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정국 3년 (14)
- 임시정부의 반탁운동 주도와 체면 손상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945년 12월 28일 밤에 경교장에서 열린 신탁통치 관련 회의는 29일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김구 주석은 반탁운동을 선두에서 주도했다.
12월 30일에 김구는 기자회견에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민족을 통일하자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김구는 신탁통치를 강대국에 의한 사실상의 식민지 상태로 파악했다. 이는 임시정부는 반탁운동을 제2의 독립투쟁, 제2의 3.1운동으로 보고 필사적으로 나서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였다.
이 날 임시정부는 김구 주석 명의로 신탁통치 절대 반대 전문을 미·영·중·소 4대국 앞으로 발송하였고, 내무부장 신익희 명의로 ‘임시정부 포고 제1호, 제2호’를 발표하였다.
포고 1호는 “현재 전국 군정청 소속 경찰과 한인 직원은 전부 본 임시 정부의 지휘에 예속케 함”라고 하여 스스로 정부를 자임하고 나섰다. 또한 “탁지 반대의 시위운동은 계통적 질서적으로 행할 것, 폭력행위와 파괴행위는 절대 금지한다”고 포고하였다.
포고 제2호는 “이 운동은 반드시 우리의 최후 승리를 취득할 때 까지 계속함을 요하며 일반 국민은 금후 우리 정부 지도하에 제반 산업을 부흥하기를 요망한다”고 포고하였다.
이 포고는 국민에 대한 국가의 명령 성격을 가진 ‘국자(國字)’로 불리었는데, 이는 국내 행정과 치안, 산업과 경제를 전담하겠다는 의사를 명백히 표시한 것으로서, ‘임시정부의 주권 선언이자 미군정에 대한 쿠데타’였다.
포고문이 나가자 서울 시내 10명의 경찰서장 중 7명이 경교장을 방문하여 충성을 맹세할 정도로 미군정의 한국인 관리들은 크게 호응하였다.
12월 30일에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결성되었고, 12월 31일 오후 1시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주관으로 서울운동장에서 대규모 반탁대회가 열렸다. 신문들은 영하 20도의 강추위를 무릎쓰고 애국 일념에 불타는 30만 명의 시민이 운집했다고 보도했다. 당시 서울 인구가 120만이었으니 서울 시민의 1/4이 모인 것이다.
시위군중은 신탁통치에 대한 항의 표시로 사흘째 철시(撤市) 상태인 시내 중심가를 행진한 끝에 서울운동장에 집결했다.
이 대회는 임시정부 절대지지, 신탁통치 결사반대, 완전 자주 · 독립 쟁취등을 결의하였고, 임시정부는 반탁운동을 임시정부의 정권 장악으로 연결시키고자 하였다.
12월 31일에 반탁운동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날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는 전국 총파업을 결의하였고, 대중적인 시위가 계속되었다.
그런데 반탁의 열기는 뜨거웠지만, 임정의 쿠데타 시도는 무모한 것이었다. 미군정은 임시정부가 반탁운동을 주도하고 총파업과 시위, 권력 접수 시도를 ‘쿠데타’로 규정하고 강경하게 나왔다. 심지어 하지는 12월 31일 0시를 기하여 임정 요인들을 인천에 있는 전 일본군의 미군 포로수용소에 수용했다가 중국으로 추방할 계획까지 세웠다.
1946년 1월 1일에 하지와 김구 사이에 군정청 하지 사무실에서 격렬한 충돌이 있었다. 하지는 김구에게 “다시 나를 거역하면 죽이겠다”고 말했고, 김구는 이에 맞서 ‘당장 자살하겠다’고 대들었다.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동노외 3명 옮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 (주)창비, 2001, p 279)
충돌의 직접 원인은 임정이 발표한 ‘포고 1호’ 때문이었다. 임정이 군정청을 마비시키고 행정권과 경찰권을 탈취하겠다는 발표는 군정청 입장에서 보면 ‘쿠데타’ 시도였다.
그런데 하지가 험하게 나간데는 12월 30일 송진우 암살의 배후가 김구라는 의심이 바닥에 깔려 있었던 것 같다. 송진우는 하지의 주장을 언론에 대신 전할 만큼 하지의 신임을 받은 고문이었다.
그런데 반탁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는 시점에서 송진우가 암살당했으니, 반탁운동에 대한 의견 차이로 김구의 제거 대상이 되었다는 의심이 일어난 것이다. 김구가 테러 성격의 ‘의거’를 주도한 경력도 의심의 발판이 되었다. (김기협 지음, 해방일기 2, 너머북스, 2011, p 349)
하지와 김구의 면담이 끝난 후인 오후 8시에 임시정부 선전부장 엄항섭은 방송을 통해 국민들에게 파업을 중지하고 일터로 돌아갈 것을 요청했다. 특별히 군정청에 군정청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일제히 복업할 것이며, 자신들의 행동은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것이지 미군정에 반대하거나 우리 동포들의 일상을 곤란케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로써 임시정부의 ‘포고 제1호’는 꼬리를 내렸다. 쿠데타는 흐지부지되었고, 임시정부는 ‘심각한 체면 손상’을 입었다.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1권, 인물과 사상사, 2004, p 153-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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