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그 특사 사건 (27)
- 이위종 특사의 연설 : 을사늑약과 국민의 고통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907년 7월 8일 저녁 헤이그 국제협회에서 이위종은 각국의 기자들을 상대로 연설을 계속했다.
“일본은 황무지 개척 계획이 실패하자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려 했습니다. 1905년 11월 초에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 천황의 특명전권대사로 서울에 왔습니다. 그는 11월 15일에 일본의 기마병과 보명 그리고 포병을 총동원하여 왕궁을 포위한 후 고종 황제를 알현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토는 이른바 보호조약을 승인하라고 황제에게 제시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4개 조항입니다.
첫째, 한국의 모든 외교권을 일본에 이양한다. 둘째, 한국 정부는 일본과 통하지 않고는 외국과 어떤 조약도 체결하지 않는다. 셋째, 서울에 일본의 통감부를 설치한다. 넷째, 일본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경우 한국의 관공서에 일본인을 임명한다.
이토 히로부미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황제 폐하와 대신들은 이를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황제 폐하는 ‘차라리 죽을지언정 그 조약에 동의할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이후 황제 폐하와 대신들과 이토 히로부미 간의 담판은 17일 자정까지 이어졌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일본의 위협이 점점 더 강해졌습니다.
‘조약을 조인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에게 큰 파국이 닥칠 것이요!’ 일본 군인들이 다가와 발을 쾅쾅 굴러대는 공포속에서, 대신들의 심정은 어찌 상상이라도 하겠습니까? 대신들의 마음은 점점 약해져 갔습니다.
일본군들은 가장 거세게 반대하던 한규설 총리대신을 강제로 밀실로 처넣고 죽기겠다고 위협했습니다. 한규설은 끝까지 저항했지만 나머지 대신들은 일본의 무력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무력을 사용하여 우리 정부가 원치 않는 조약을 그들 뜻대로 얻어냈습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와 언론은 전 세계에 한국과 일본 간의 조약이 원만하고 우호적으로 체결되었다고 선전했습니다.
입으로는 우의와 형제애를 말하면서 손으로는 그 형제의 주머니를 훔치는 일본은 백주(白晝 대낮)의 강도보다도 더 비열하고 야수적입니다.
강제로 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에 우리 국민들은 저항하였습니다. 그러나 무도한 일본군은 총과 칼로 우리 국민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습니다.
1905년 11월 17일에 일본은 오로지 무력으로 한국인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습니다. 일본은 한국 정부의 모든 기관을 접수하고 곧 그 기관들을 통하여 오로지 일본의 재정적인 이득만을 취했습니다.
일본인은 지난 3년 동안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한국인을 착취와 강탈, 학대했습니다. 이 피해는 우리 한국인이 가장 나쁜 구식 정권에게 50년 동안 당했던 것보다 훨씬 심했습니다. (They are officially and unofficially pushing forward schemes of extortion, robbery, and cruelty, which in three years lave inflicted more actual damage than the worst Government of the old style could have done in fifty years.”
(이승우 지음, 시베리아의 별, 이위종, 김영사, 2019, p 159-161, 342-345)
이위종은 한국인이 1905년 이후 3년간 일본에게 당했던 고통이 지난 50년간 가장 나쁜 고종 정권에게 당했던 고통보다 더 크다고 연설했다.
이를 거꾸로 뒤집어 보면, 이위종은 국민에게 엄청난 고통을 많이 준 가장 나쁜 정권이 바로 자신들을 특사로 임명한 고종 정권이라고 성토하고 있다.
이위종의 연설은 이어진다.
“최근 간행된 책자에 따르면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산업은행에서 1천만엔(500만 달러)을 빌려다가 도로 건설, 수리 사업, 교육시설 건축을 위해 사용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대한제국의 실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일본 정부의 약탈적이며 이기적인 수법을 다 아는 사람들에게는 속이 다 들여 보이는 허구일 뿐입니다.
1천만 엔을 빌려 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돈이 한국인을 위하여 사용하였다는 것을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일본인은 대한제국의 요직이라는 요직은 모두 차지하고선 그들이 일본에서 받았던 월급보다 3-4배의 월급을 받고 있습니다. 이른바 수리 사업이라는 것도 서울과 제물포에 있는 일본인 거류지에만 국한된 사업이었습니다. 이처럼 1천만 엔이 탕진된 것입니다.”
- 이위종 특사의 연설 : 을사늑약과 국민의 고통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907년 7월 8일 저녁 헤이그 국제협회에서 이위종은 각국의 기자들을 상대로 연설을 계속했다.
“일본은 황무지 개척 계획이 실패하자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려 했습니다. 1905년 11월 초에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 천황의 특명전권대사로 서울에 왔습니다. 그는 11월 15일에 일본의 기마병과 보명 그리고 포병을 총동원하여 왕궁을 포위한 후 고종 황제를 알현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토는 이른바 보호조약을 승인하라고 황제에게 제시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4개 조항입니다.
첫째, 한국의 모든 외교권을 일본에 이양한다. 둘째, 한국 정부는 일본과 통하지 않고는 외국과 어떤 조약도 체결하지 않는다. 셋째, 서울에 일본의 통감부를 설치한다. 넷째, 일본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경우 한국의 관공서에 일본인을 임명한다.
이토 히로부미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황제 폐하와 대신들은 이를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황제 폐하는 ‘차라리 죽을지언정 그 조약에 동의할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이후 황제 폐하와 대신들과 이토 히로부미 간의 담판은 17일 자정까지 이어졌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일본의 위협이 점점 더 강해졌습니다.
‘조약을 조인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에게 큰 파국이 닥칠 것이요!’ 일본 군인들이 다가와 발을 쾅쾅 굴러대는 공포속에서, 대신들의 심정은 어찌 상상이라도 하겠습니까? 대신들의 마음은 점점 약해져 갔습니다.
일본군들은 가장 거세게 반대하던 한규설 총리대신을 강제로 밀실로 처넣고 죽기겠다고 위협했습니다. 한규설은 끝까지 저항했지만 나머지 대신들은 일본의 무력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무력을 사용하여 우리 정부가 원치 않는 조약을 그들 뜻대로 얻어냈습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와 언론은 전 세계에 한국과 일본 간의 조약이 원만하고 우호적으로 체결되었다고 선전했습니다.
입으로는 우의와 형제애를 말하면서 손으로는 그 형제의 주머니를 훔치는 일본은 백주(白晝 대낮)의 강도보다도 더 비열하고 야수적입니다.
강제로 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에 우리 국민들은 저항하였습니다. 그러나 무도한 일본군은 총과 칼로 우리 국민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습니다.
1905년 11월 17일에 일본은 오로지 무력으로 한국인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습니다. 일본은 한국 정부의 모든 기관을 접수하고 곧 그 기관들을 통하여 오로지 일본의 재정적인 이득만을 취했습니다.
일본인은 지난 3년 동안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한국인을 착취와 강탈, 학대했습니다. 이 피해는 우리 한국인이 가장 나쁜 구식 정권에게 50년 동안 당했던 것보다 훨씬 심했습니다. (They are officially and unofficially pushing forward schemes of extortion, robbery, and cruelty, which in three years lave inflicted more actual damage than the worst Government of the old style could have done in fifty years.”
(이승우 지음, 시베리아의 별, 이위종, 김영사, 2019, p 159-161, 342-345)
이위종은 한국인이 1905년 이후 3년간 일본에게 당했던 고통이 지난 50년간 가장 나쁜 고종 정권에게 당했던 고통보다 더 크다고 연설했다.
이를 거꾸로 뒤집어 보면, 이위종은 국민에게 엄청난 고통을 많이 준 가장 나쁜 정권이 바로 자신들을 특사로 임명한 고종 정권이라고 성토하고 있다.
이위종의 연설은 이어진다.
“최근 간행된 책자에 따르면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산업은행에서 1천만엔(500만 달러)을 빌려다가 도로 건설, 수리 사업, 교육시설 건축을 위해 사용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대한제국의 실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일본 정부의 약탈적이며 이기적인 수법을 다 아는 사람들에게는 속이 다 들여 보이는 허구일 뿐입니다.
1천만 엔을 빌려 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돈이 한국인을 위하여 사용하였다는 것을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일본인은 대한제국의 요직이라는 요직은 모두 차지하고선 그들이 일본에서 받았던 월급보다 3-4배의 월급을 받고 있습니다. 이른바 수리 사업이라는 것도 서울과 제물포에 있는 일본인 거류지에만 국한된 사업이었습니다. 이처럼 1천만 엔이 탕진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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