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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

해방정국 3년 (13)- 경교장 밤샘 회의와 송진우 암살

해방정국 3(13)

- 경교장 밤샘 회의와 송진우 암살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모스크바 삼상 회의에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면서 정치권도 들끓었다. 19451228일 밤에 경교장에서 좌우를 망라한 각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긴급회의가 열렸다.

 

회의에 참석했던 강원용은 이 날의 분위기를 이렇게 묘사했다.

 

당시 경교장 회의의 열기는 참으로 대단했다. 참석자들은 좌익과

우익, 중도파를 가릴 것 없이 신탁통치 반대를 외치며 고함을 지르고 일어서서 주먹질을 하는 등 울분으로 북받쳐 있었다. 김구 선생도 우리가 왜 서양 사람 구두를 신느냐. 전부 짚신을 신고 다니자. 양복도 벗어버리자.’고 소리를 높이는 판이었다

 

경교장 심야 회의에서 김구는 눈물을 흘리면서 목멘 소리로 "우리 민족은 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신탁통치만은 받을 수 없으며 우리들은 피를 흘려서라도 자주독립 정부를 우리들 손으로 세워야 한다" 고 절규하였다. 김구는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자는 매국노라고 규정하였다.

 

그런데 한국민주당 수석 총무이자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는 신중하게 대처하자면서 임시정부가 통치권을 주장하면 미군정과의 충돌이 불가피 하다고 하면서 현실적인 대안 마련을 주문했다. 이러자 좌중은 놀랐고, 송진우를 비난하는 발언들도 나왔다.

 

밤이 새도록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 후에 임시정부가 주권을 행사하여 미군정에서 일하고 있는 모든 공무원이 군정을 거부하고 임정의 명령에 따르도록 하고, 상인들도 모두 출시해 반탁운동을 벌이자는 의견이 대세로 자리잡았다.

 

이 때 송진우가 다시 냉정을 촉구하는 발언을 했다.

 

여러분의 그런 생각이 모두 애국심에서 나온 것이란 걸 나도 알고 있지만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들로서 우리가 경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누구라도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정된 의정서의 원본을 제대로 읽어본 분이 계십니까? 내가 알기로는 그 의정서의 내용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 후 한국의 정당·사회단체들과 협의해서 남북을 통일한 임시정부를 세우고 5년 이내의 신탁통치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내가 알고 있는 게 정확하다면, 길어야 5년이면 통일된 우리의 독립정부를 세울 수 있는 것을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으로까지 반대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우리가 우리 힘으로 정부를 세운다고 해도 현재 이렇게 분할통치되고 있는 상황이고 강대국 간의 전후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가 그들의 합의 없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신탁통치가 길어야 5년이라고 하니 실제로는 3년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러니 그것을 그렇게 거국적으로 반대할 이유가 뭐 있습니까? 물론 나도 신탁통치는 반대합니다. 그러나 반대 방법은 다시 한번 여유를 가지고 냉정히 생각해 봅시다.”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 1, 인물과 사상사, 2004, p 151-152 ; 강원용. 빈 들에서 : 나의 삶, 한국 현대사의 소용돌이 1 선구자의 땅에서 해방의 혼돈까지, 열린 문화, 1993, p 183-186에서 재인용)

 

이처럼 송진우는 거국적으로 반탁을 부르짖게 하면서도 미군정과 충돌은 피해야 한다는 현실적이고 온건한 입장이었다.

 

한편 밤새 회의를 마친 송진우는 1229일 이른 새벽에 곧장 한민당 당사로 출근했다. 그리고 평소처럼 일을 마친 송진우는 밤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1230일 새벽 615분에 송진우(18901945)가 원서동 자택에서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암살범은 20대 후반의 한현우, 유근배 등 6명이었고, 탄환 13발 중 6발이 명중했다. 이는 남한 최초의 정치암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