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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손과 무오사화

남곤이 지은 유자광전 (柳子光傳)

남곤이 지은 유자광전 (柳子光傳)

 

 

유자광은 부윤(府尹) 유규(柳規)의 서자인데, 몸이 날래고 힘이 세며 원숭이같이 높은 곳을 잘 타고 다녔다. 어려서부터 무뢰자(無賴子)가 되어서 도박을 하여 재물을 다투고, 새벽이나 밤에도 노상에 다니며 놀다가 여자를 만나면 붙들어서 강간하곤 하였는데, 유규는 미천한 소생으로 이같이 광패하다 하여 여러 차례 매를 때리고 자식으로 여기지 아니하였다. 처음에 갑사(甲士)에 소속되어 건춘문(建春門) 파직(把直 지키는 군사)이 되었다가 상소하여 자천(自薦)하니, 세조는 그 사람됨을 장하게 여겨 발탁하여 등용하였다. 또 무자년의 변을 알린 공으로 훈봉(勳封)을 받고, 이어 1품계에 뛰어올랐으므로 항시 호걸의 선비라고 자처하였는데, 그 성품이 음흉하여 사람을 잘 해치고자 하였고, 사람이 재능이 있어 이름과 은총이 자기보다 나으면 반드시 모함하였다. 일찍이 한명회(韓明澮)의 집이 귀하고 성하게 되는 것을 시기하더니, 성종이 간하는 말 따르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 남다른 언론으로 성종의 좋아하는 바를 얻고자, 이에 한명회가 제멋대로 날뛰려는 뜻이 있다고 상소하였으나 왕은 죄를 주지 아니하였다. 뒤에 임사홍(任士洪)박효원(朴孝元) 등과 더불어 현석규(玄錫圭)를 배제하려다가 오히려 패하여 동래(東萊)로 귀양갔었는데, 얼마 지난 뒤에 놓여 돌아왔다. 그러나 왕은 난정(亂政)의 사람임을 알고 다만 훈봉(勳封)의 일은 주어도 정치에 대한 임무는 맡기지 않았다. 유자광이 왕의 은총을 얻고자 못하는 일이 없었으나, 끝까지 얻은 바가 없어서 불만스러운 마음을 품고 있던 중에 이극돈(李克墩) 형제가 조정에서 권세를 잡고 있어서 자기의 일을 도와줄 만한 것을 알고 몸을 굽히어 아부하여서 서로 깊이 결탁되었다. 언젠가는 함양군에 가서 시를 짓고 군수에게 부탁하여 현판에 새기어 벽에 달게 하였는데, 그 후 김종직이 이 고을 군수로 와서 말하기를, “자광이란 자가 어떤 놈이기에 이런 현판을 달았느냐.” 하고, 그 현판을 불사른 일이 있었다. 유자광은 이를 갈며 원한을 품었는데, 김종직이 왕의 총우가 융성하자 유자광은 도리어 스스로 교분(交分)을 청하였고, 종직이 죽어서는 만사를 지어 곡하였으며 심지어 왕통(王通)과 한유(韓愈)에까지 비교하였다.

 

김일손은 일찍이 김종직에게서 수업하였고, 벼슬이 헌납이 되어서는 권귀를 피하지 않고 곧은 말을 하기 좋아할 뿐 아니라, 또 이극돈과 성준(成俊)이 서로 더불어 알력하여 장차 우이(牛李)처럼 당파를 이루려한다고 극론하여 상소하니, 극돈이 크게 노하였다.

 

사국(史局)을 열게 되자, 이극돈이 당상관으로 있으면서 김일손의 사초를 보게 되었는데, 그 글에 자기의 허물이 모두 실려 있고, 또 세조조의 사기를 썼으므로 이극돈은 이 기회에 원수를 갚으려고 생각하였다. 하루는 사람을 물리치고 총재관 어세겸(魚世謙)에게 말하기를, “김일손은 선왕을 모함하였으니 신하의 도리로 이같은 것을 보고 왕(연산군)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옳겠습니까. 나의 생각으로는 사초를 봉해서 아뢰고 임금의 조처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 우리에게 후환이 없겠습니다.” 하니, 어세겸은 놀라서 아무 대답을 하지 아니하였다. 그 후 오래 있다가 다시 유자광에게 상의하니, 자광이 팔을 걷어올리며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의심이나 할 일이겠는가.” 하고, 곧 노사신(盧思愼)윤필상(尹弼商)한치형(韓致亨)에게 가서 먼저 세조의 은총받은 이야기를 하였다. 이는 사신이나 필상은 세조가 총애하던 신하요, 치형은 궁중과 연척이 있었으므로, 그렇게 말하면 반드시 자기의 말을 따라줄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과연 3명은 모두가 좋다고 호응하고 같이 차비문(差備門)에 가서 도승지 신수근(愼守勤)을 불러내어 오래도록 귓속말을 하더니 이내 아뢰었다. 처음에 신수근이 승지가 되려 할 때에 대간과 시종들이 외척으로 득권의 조짐이 있다 하고 불가함을 역간하였으므로, 수근이 원한을 품고 항상 사람에게 말하기를, “조정은 문신의 장중 물건이냐.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이란 말이냐.”한 적이 있었다.

 

이때를 당하여 여러 원한이 모두 모여 있고, 이뿐 아니라 왕도 시기하고 난폭하여 학문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더욱 문사를 미워하며 이에 말하기를, “문사들이 왕을 능멸히 하여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자들은 모두 그 무리들이다.” 하고, 항시 답답한 심정으로 한번 시원스럽게 해치우려 하였으나,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있는 처지였는데, 유자광이 아뢰는 말을 듣고, 국가에 충성하는 것이라 하여 특히 후하게 장려하고 대접하였다. 명하여 남빈청(南賓廳)에 가두고 국문하며, 내수(內豎) 김자원(金子猿)에게 출납을 맡게 하곤 기타 사람은 관여해 알지 못하게 하였다.

 

유자광은 옥사를 자임하고서 매양 김자원이 전교(傳敎)할 때는 반드시 그 앞에 나가서 구부리고 공손한 태도를 취하며, 전교의 내용이 만일 엄하게 처리하라고 하면 스스로 왕의 뜻을 얻은 듯이 기뻐하고, 다시 부복하며 사례하고 물러와서는 흔흔히 자부하는 기색을 띠고서 좌중에서 큰소리로 말하기를, “오늘은 조정을 고쳐 벌이는 때이다. 모름지기 이같이 큰 처치가 있어야 할 것이니 보통 죄로 다스리는 것은 부당하다.” 하고, 또 왕에게 아뢰기를, “이 사람의 도당이 매우 번성하여 무슨 변이 있을지 모르니 마땅히 엄하게 방비해야 한다.” 하고, 이에 금위병(禁衛兵)을 뽑아 궁문 안팎을 파수보게 하여 출입을 엄하게 조사하게 하고, 또 죄인들이 국문에 나올 때에도 군사로 하여금 좌우에서 압송하게 하며, 하옥할 때에도 이같이 하게 하였다. 그런데도 자광은 치옥(治獄)이 조금이라도 해이하여 모두 자기 뜻과 같지 아니할까 염려하여 날마다 단련하는 방법을 모의하였다. 하루는 소매 속에서 한 권의 책을 꺼집어냈는데, 바로 김종직의 문집이었다. 그 가운데 조의제문과 술주시(述酒詩)를 지적하여 추관(推官)들에게 두루 보이며 말하기를, “이것은 모두 세조를 지적하여 지은 것이며, 김일손의 죄악은 다 김종직의 가르침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하며, 스스로 주석을 만들고 글귀에 따라 풀어서 임금이 쉽게 알게 하였다. 이어서 아뢰기를, “김종직은 우리 세조를 모함했으니 그의 무도한 죄는 대역죄로 논해야 하며, 또 그가 지은 글은 세상에 유전시켜서는 안 되니 모두 불살라버리자.” 하니, 왕은 그대로 따랐다. 무릇 김종직의 시문을 가지고 있는 자는 3일 내에 각각 자수 납입하여 빈청 앞뜰에서 불사르고, 각 도의 관사에 시 지어 써서 단 현판은 그 고을 관장으로 하여금 철회하게 하였으며, 또 성종 때에 환취정(環翠亭)의 기문을 김종직이 써서 현판을 달았는데 아울러 철회할 것을 청하였으니, 이것은 전자 함양(咸陽)의 원한을 갚은 것이다. 그리고 유자광은 이 기회에 왕의 노여움을 타서 일망타진할 계획으로 필상 등에게 눈짓하며 말하기를, “이들의 죄악은 신하된 자로서 불공대천의 원수이니, 그 당파를 철저히 조사해서 일체 캐 없앤 후에야 조정이 맑아질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그 잔당들이 다시 일어나 멀지 아니하여 화란을 일으킬 것이다.” 하니, 좌우에서는 묵묵히 있었으나, 사신이 손을 흔들며 저지하며 말하기를, “무령(武靈)은 자광은 무령 부원군에 봉해 있었다. 어찌 이렇게까지 극언을 하오. 홀로 당고(黨錮)의 옛일을 들은 일이 없소. 당파를 금고한 것이 날로 심하여 사류가 자취를 용납할 곳이 없더니, () 나라가 곧 따라 망하였소. 청론(淸論)은 마땅히 조정에 있어야 하오. 청론이 없어지는 것은 국가의 복이 아니오. 무령은 어찌 그릇된 말을 하오.” 하니, 유자광이 다소 주춤거렸으나 그래도 고집하여 마지아니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무릇 옥사(獄辭)에 아뢴 것은 사사(史事)만을 처리해야 하는데, 지금 사사에 관계 없는 지엽까지 죄로 다루어 그 수가 날로 늘어나니, 우리의 본의가 아니다.” 하니, 유자광이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죄를 정하는 날에는 노사신의 말에 따라 행하였다. 그날은 낮이 밤같이 어둡고 퍼부어대듯 비가 쏟아졌으며, 사나운 바람이 동남편에서 일어나 큰 나무가 자빠지고 돌과 자갈이 마구 날리니, 성중 사람이 모두 벌벌 떨고 엎어지곤 하였다. 그러나 유자광은 만족스러워하며 의기양양히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로 그 위세가 중외에 대단하였으나, 조정에서는 그를 독사와 같이 보고 감히 그의 뜻을 저항할 자가 없었으며, 또 유림은 기가 꺾여 벌벌 떨었고, 학사(學舍)에서는 숙연하여 여러 달 동안 글을 읽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부형들은 서로 경계하며 말하기를, “학문은 과거에 응시할 수 있으면 족할 것이니, 무엇 때문에 많이 배울 필요가 있겠느냐.” 하였는데, 유자광은 스스로 훌륭한 계책이라고 생각하여 다시 기탄하는 것이 없었고, 이익을 좋아하고 수치심이 없는 무리와 쫓아가서 아부하는 자가 문에 가득하였다. 식자들은 가만히 탄식하여 말하기를, “무술년의 옥사는 정류(正類)가 사당(邪黨)을 공멸하더니, 무오년의 옥사는 사당이 정류를 무함하여 20년 동안에 11패 하여, ()와 난()이 잇따랐다.” 하였다.

 

대개 군자가 형벌을 시행함은 항상 지나치게 너그러운 데서 잘못되고, 소인의 보원(報怨)은 반드시 잔멸하고서야 그만둔다. 가령 무술년에 군자가 그 율()을 다하였으면 어찌 오늘의 화가 있겠는가.

 

이 전기는 남곤(南袞)이 유자광의 죄악을 쓰는 데 지극히 다해서 남음이 없더니, 기묘년(1519)에 이르러서는 유자광이 한 일을 모방하여 밤에 북문(경복궁 신무문)을 열게 하여 당시 깨끗한 선비들을 한 그물로 다 없앴으니, 그 한 짓을 찾아보면 무오년(1498) 일보다 심한 것이 있다.

 

이것은 남곤이 이 전을 지으면서 스스로 자기의 죄악을 적은 것이다. 소인의 심정을 후일에 폭로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한 번 읽으면 자신도 모르게 팔뚝을 걷어붙이게 하나, 무오년 화가 일어난 근원을 알고자 하면 이 전이 없을 수 없으므로 이제 우선 그 이름은 빼고 이 전을 기록해서 소인의 경계가 되게 하노라.

柳子光傳 - 남곤 저

子光 府尹 柳規之孼子也 趫捷多力善緣高如猿狖狀幼爲無賴子博奕爭財物晨夜浮遊路上遇女則捽而淫之規以其所出微又其從悖如此屢榜橽不之子初屬甲士把直建春門上疏自薦世祖壯其爲人擢用之又以戊子告變功受勳封躐取一品階常自稱豪傑之士性陰賊害物人有才能名寵出己上者必搆陷疾韓明澮門戶貴盛又見成宗方喜於納諫欲以奇論中上所好乃疏韓明澮有跋扈之志上不之罪後與任士洪朴孝元等欲擠玄錫圭謀敗流東萊尋放還然上知其亂政之人但復勳封而已未嘗授治事之任子光窺冀恩澤爲計無所不至而竟不得售心常怏怏見李克墩兄弟當朝秉權知其足以濟己事便傾身附之深相要結嘗遊咸陽郡作詩屬郡宰鏤板而懸諸壁及金宗直守是邑曰何物子光乃爾懸板耶子光恚恨切齒以宗直寵遇方隆反自納交其卒也爲挽而哭之至比於王通韓愈金馹孫嘗受業於宗直及爲獻納好盡言不避權貴又疏論克墩與成俊交相傾軋將成牛李之黨克墩大怒及開史局克墩爲堂上見馹孫史草書己惡甚悉又書世祖朝史克墩欲因此報怨一日屛人語摠裁官魚世謙曰馹孫毀先王臣子見如此事不聞於上 燕山 可乎吾意謂封其史草以啓聽上處置則於吾屬無患矣世謙愕然不答居久之乃謀於子光子光攘臂曰此豈可疑之事乎卽往見盧思愼尹弼商韓致亨先敍受恩世祖蓋思愼弼商世祖寵臣致亨族連宮掖料其必從己故語之三人者果皆從之俱詣差備門內呼都承旨愼守勤耳語久乃啓之初守勤之爲承旨也臺諫侍從以爲外戚得權之漸力諫不可守勤銜之常語人曰朝廷是文臣掌中物我輩何爲至是群怨交集王又猜暴不喜學問故尤惡文士乃曰要名凌上使我不得自由者皆此輩也常鬱鬱不樂欲一施快而未敢下手及聞子光等所啓以爲忠於國家奬待特厚命於南賓廳鞫囚令內豎金子猿掌出納餘不得預聞子光以獄事自任每於子猿傳敎時必進當其前曲爲恭謹之態其傳敎之辭若涉嚴刻則自以爲得上意更加俯伏若稱謝之爲者聽訖而退欣欣有自負之色乃於座中大言曰今日是朝廷改排之時須有如此大處置不宜尋常以治之也又啓曰此人徒黨甚盛變不可測防護宜須嚴密乃抄禁衛兵把截宮門內以嚴出入囚人就鞫時亦令軍士左右押行其下獄亦如之子光猶慮治獄漸弛未盡如意日夜謀所鍛鍊者一日自袖中出一卷書乃金宗直文集也摘其中弔義帝文與述酒詩遍示諸推官曰此皆指世祖而作馹孫之惡皆由宗直誨而成之也自爲註釋逐句而解之令王易之仍啓曰宗直詆毀我世祖其不道之罪宜論以大逆其所爲文不宜流傳並皆燒毀王從之凡藏宗直詩文者令於三日內各自首納焚於賓廳前庭其諸道館舍留題懸板令所在撤毀成廟嘗命宗直撰環翠亭記掛在楣間並請撤之所以報咸陽之怨也子光欲乘王怒一網打盡之計目弼商等曰此人之惡凡爲臣子者不共戴天之讎當究問其黨與一切鋤去然後朝廷方得淸明不爾則餘黨復起禍亂之作不久矣左右默然思愼搖手止曰武靈 子光封武靈府院君 何至爲此言耶獨不聞黨錮之事乎禁網日峻使士流無所容跡而漢隨以亡淸論宜在朝廷淸論之亡非國家之福武靈何言之謬耶子光少沮然猶執持不已思愼曰凡獄辭所啓爲史事耳今枝葉蔓引不干於史事者囚繫日衆無奈非吾輩本意乎子光不悅及定罪之日從思愼議是日晝晦雨下如注大風從東南起拔木飛沙城中人庶莫不顚仆股戰子光意滿氣得揚揚而歸家自是威行中外朝廷視之如毒蛇莫敢忤其意儒林喪氣重足側目學舍蕭然數月之間無讀誦聲父兄相戒曰學足以應科擧則止何用多爲子光方自謂得計無復顧忌嗜利無恥之徒趨附者盈門識者竊嘆曰戊戌之獄正類攻邪黨戊午之獄邪陷正類二十年之間一勝一敗而治亂隨之大抵君子之用刑也常失於寬緩小人之報怨也必殘滅乃已使戊戌君子盡用其律豈有今日禍乎此傳南衮書子光罪惡極盡無餘及己卯踵子光之事夜開北門使一時淸流一網打盡迹其所爲有甚於戊午是衮自作此傳自書己惡小人情狀暴露於後日令人一讀不覺振腕然欲知戊午起禍之源不可無此傳故今姑沒其名而錄其傳以爲小人之戒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