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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

조선망국사 (7)

조선망국사 (7)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

 

 

19051117일 오후 4시경 시작된 어전회의는 7시 넘어서 끝났다. 잠시 후 하야시 공사가 참정대신(총리) 한규설에게 어전회의 결과를 물었다.

 

한규설은 폐하께서는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뜻으로 지시하셨으나, 우리 8인은 모두 반대하는 뜻으로 거듭 말하였습니다.’라고 태연히 대답했다. 중대한 협상을 앞두고 협상전략을 상대방에게 완전히 노출한 것이다.

 

이러자 하야시가 질책하고 나섰다.

 

폐하가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하교가 있었다면 조약을 순조롭게 진행하여야지, 대신들이 모두 폐하의 명을 어기니 어찌 된 일입니까? 이런 대신들은 조정에 두어서는 안 되며 특히 참정대신과 외부대신은 그만두게 해야 하겠습니다.”

 

한규설은 몸을 일으키며 공사가 이렇게 말하니 나는 참석할 수 없다고 대꾸했다.

 

이윽고 대신들이 만류하자 한규설은 다시 자리에 앉았고, 당황한 하야시는 이토 히로부미에게 긴급 연락하였다.

 

오후 8시쯤에 이토가 조선 주둔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와 일본군 헌병 사령관 등을 거느리고 황급히 수옥헌(지금의 중명전)으로 들어왔다. 수옥헌 안팎은 중무장한 일본군이 이중 삼중으로 겹겹이 포위하여 공포 분위기였다.

 

하야시 공사로부터 사태를 파악한 이토는 고종의 알현을 여러 번 요청하였다. 하지만 궁내부대신 이재극은 ()이 이미 대신들에게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 하였고, 지금 목구멍에 탈이 생겨 접견할 수 없으니 모쪼록 대신들이 잘 협상하라.”는 성지(聖旨)를 전달하였다.

 

그런데 대신들이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고종의 어명은 결국 독약이 되고 말았다.

 

고종의 어명을 접한 이토는 곧 참정대신 한규설에게 토의하자고 요청했고 회의를 직접 주재했다.

 

이토는 먼저 참정대신에게 말했다.

 

참정대신은 어전에서 무엇이라고 아뢰었습니까.”

 

한규설은 반대였다고 말했다.

 

다음에 이토는 외부 대신에게 물었다.

 

박제순이 대답하였다.

 

외부대신의 직임을 맡고 있으면서 외교권이 넘어가는 것을 찬성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토는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폐하의 명령이 있었으니 어찌 칙령이 아니겠습니까? 외부대신은 찬성하는 편입니다.”

 

다음엔 민영기에게 묻자 민영기는 절대 반대라고 답했다.

 

이어서 법무대신 이하영에게 물었다.

 

이하영 : 우리나라가 외교를 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귀국이 이처럼 요구하는 것이니 이는 바로 우리나라가 받아들여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미 지난해에 이루어진 의정서와 협정서가 있는데 또 외교권을 넘기라고 합니까? 이는 중대한 문제이니 승낙할 수 없습니다.

 

이토 : 그렇지만 이미 대세와 형편을 안다고 하니, 이 또한 찬성입니다.

 

이어서 이토는 이완용에게 물었다.

 

이완용은 말했다.

 

이번 일본의 요구는 대세 상 부득이한 것이다. 종전에 우리 외교의 변화가 심했던 탓으로 일본은 두 차례나 큰 전쟁을 치렀다. 일본은 더 이상 동양 평화를 위태롭게 할 수 없어 이번 요구를 제기한 것이다. 일본은 이번에는 반드시 목적을 관철하려고 할 것이다.

국력이 약한 우리가 일본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을진대 원만히 타협하여 일본의 제의를 수용하고 우리의 요구도 제기하여 관철하는 것이 좋다. 자구(字句) 등은 다소 수정할 여지가 있는 것 같다.”

 

이완용은 대신들의 결의를 한순간에 뒤집고, 적극 찬성으로 돌아선 것이다.

 

이러자 이토는 벌떡 일어나면서 조약 중에 고칠 만한 곳은 고치면 되니, 과연 당신은 완전 찬성이요.”라고 크게 만족했다. 이토의 마음에 든 것이다.

 

이어서 권중현, 이근택, 이지용이 모두 찬성하였다. 대세가 확 바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