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잡록 2 본조(本朝) 김일손(金馹孫)
○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자는 계운(季雲)이요, 호는 탁영자(濯纓子)인데 수로왕(首露王)의 후예다. 점필재(佔畢齋)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성종 병오년에 사마시에 장원 급제하고 같은 해 갑과(甲科)에 올라, 문장과 기절(氣節)로써 세상에 이름이 높았다. 연산 때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권경유(權景裕)ㆍ권오복(權五福)과 함께 죽었다. 세상에 간행된 문집이 있다.
○ 계운(季雲)의 소장(疏章)과 차자(箚子)는 그 문장의 넓고 깊음이 큰 바다와 같았고, 국사를 논의하며 인물을 시비함이 마치 청천백일과 같았으니, 참으로 세상에 드문 인재요 묘당의 그릇이었다. 《수언》
○ 호계(虎溪)의 물이 얕아서 겨우 흐를 정도인데 거기에 창포를 묶어 놓고 돌로 물을 막고 그 가운데를 비게 만들어 그 위에 높은 누각을 짓고 연자(燕子)라 불렀으나 누각은 높은데 물은 작아 졸졸 흘러 서로 어울리지 않았다. 〈탁영연자루기(濯纓燕子樓記)〉
○ 순(舜)은 오현(五絃)이었고, 문왕(文王)은 칠현(七絃)이었으니, 육현(六絃)은 옛 제도가 아니다. 진(晉) 나라에서 칠현금을 고구려에 보냈는데 왕산악(王山岳)이 그 제도에 손질을 가하여 육현금(六絃琴)을 만들어 썼으니, 육현금이 우리 나라에 있어서도 역시 오래된 것이다. 명(銘)을 지어 이르기를, “만물에는 외로운 것이 없고 짝을 만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백세(百世)를 지나도 반드시 그렇게 된다고 하기는 어렵다. 아! 이 물건이 나를 놓지 않는구나. 서로 기다리지 않았건만 누구를 위하여 너는 나왔는고.” 하였다. 육현금 등에 씀
○ 탁영자가 신개지(申漑之)ㆍ강사호(姜士浩)ㆍ김자헌(金子獻)ㆍ이과지(李顆之)ㆍ이사성(李師聖)과 갈마들여 독서당(讀書堂)에 있을 때 여가에 거문고를 배웠고, 권향지(權嚮之)도 옥당에서 왕래하면서 배웠다. 그리고, 말하기를, “왕산악(王山岳)이 처음 육현을 뜯을 때에 검은 학[玄鶴]이 와서 춤을 추었는데, 한 거문고에 한 쌍의 학이었다.” 하였다. 이에 용헌(慵軒 이종준(李宗準)의 호) 이거사(李居士)에게 청하여 학을 그렸다. 처음에는 거문고에 놓으려 했으나 그 재로를 얻기 힘들었는데, 동화문(東華門) 밖에 있는 한 늙은 할머니 집에서 백년 가까이 된 문짝을 얻어 거문고를 만들어 탔는데 그 소리가 청월(淸越 소리가 맑음)하고 빈지(賓池)하였으며 아직도 문짝으로 달았을 때의 못 구멍이 남아 있다. 《수헌집(睡軒集)》에 나옴
○ 학은 욕심이 있고 거문고는 욕심이 없으니, 내 장차 학을 거문고에 그려서 그 유(類)를 따르련다. 육현금에 씀
○ 오현금 등에 쓰기를, “줄이 다섯인데 셋은 괘(卦) 위에 있고 둘은 괘 옆에 있어 거문고의 배가 바르고 삐뚤어짐이 없다.” 하였는데, 괘는 방언이다. 본집
○ 〈서안명(書案銘)〉에 이르기를, “그 배를 비웠으니 물건을 담을 만하고 본래 줄기가 없을 때 순박함이 흩어지지 않았다. 이 물건이 네 모퉁이가 있으니 세 모퉁이를 반증할 만하다.” 하였다. 상동
○ 탁영자(濯纓子)가 말하기를,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모든 물건이 반드시 다른 물건과 함께 서로 걸맞는 것이 있을 것이니, 서로 어울리지 못하면 조물주의 뜻을 얻지 못할 것이다. 오막살이 초가집은 처사(處士)에게 알맞고, 화려한 큰 집은 왕손(王孫)에게 어울리는 것과 같다. 이것을 바꾸어 놓으면 어울리지 아니한다. 상동
○ 탁영자가 명 나라 서울에 갔을 때 순천부 학사(順天府學士) 주전(周銓)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얌전하고 사랑스러웠으며 박학(博學)하고 시를 잘 읊었다. 이에 차고 있던 장도칼을 풀어 선물하였더니, 주전은 몇 권의 도서(圖書)로써 답례하였다. 상동
○ 성종이 일찍이 여러 선비들에게 휴가를 주고 술을 내려 수정배(水精盃)로써 권하고 그것을 성균관 관원에게 주었더니, 그것에 도금을 하고 대(臺)를 만들어 김일손(金馹孫)이 명을 썼는데, “깨끗하여 더럽히지 않으며, 속은 비어서 받아들일 수 있다. 그 물건을 덕되이 여기고 생각하여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동국여지승람》
○ 어머니 이씨(李氏)는 자제를 가르침에 있어 매우 법도가 있었다. 탁영의 형이 함양(咸陽) 군수로 나갔을 제 와서 어머니의 병을 간호한 일이 있었다. 약을 짓는데 관청의 쇠 약연(藥硏)을 썼더니 부인이 듣고 불쾌히 여기면서, “어찌 관청 물건을 사가(私家)에 두겠느냐?” 하고, 꾸려서 도로 보내었다. 《허백정집(虛白亭集)》에 나옴
○ 붓[管處士]에 유심필(有心筆)과 무심필(無心筆)이 있는데, 무심필을 가려서 쓴 것은 그 마음[心]이 두 갈래로 가는 것이 없음을 취하여 무심자(無心子)라 불렀다. 〈관처사지(管處士誌)〉
○ 관성자(管城子 붓의 별칭)를 사시(私諡)하여 말하기를, “문도처사(文悼處士)는 욕심이 많고 마음이 검었으므로 죽었어도 관이 없었으며 무덤은 봉분(封墳)을 하지 않는다.” 하였다. 상동
○ 《 관자(管子)》 〈 술고(述古)〉편에, “폐병을 앓으면 물을 잘 마시는데 추운 겨울에도 물을 많이 마시어 배가 불러 얼어 죽은 자가 많다.” 하였다. 상동
○ 초관(貂冠 돈피로 만든 관)을 쓴 족속은 귀하고, 고구(羔裘 새끼양의 가죽으로 만든 옷)를 입은 족속은 천하고 토끼[卯]는 군신(君臣)과 귀천의 중간이므로 일찍 끊어지기가 쉽다. 초관(貂冠)과 고구(羔裘)의 두 족속은 토끼[卯]보다 조금 장수하며 굳세고 건강하여 사람의 마음에 들므로 세상에 임용(任用)되는 것이 많다. 상동
○ 죽피관(竹皮冠 죽순 껍질로 만든 관)을 씌우고 종이 이불로 염습(殮襲)하여 평소의 뜻에 따랐다. 상동
○ 계운(季雲)은 문장에 능하고, 성품이 간이하고 높이 자처하여 남을 칭찬하는 일이 적었다. 벼슬이 이조 정랑에 이르렀을 때, 이극돈(李克墩)이 전라 감사로 있으면서 성종의 초상 때에 향을 바치지도 않고 기생을 데리고 다녔다. 김일손이 그 사실을 사초(史草)에 썼더니, 극돈이 슬그머니 고쳐 주기를 청했으나 일손이 들어 주지 않았으므로 감정을 품고 있다가, 실록을 편수할 때에 드디어 사화를 일으켜 그를 죽였다. 《무오당적》
○ 시를 읊조리면서 아직 토로하지 못하는 것은 먼저 그 뜻을 이어 받들기를 간과 담이 서로 비추는 것과 같이하여, 반드시 나의 품은 뜻을 마음껏 펴고야 말았다.
○ 김일손이 일찍이 헌납(獻納)으로 있을 때에, “이극돈(李克墩)과 성준(成俊)이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장차 우승유(牛僧儒)와 이덕유(李德裕)의 당(堂)을 만들 것이라.”고 논하니, 이극돈이 크게 노하였다. 성종이 사국(史局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곳)을 열자 김일손의 사초(史草)에 자기의 나쁜 일이 낱낱이 써 있는 것을 보았다. 또 세조 때의 일을 쓴 것을 보고, 이에 자기의 원한을 보복하고자 유자광(柳子光)과 모의하고 사초를 봉하여 임금께 아뢰어 혹독하게 무오대옥(戊午大獄)을 일으켜 대역(大逆)으로 논죄하였으므로 당대의 이름 있는 선비들이 모조리 살육되었다. 〈유자광전(柳子光塼)〉
○ 탁영자가 말하기를, “내가 지난날 명나라 서울에 가서 정유(程愈)가 모아서 주석을 단 《 소학(小學)》을 얻어 가지고 돌아와서 곧 인쇄하여 나라 안에 폈더니, 학도들이 모두 혜택을 입게 되었다.” 하였다. 본집
○ 계운(季雲)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선비였으나, 불행한 시대를 만나 화를 입고 죽었다. 그 화를 입은 경위와 신원(伸寃)을 다하지 못한 일에 대해서는 후생으로서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공의 무덤을 옮길 제 남지정(南止亭 남곤)이 지어 보낸 만시(挽詩)에 그 사연이 자세히 적혀 있다. 그 시에 이르기를,
귀신은 아득하게 어둡고 / 鬼神茫昧然
천도는 진실로 알기 어렵구나 / 天道諒難知
좋아하고 미워함이 인간과 달라서 / 好惡與人異
화와 복을 항상 거꾸로 베푸네 / 禍福恒舛施
길고 먼 이 우주에 / 悠悠此宇宙
오래 사나 짧게 사나 하루살이와 같은 것 / 脩短同蔑咨
촉루(해골)의 즐거움이 / 焉知髑髏樂
임금보다 나은지 어찌 알랴 / 不易南面治
달관으로 한 웃음에 붙이니 / 達觀付一莞
뜬구름처럼 아득하기만 하구나 / 浮雲於渺瀰
오직 아까운 것은 세상에 이름난 사람은 / 獨憐名世人
한 번 나기 매양 더디어 / 其出每遲遲
수백 년을 걸려서야 / 契濶數百年
겨우 한 번 볼 수 있다네 / 乃得一見之
그를 보고도 성취시키지 못하였으니 / 見之又不逐
태평성대를 어느 때에나 보리오 / 至治寧有期
나의 태어남이 얼마나 다행으로 / 吾生亦何幸
그대와 때를 같이하였던고 / 得與君並時
서한 시대의 문장이요 / 文章漢西京
송 나라 원풍ㆍ희녕 때의 인물이었네 / 人物宋蘴熙
…… 하고, 또,
성 동쪽의 낮은 언덕은 / 坡垞城東土
초라하여 주검 묻을 곳 못 되니 / 草草難掩屍
사랑하는 자손들이 있어 / 情鍾有子孫
좋은 땅 가려 이장하려 하는구나 / 卜兆謀遷移
그대 지금 하늘 위에서 / 君今九天上
굽어보면 먼지만 자욱하리 / 俯視息相吹
훗날 도지 엮을 제 / 他年纂圖誌
이 무덤 기록하여 빼지 말라 / 錄墓當不遺
하였다.
끝 귀는 계운의 무덤이 마땅히 도지에 기록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 뒤 《속 여지승람(續輿地勝覽)》을 편찬할 때에 낭관(郞官)들이 그의 무덤을 기록해 올렸더니, 당상관(堂上官) 한 사람이 말하기를, “계운은 재상이 아니요 또 근후(勤厚)한 사람도 되지 못하였다.” 하여, 드디어 삭제하고 말았다. 이 어찌 성세(盛世)의 가장 공정한 논의라 할 수 있겠는가. 계운을 위하여 거듭거듭 아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패관잡기》
○ 말은 붙좇은 것이 아니나 뜻은 같고, 행동을 머뭇거리지 않으면서 나아가기는 같으며, 벼슬하기는 선후가 있으나 때는 같고, 직분에는 내외(內外)가 있으나 하는 일은 같다. 모이면 희희낙락(喜喜樂樂)하고, 헤어지면 문득 슬퍼한다. 그 모이며 헤어짐에 따라 내가 기뻐하고 또 슬퍼하니, 슬픔과 기쁨이 또한 과연 무슨 마음인가. 〈취산기(聚散記)〉
○ 천왕봉(天王峯) 꼭대기에 오르면 돌대야[石罍]가 있는데 거기에서 부앙(俯仰)하면 심신(心神)이 함께 떨리어 몸이 마치 천지가 아직 나누어지지 않은 혼돈한 태초(太初)에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천지와 함께 흐르는 듯하다. 《두류록(頭流錄)》
○ 단구협(丹丘峽)으로부터 동쪽은 산이 더욱 기이하고 물이 더욱 맑다. 막다른 골짜기에서 머리를 돌리면 마치 가인(佳人)과 이별하는 양, 열 걸음에 아홉 번이나 돌아보게 된다. 〈단산이락루기(丹山二樂樓記)〉
○ 선비로서 병법(兵法)을 모르는 것은 진유(眞儒)가 아니다. 훈고(訓詁)나 하는 선비는 고루하고, 사장(司章)을 하는 선비는 화사하여, 문학하는 선비는 과대(誇大)를 잘하나, 진유(眞儒)는 실속이 있어 활쏘기ㆍ말타기ㆍ글쓰기ㆍ셈하기가 그 분수 안에 있어, 재정(財政)이나 무기(武器) 처리에 있어 그 최고의 기능을 발휘하지 않음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송유평사서(送柳評事序)〉
○ 벼슬에는 크고 작음이 있으나 마음에는 크고 작음이 없으며, 직책에는 내직과 외직이 있으나 마음에는 안팎이 없는 것이다. 무성(武城)원으로 가서 교육을 일으켜 예악을 가르친 자가 당시의 명예를 구하지 아니하였으며, 선보(單父)에 거문고를 울리는 사람이 어찌 훗날의 이름을 바랐으랴. 그 위치에서 나의 성심성의를 다하여 그 백성에게 임하면 그만이다. 〈송최옥과서(送崔玉果序)〉
○ 장유(壯遊)로써 말하면 호시(弧矢 나무로 만든 활과 살)는 맞기도 하고 안 맞기도 하며 성명(性命)에 입각하여 보면 가고 옴이 모두 운수가 있는 것, 사업(事業)을 비교하면 문무(文武)에 분별이 없으나, 임금과 어버이를 견주어 보면 은의(恩義)에 경중이 있는 것이다. 어버이는 내 몸을 낳아 임금께 바치고, 임금은 내 목숨을 맡은 것이니 진퇴(進退)에 의가 있어야 한다. 싸움터에서 용맹하지 못함을 효도가 아니라고 한다면, 남아가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 어찌 혼정신성(昏定晨省)하면서 서재에만 들어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청유(靑油) 막하(幕下)에서 비낀 창이 무지개를 토하며 황운(黃雲)이 비낀 성새(城塞) 위에서 갑옷을 벗고 편안히 자면서, 조정으로 하여금 북녘에 대한 걱정이 없게 한 뒤에, 임기가 차서 교대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어버이의 기다림을 갚으려 고운 옷자락을 펄펄 날려 늙은 어버이 얼굴을 반갑게 하여야 좋지 않겠는가. 〈송유평사자침서(送柳評事子沈序)〉
○ 전 날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영남에 숨어 있을 때, 두류산(頭流山)에 노니려고 단속사(斷俗寺)에 이르니, 절 경내(境內)에 옛 누각이 있고, 누각 앞에 두 그루의 매화나무가 있었는데 키가 열 자가 넘고, 그 밑에 반 자[尺]나 되는 죽지 않은 오래 묵은 등걸이 있었다. 그 절의 중들이 그것을 정당매(政堂梅)라고 불렀는데, 그 이름의 유래를 물어 보았더니 말하기를, “강통정(姜通亭)이 젊었을 때 손수 심은 것으로써, 그는 그 뒤에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으므로 그렇게 이름지었다.” 하였다. 정당이 죽은 지 백여 년에 매화나무 또한 늙어 죽음을 면할 수 없었으므로 그의 증손 용휴씨(用休氏)가 그의 아버지 진산군(晉山君)의 명을 받고 와서 유적(遺跡)을 찾고 감개무량해 하면서 새로 그 뿌리 곁에 매화를 심었다. 이미 10년의 세월이 흘러 정당(政堂)에게 자손이 있을 뿐 아니라 매화나무도 자손이 자랐다. 때는 바야흐로 첫여름, 은은한 향기가 다시 더할 나위가 없었다. 내가 낮은 가지를 휘어잡고 희롱으로 푸른 열매를 따서 씹으면서 중의 말을 적어 한 고사(故事)로 삼았다. 8년이 지난 뒤에 용휴씨는 승정원(承政院)에 들어가 승지가 되었고, 나는 하관(夏官 병조(兵曹))의 낭관(郞官)이 되어 아침저녁으로 승정원에 있었다. 하루는 제공(諸公)이 지은 〈정당매(政堂梅)〉라는 시 또는 글을 보였으므로 내가 곧 찾아서 그 끝에 쓰기를, “나는 천지 사이에 있는 만물은 비록 한 포기의 풀과 한 그루의 나무의 작은 것일지라도 자연의 이치가 깃들여 있지 않은 것이 없으며, 그 흥망 그 득실(得失)이 모두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하였다.
[주-D001] 《관자(管子)》 : 춘추시대 제(齊) 나라의 신하 관중(管仲)이 지은 책인데 모두 24권 79편이나 된다. 경제와 도덕의 불가분의 관계를 밝혀 백성의 경제 생활 확립을 역설하였다. 이 책의 영향으로 농업과 상업이 진흥되었다고 한다.
[주-D002] 촉루(髑髏) …… 알랴 : 죽은 사람의 두골(頭骨)이 남쪽만 향해서 앉아 있는 임금보다 오히려 걱정없고 편하기가 나으므로 바꾸지 않겠다고 한 우언(寓言)에서 온말. 《莊子 至樂》
[주-D003] 송나라 …… 인물이었네 : 송 나라 원풍, 희녕 연간에 명현(名賢) 한기(韓琦)ㆍ부필(富弼)ㆍ소식(蘇軾) 등이 나왔다.
'김일손과 무오사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RBS역사칼럼-길 위의 역사](2부 무오사화)- 2회 도승지 신수근, 사관의 참예를 막다 (0) | 2018.08.08 |
---|---|
김일손, 1490년 가을에 남효온과 함께 김시습을 만나다. 김세곤 (0) | 2018.08.05 |
남곤이 지은 유자광전 (柳子光傳) (0) | 2018.08.01 |
[RBS역사칼럼-길 위의 역사 2부]- 1회 무오사화 김세곤 (칼럼니스트) (0) | 2018.08.01 |
유자광전 (柳子光傳)을 지은 남곤 김세곤 (칼럼니스트) (0) | 2018.08.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