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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

해방정국 3년 (12)- 모스크바 삼상 회의와 신탁통치 반대

해방정국 3(12)

- 모스크바 삼상 회의와 신탁통치 반대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9451216일부터 1228일까지 미국 영국 소련 3개국 외상이 모스크바에서 2차대전 이후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 회담에서는 북중국 주둔 일본의 무장해제, 루마니아·불가리아 문제, 핵에너지 문제를 위한 유엔위원회에 관한 제안, 해방 이후 한반도 문제 등 6개 의제가 논의되었다.

 

그런데 미국은 이전의 정책에 따라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안을 제출했고, 소련은 임시정부 수립을 골자로 한 수정안을 제출했다. 즉 소련은 한국의 정당사회단체와 협의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한 후 이 기구를 통하여 미4개국이 신탁 통치한다는 내용이었다.

 

1227일에 3국 외상은 소련안에 미국안을 절충하여 (1) 한국을 독립 국가로 재건하고 또한 민주적 원칙에 바탕을 둔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여건의 마련을 위하여 조속히 임시조선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할 것

(2) 그러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열 것 (3) 최고 5년 기한으로 미4국의 신탁통치를 실시하되, 그 방안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조선임시정부와 협의할 것 (4) 남북 현안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2주일 내로 미소공동위원회를 열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결정에 합의하였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내용이 공식 발표된 것은 1228일 정오(서울시간으로는 28일 오후 6)였고, 그 내용은 모스크바 27AP합동’ ‘워싱턴 28일발 AP합동으로 보도되었다.

 

그런데 동아일보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하루 전인 1227일자 머릿기사에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를 예측했다.

< 소련은 신탁 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 >

 

[워싱턴 25일발 합동 지급보(至急報)]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3국 외상 회담을 계기로 조선 독립 문제가 표면화하지 않는가 하는 관측이 농후해지고 있다. 즉 번즈 미 국무장관은 출발 당시에 소련이 신탁통치안에 반대하여 즉시 독립을 주장하도록 훈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3국간에 어떠한 협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불명하나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 선언에 의하여 조선은 국민투표로써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한 점에 있는데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일국 신탁통치를 주장하여 38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1, p 146)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이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는 동아일보 보도는 완전히 거꾸로 된 오보였다.

 

하지만 동아일보는 1228일에 <소련의 신탁통치 주장과 각 방면의 반대 봉화>라는 제목 아래 임시정부 측, 한민당, 국민당의 신탁 결사반대의 의견을 게재했다. 또 이 날의 사설은 신탁 통치는 민족적 모독이라고 규정하면서 전국적인 반탁 운동을 촉구했다.

 

조선일보도 1227일자 사설 <신탁통치설을 배격함>에서 신탁보다 차라리 우리에게 죽음을 주는 것이 나을 것이다라고 했고, 1228일에는 <죽음으로 신탁통치에 항거하자>는 제목의 호소문을 호외로 발행하였다.

 

이처럼 신문 보도는 반탁 운동을 자극하여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었다. 이러자 남한사회는 말 그대로 벌집을 쑤셔 놓은 듯 들썩였고 국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1228일에는 좌익과 우익 공동으로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구성되어 신탁통치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피로써 건립한 독립국과 정부가 이미 존재해 있음을 다시 한번 선언한다. 5천 년의 주권과 3천만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정치활동을 옹호하고, 외래의 신탁통치 세력을 배제하는 데 있다. 우리들의 혁혁한 혁명을 완수하려면 민족이 일치로써 최후까지 분투할 뿐이다. 일어나자 동포여!”

 

1228일 밤에 임시정부 요인들은 경교장에서 김구 주석을 중심으로 철야 긴급국무회의를 열어 반탁을 결정했다.

1229일에는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도 반탁 담화를 발표했다. (서울신문, 19451229일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