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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세계여행

[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예술과 혁명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25) 데카브리스트 광장

[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예술과 혁명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25) 데카브리스트 광장

승인 2020-01-28 09:4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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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이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는 날이다. 12일간의 북유럽 · 러시아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간다. 오전에 네바 강 투어를 했다. 유람선은 운하를 따라서 다리를 몇 개 지나서 네바강에 이르렀다. 네바강에서 보니 에르미타시 박물관, 성 이삭 성당 등 주요건물이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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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람선에서 본 에르미타 박물관. 사진=김세곤 제공

성 이삭 성당과 노란 건물 사이의 ‘청동기마상’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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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람선에서 본 청동기마상. 성 이삭 성당과 노란건물(헌법재판소) 사이에 있다. 사진=김세곤 제공


‘청동기마상’의 인물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 표트르(1672~1725) 대제이고, 주변은 ‘데카브리스트(Dekabrist)’ 광장이다. 1825년 12월 14일 원로원 광장에서 거행된 신임 황제 니콜라이 1세에 대한 충성 서약식에서 비밀결사 장교 그룹인 ‘데카브리스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농노제 폐지, 입헌군주제나 공화제로의 전환 등을 꾀했지만, 반란은 곧 진압되고 말았다. 데카브리스트는 '12월 당원'이라는 뜻으로, 그들이 12월에 거사했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지어졌다. 이후 원로원 광장은 ‘데카브리스트 광장’으로 개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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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마상이 있는 데카브리스트 광장. 사진=김세곤 제공

그러면 ‘데카브리스트 반란’을 자세히 살펴보자.

1825년 11월19일에 알렉산드르 1세가 흑해의 휴양지 타간로크에서 급사했다. 알렉산드르 1세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바로 아래 동생인 콘스탄틴이 왕위 계승권자였다. 하지만 콘스탄틴은 카톨릭 신자인 폴란드 백작 딸과 결혼하여 1822년에 왕위계승권을 포기했다. 이러자 알렉산드르 1세는 셋째 동생 니콜라이를 후계자로 정했다. 그런데 이 사실은 당사자인 니콜라이도 모를 정도로 극비였다.

11월27일에 알렉산드르 1세의 서거 소식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알려졌을 때 니콜라이 1세와 귀족들은 콘스탄틴에게 충성 맹세를 했다. 그런데 폴란드 총독인 콘스탄틴이 왕위계승권을 포기한 편지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보내자 니콜라이 1세가 12월 13일에 왕위를 계승했다.

이런 3주간의 공백 기간에 나폴레옹 전쟁에서 돌아와 비밀결사대에 가담한 귀족층의 청년 장교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로 계획하였다.

1816년에 무라비요프, 트루베츠코이 등 근위대 장교들이 최초의 비밀결사 '구제동맹'을 결성했다.

이들은 1812년 나폴레옹 전쟁 중에 농민출신의 병사들과 접촉하면서 비참한 농촌 실정을 알았고, 1814년 3월 파리 입성 이후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가져온 자유주의와 입헌주의적 사상과 제도를 목격하고, 아직도 절대군주 아래 시달리는 러시아의 비참한 상태를 비교하면서 조국을 개혁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후 1821년에는 우크라이나의 '남방결사'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북방결사'로 갈라졌다.

이들은 12월14일에 근위대장 트루베츠코이를 지도자로 앞세워,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니콜라이 1세는 이들의 반란계획을 사전에 알았고, 그는 12월 14일 새벽 1시부터 원로원, 관료와 군인들의 충성서약을 받았다.

12월 14일 아침, 북방 결사가 이끄는 3000명의 병사들이 원로원 광장에 도착했다. 이들은 니콜라이가 바르샤바에서 돌아오는 콘스탄틴을 체포하여 왕위를 찬탈했다고 믿었다. 한편 몇 배에 달하는 정부군이 광장 주위를 포위했다. 양군은 몇 시간 동안 그대로 대치했는데, 반란군은 지휘자 트루베츠코이가 나타나지 않아 동요했다.

니콜라이는 통치 첫날을 피로 물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대주교를 보내 반란군을 설득했으나 실패했다. 이어서 설득에 나선 밀로라도비치 장군은 민간인 카호프스키가 쏜 총에 맞아 죽었다.

이러자 니콜라이 1세는 발포명령을 내렸다. 한 시간 만에 반란군은 도주했다. 1826년 1월3일에 우크라이나의 남방결사도 진압되었다.

이 반란으로 579명이 체포되었고, 1826년 7월13일에 페스텔, 무라비요프, 카호프스키 등 5명은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서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120여 명은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비록 러시아 최초의 '반(反)체제' 운동인 데카브리스트 반란은 실패했지만 향후 러시아 혁명의 원천이 되었다.

덧붙일 것은 푸시킨(1799∼1837)이 데카브리스트 운동을 추앙한 점이다. 송시 '자유' 등 풍자시로 인해 1820년에 남러시아로 추방되었던 푸시킨은 1826년 9월8일 모스크바 클렘린 궁에서 니콜라이 1세를 알현했다. 니콜라이 1세는 푸시킨에게 데카브리스트 봉기 일에 그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었다면 무엇을 했을지를 물었다. 푸시킨은 데카브리스트 반란에 가담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여행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