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와 김일손
- 3회 : 연산군, 김일손이 쓴 사초를 들이라고 전교하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7월 11일에 연산군은 “김일손의 사초(史草)를 모두 대내(大內 임금이 거처하는 곳)로 들여오라.”고 전교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1일)
7월 11일과 7월 1일의 『연산군일기』를 연관시키면 7월 1일에 유자광 등이 연산군에게 아뢴 것은 『성종실록』 편찬 관련 김일손의 사초(史草) 내용이었다.
1494년 12월 24일에 호학군주 성종(1457∼1494)이 37세의 나이로 붕어했다. 4개월 후인 1495년 4월 19일에 연산군은 어세겸·이극돈 등에게 『성종실록』 편찬을 명했다. 곧바로 춘추관 내에 실록 편찬을 위해 임시 관청인 ‘실록청’이 설치되었다.
그런데 실록청 당상 이극돈(1435∼1503)은 사초를 열람하면서 자신의 비행이 사관 김일손에 의해 기록된 사실을 알았다. 이극돈의 비행은 세조 때 불경을 잘 외운 덕으로 전라도 관찰사가 된 것과, 전라도 관찰사 시절에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貞熹王后 1418∼1483)가 상(喪)을 당했는데, 이극돈은 장흥의 관기(官妓)와 더불어 술자리를 벌였다는 사실이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2일)
이극돈은 광주 이씨(廣州 李氏)로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의 아들로서, 이극돈의 형제 5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한 당대 최고의 명문 집안이었다. 이극배는 영의정을 지냈고, 이극감은 형조판서, 이극증은 판중추부사, 이극돈은 좌찬성, 이극균은 좌의정을 지냈다.
한편 이극돈은 자신의 비행이 『성종실록』에 싣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몰리자, 김일손이 사초에 실은 세조 때의 궁금비사(宮禁秘事 외부에 알려서는 안 되는 궁궐의 비밀스런 일)를 사초를 유출하여 유자광에게 알렸다.
이는 이극돈의 졸기(연산군일기 1503년 2월 27일)에 기록되어 있다.
“일찍이 『성종실록』을 수찬(修撰)하면서 김일손이 자기의 악행(惡行)을 쓴 것을 보고 깊이 원망을 품고 있다가 선왕(先王 세조)의 일에 결부해서 유자광을 사주(使嗾)하여 이를 고발하게 했다. 이로 인하여 사류(士類)를 죽이고 귀양 보내기를 매우 혹독하게 했다. 그리하여 그때 사람들이 무오사화에는 이극돈이 수악(首惡)이라고 말했다.”
한편 연산군이 “김일손의 사초(史草)를 모두 대내(大內)로 들여오라.”고 전교하자, 실록청 당상(實錄廳 堂上) 이극돈·유순·윤효손·안침이 함께 아뢰기를 "옛날부터 사초는 임금이 스스로 보지 않습니다. 임금이 만약 사초를 보면 후세에 직필(直筆)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1일)
사초(史草)란 실록 편찬을 담당하는 춘추관의 사관(史官)들이 왕의 언행 하나하나를 기록한 시정기(時政記)다. 시정기는 임금의 일상부터 신하들과 국정 현안을 논의하는 과정, 인물에 대한 비평도 들어있는 실록의 원천자료이다.
그런데 임금을 비롯한 집권 세력은 자신들 악행이 실록에 그대로 실려 후세에 전해지는 걸 극도로 꺼렸다. 이러함에도 조선시대 초에는 사초를 빌미삼아 탄압을 가한 적은 없었고, 심지어 선대왕의 실록도 보지 못했다. 조선 최고의 성군인 세종 임금도 『태종실록』을 보려했으나 편찬에 참여한 황희 등 신하들이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세종실록 1438년 3월 2일)
실록청 당상관들은 “예로부터 사초(史草)는 임금이 스스로 보지 않습니다. 임금이 만약 사초를 보면 후세에 직필(直筆)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직필(直筆)! 이는 사실(史實)을 바르게 쓰는 일인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올바르게 기록하는 것이 사관의 길이었다. 사실을 왜곡하면서 권력에 아부하는 곡필(曲筆)은 중국 춘추전국시대부터 지탄의 대상이었다. 직필은 달리 말하면 춘추필법(春秋筆法)이기도 하다. 공자는 『춘추(春秋)』라는 노나라의 역사책을 저술하면서 객관적이고도 엄정한 비판의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이윽고 연산군은 김일손의 사초를 즉시 빠짐없이 들이라고 재촉했다.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이극돈 등이 다시 연산군에게 아뢰었다.
"여러 사관들이 드린 사초를 신 등이 보지 않는 것이 없고, 김일손의 초한 것 역시 모두 알고 있사옵니다. 신 등이 나이가 이미 늙었으므로 벼슬한 이후의 조종조(祖宗朝) 일은 알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김일손의 사초가 과연 조종조의 일에 범하여 그른 점이 있다는 것은 신들도 들어 아는 바이므로, 신들이 망령되게 여겨 감히 『실록』에 싣지 않았는데, 지금 들이라고 명령하시니 신 등은 무슨 일을 상고하려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옛날부터 임금은 스스로 사초를 보지 못하지만, 일이 만일 종묘사직에 관계가 있으면 상고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신 등이 그 상고할 만한 곳을 절취하여 올리겠습니다. 그러면 일을 고열(考閱)할 수 있고 또한 임금은 사초를 보지 않는다는 의(義)에도 합당합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1일)
김일손의 사초 전체를 안 올리고, 부분만을 절취해 올리겠다는 이극돈의 입장은 그의 비행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묘책이기도 했다.
연산군은 ‘가하다.’고 전교를 내렸다. 이극돈 등은 김일손의 사초에서 6조목을 절취하여 봉해 올렸다. 이어서 연산군은 “그 종실(宗室) 등에 관해서 쓴 것도 또한 들이라.”고 전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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