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이 본 한말 (36)
- 코레야 1903년 가을 (11) - 전쟁 전야의 서울(2)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이제 세로셰프스키의 『코레야 1903년 가을』의 마지막 부분이다.
먼저 법정 부패부터 읽어보자.
다른 행정관청과 마찬가지로 법정에서도 뇌물이 통한다. 나의 통역사이자 서울 가이드인 궁중관료 신문균은 이에 관해 드러내놓고 말했다.
“한국에서 부유한 사람은 언제나 옳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아무 잘못을 하지 않아도 법정에 서게 되면 처벌을 받게 되지만, 부유한 사람은 살인죄도 벗을 수 있습니다. 한국의 법정은 양심과 법에 따라 재판하는 것이 아니라 피고의 손을 보고 판결을 내립니다.”
한마디로 유전무죄 무전유죄이다.
법정에는 거간꾼이 있다. 권력의 친위대원이라 할 유명한 ‘문객’들은 재판을 통한 도적질로 큰 수입을 올린다. 이들은 정권 실세에게서 추천서를 받아 법관에게 간다. 그러면 법관은 감히 죄인을 재판할 엄두를 못낸다. 법관은 법과 정의는 젖혀두고 문객에게서 무엇인가 이득을 챙길 궁리만 한다. (세로셰프스키 지음· 김진영 외 4명 옮김, 코레야 1903년 가을, 개마고원, 2006, p 372-374)
이어서 저자는 ‘한국 황제의 운명’을 기술한다.
“황제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벌린 입들이나 내민 앞발, 드러낸 이빨밖에 없다. 그는 주위에서 인간적인 사람들을 찾지만 모두 헛될 뿐이다.
그는 아끼던 신하들의 잔인함, 어제는 노예에 불과했던 사람들의 오만함을 수없이 보아왔고, 고개 숙여 절하고 미소를 지으며 거짓, 독, 음모를 들이대는 사람들을 수없이 겪어왔기에 이제는 무엇을 믿고 무엇을 믿지 말아야 할지를 모를 지경이 되어 버렸다.
그는 신하들이 그의 눈앞에서 살해당한 일, 그의 궁궐에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침입했던 일, 주위에서 벌어지던 싸움, 외국 고관들의 압력 혹은 교활하고 매끄러운 답변 속에 숨겨진 협박들을 기억할 뿐이다.”
황제의 운명은 이렇다.
“겉으로 보기에는 생전에는 물론이고 사후에도 믿기 어려울 만큼 대단한 숭배를 받지만 사실은 영원한 포로에 불과하며, 모든 악의 원인이 될 가능성은 크지만 선을 행할 가능성은 정말로 적은 것, 이것이 바로 황제의 운명이다.” (위 책, p 381-385)
한편 신문균과 나는 서울의 유명 음식점에서 마지막 저녁을 함께 보냈다. 음식점은 너무 형편없었다. 역겨운 술 냄새가 진동했고, 탁자도 의자도 벽도 너무 더럽고 지저분했다.
신문균은 말이 없었다. 벽 너머의 목소리가 잦아들고 손님들이 나간 후에야 그는 우울한 말을 하였다.
“도대체 희망이 보이지 않아요. 교육도 하고 학교도 열고 학생들 유학도 보내야 하는데 돈이 없습니다. 돈이 없는 것은 관료들이 도둑질해 가기 때문입니다. 이들도 가족을 봉양해야 하고, 친척도 도와주어야 하고, 뇌물도 상납해야 하고 ... 그러니 도둑질을 할 수 밖에 없어요.
외국인들은 우리나라에 관료들이 너무 많다고 하지만, 한국에는 관직을 제외한 직업이란 게 없습니다. 농민들은 찢어지게 가난한 삶을 살고 있어 차라리 개들이 더 낫게 사는 지경입니다.”
그는 한숨만 푹 쉬며 술을 들이켰다.
“그럼 일본인들은 어떻습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일본인들이요? 그들은 최악입니다. 그들은 산 채로 우리 목에 올가미를 걸고 있어요. 그들은 은행을 열어서 우리에게 돈을 빌려줍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그들의 노예가 되고 있습니다. 서울 땅의 1/3이 그들 소유라는 것을 아십니까? 다들 그들에게 저당 잡히고 또 잡히고 있지요.”
“그래도 일본인들은 개혁을 시도하고 있지 않나요? 사람들을 교육하고 노예제를 폐지하고 국가 경제를 정비하고자 하지 않습니까?”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겉으로만 우리를 만족시키려 하고 있어요. 우리의 겉모습만 바꾸고 내면은 다 파내 버려 껍질만 남기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혼을 없애려고 합니다.”
신문균의 지적은 예리하다. 우리의 말과 역사를 없애버린 일제 강점기를 생각해 보라.
신문균은 우울한 침묵 속에 연거푸 술을 마셨다. 잠시 후 우리는 발코니로 나갔다. 달빛을 받아 하얗게 보이는 안개 낀 거대한 도시가 우리 발아래 펼쳐졌다. 오래된 것이나 새로 지은 것이나, 이 향락의 피난처는 끝이 없는 듯 같았다. 갑자기 저기 나무들 사이로 갓 쓴 노인의 환영(幻影)이 보이는 듯했다. 노인은 졸음이 밀려오는 지친 머리를 기댈 곳을 헛되이 찾고 있는 듯 보였다. 그 모습이야말로 한국의 저 불행한 과거를 말해주는 끔찍한 상징이 아니겠는가!
(위 책, p 420-423)
1903년의 ‘대한제국 견문기’ 끝은 마치 문학 작품을 읽는 기분이다.
여운이 진하게 남는 피날레다. 이제 독후감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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