 

김일손은 버티고 버티다가 권귀인의 조카 허반으로부터 권귀인의 일을 들었다고 실토했다.

 

연산군 : "네가 출신(出身)한 지도 오래되지 않았는데, 세조의 일을 성종실록에 쓰려는 의도는 무엇이냐?“

 

세조와 권귀인의 일은 의경세자가 145792일에 별세 후 상을 치른 뒤에 일어난 일이다. 1458년에 일어난 일이니 김일손(14641498)6세 때 일어난 일이다. 이랬으니 연산군은 김일손에게 이 일을 사초에 쓴 의도를 물었던 것이다.

 

김일손 : "전해들은 일을 좌구명(左丘明)이 모두 썼으므로 신도 또한 썼습니다."

 

좌구명은 공자가 편찬했다는 노나라(BC 722-477)의 역사 춘추(春秋)를 상세하게 해설한 책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저자이다.

 

좌구명은 춘추의 간략한 사실에 추가하여 사건 전후의 배경, 야사(野史)까지도 자세히 적었다. 김일손은 이런 좌구명의 역사서술 방식을 본따서 세조의 시대도 적었다고 진술했다.

 

이러자 연산군은 권귀인에 대하여 계속 다그쳤다.

 

연산군 : "그 권씨의 일을 쓸 적에 반드시 함께 의논한 사람이 있을 것이니, 말하라."

 

김일손 : "국가에서 사관(史官)을 설치한 것은 사()의 일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므로, 신이 직무에 이바지하고자 감히 쓴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이같이 중한 일을 어찌 감히 사람들과 의논하겠습니까. 신은 이미 본심을 다 털어 놓았으니, 신은 청컨대 혼자 죽겠습니다.”

 

이어서 연산군은 소훈윤씨(昭訓尹氏)에 대하여 물었다.

 

연산군 : "네가 또 덕종의 소훈윤씨 사실을 썼다는데, 그것은 어디에서 들었느냐?"

 

김일손 : 이것 역시 허반에게서 들었습니다."

 

소훈 윤씨는 덕종의 후궁이었다. 그런데 권귀인이 세조의 부름을 받아 대내(大內 임금의 거처)에 들어갔을 적에 시종하던 계집 종 신월(新月)이가 소훈 윤씨의 일을 귀에다 대고 소곤거렸다. 덕종의 상을 마친 후 세조는 소훈 윤씨에게 토지와 노비와 집 등을 하사했는데, 일반적으로 내리는 시혜보다 갑절이나 더했고, 대소의 거둥에는 반드시 어가(御駕)를 수행하게 하였다는 소문이었다. (연산군일기 14987151번째 기사)

 

이는 시아버지 세조와 며느리 소훈 윤씨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연산군 :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어느 사람과 함께 들었느냐?"

 

김일손 : "들은 월일이나 장소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중한 일을 어찌 감히 잡인(雜人)과 더불어 말했겠습니까. 신이 참으로 혼자 들었습니다.“

 

연산군 : "허반이 두 가지 일을 모두 한때에 말했느냐?"

김일손 : "그러하옵니다.“

 

연산군 : "이러한 중대사를 어찌 잊을 리 있겠느냐. 네가 들은 곳이라든가, 어느 날 어느 달에 함께 들은 사람은 누구인지 모두 말하라."

 

김일손 : "어느 날, 어느 달과 들은 곳에 대해서는 신이 실로 잊었습니다. 신이 이미 큰일을 말씀드렸사온데, 어찌 감히 이것만을 거짓말하오리까. 허반이 혹은 신의 집에서 자기도 했고 신도 또한 허반의 집에서 잤사온데, 함께 유숙할 때에 허반이 말하였으므로 신이 실로 혼자서 들었습니다.” (연산군일기 14987122번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