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망국사 (8)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
1905년 11월 17일 늦은 밤, 이토 히로부미는 대신들과의 찬반 문답이 끝나자 궁내부 대신 이재극을 불러 말했다.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폐하의 지시를 받아 각 대신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찬성은 6인, 반대는 2인으로 가결이 되었으니 주무 대신에게 지시를 내리시어 속히 조인(調印)하도록 주청해 달라.”
이토가 가결을 선언하자, 참정대신 한규설은 의자에 앉아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이토는 제지하며 “어찌 울려고 하느냐”고 짜증을 냈다.
이후 한규설과 박제순은 입을 다물고 자리에 앉아 있었고, 민영기, 이지용, 권중현, 이완용, 이근택, 이하영은 조약 문안을 수정하는 문제로 설왕설래하는 바람에 회의장은 다소 어수선해졌다.
이때 한규설이 밖으로 나갔다. 그는 예식관 고희경을 시켜 고종의 알현을 요청하고, 대청 뒤 작은 방으로 들어가 다시 이재극에게 알현을 청했다. 이 때 고희경이 일본 공사관 통역 시오가와가 참정대신을 만나고 싶다고 전했다. 한규설이 앞뜰로 나가니 시오가와와 일본 헌병들이 한규설을 작은 방에 감금하여 버렸다.
한참 있다가 한규설이 회의실로 다시 들어왔다. 한규설은 갑자기 통곡하자 회의는 잠시 중단되었다. 이때 이토는 “너무 떼를 쓰는 모양을 하면 죽이겠다.”며 모두 들으라는 듯이 엄포를 놓았다.
대신들은 겁에 질렸고 이후 조약 수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문안 수정이 끝나자 이토는 “참정대신이 반대하여도 다른 대신들은 수정안에 모두 찬성하였으니 안건은 결정되었다.”고 말했다.
이어서 이토는 일본 공사관 통역 마에마 교사쿠와 외부 보좌원 누마노 등과 일본군인 수십 명으로 하여금 외부(外部)로 달려가서 외부대신의 직인을 탈취하게 하여, 박제순과 하야시가 나란히 조약에 날인했다.
조인 시간은 11월 18일 토요일 오전 1시경이었다.
그런데 외부협판 (차관) 윤치호의 11월 18일 일기에는 외부의 직인은 일본이 탈취한 것이 아니라 외부대신 박제순의 지시로 직원이 수옥헌(중명전)에 가져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8일, 제대로 잠들 수 없는 밤을 보낸 뒤 조선 독립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러 일찍 외부로 나갔다.
외부에서 숙직했던 신주사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젯밤 10시가 조금 지나 전화가 울렸습니다. 전화를 받자 외부대신 박제순이 인궤(印櫃)를 보내라고 말했습니다. 이윽고 일본 공사의 통역관 마에마 씨가 궁에서 와서 인궤를 달라고 재촉했습니다.
조금 있다가 외부 교섭국장 이시영 씨가 와서 외부대신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대신은 다 잘 되었으니 인궤를 보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인궤를 보낼 수밖에 없었고, 내가 인궤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 내각 회의실에는 박 대신과 하야시는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습니다. 조약서가 그 탁자 위에 있었고, 인궤를 박 대신에게 건네주자마자 날인 되었습니다.”
이렇게 을사 5조약이 체결되었다. 일본의 조약안은 당초에 4개 조항이었는데 조선의 요구에 의거 ‘일본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함을 보증한다.’는 조항이 신설되었다. 나라는 망해도 황실만 온전하면 된단 말인가?
한편 조약 체결후 고종이 맨 먼저 한 일은 참정대신(총리) 한규설 파면이었다.
“참정대신 한규설은 황제의 지척에서 행동이 온당치 못하였으니 벼슬을 면직시키라.” (고종실록 1905년 11월 17일)
11월 18일에 법부대신 이하영과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 조약을 막지 못한 일로 사직을 청했다. 하지만 고종은 사직을 반려했다.
이것이 고종의 이중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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