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의병의 고장 - 한국근대사와 한말 의병
* 장성군에서 ‘2015년 의병의 날’ 행사를 하다.
한국근대사(1860-1910)는 격동의 시대였다. 19세기 중반이후 1910년 일본의 한국 강제병탄까지의 50년간은 자주적 근대국가 수립의 꿈이 좌절된 치욕의 시기였다.
1862년 임술민란, 1863년 고종 즉위, 병인양요(1866년), 서원 철폐령과 신미양요(1871년) 그리고 강화도 조약(한일수호조약 1876), 임오군란(1882년), 갑신정변(1884년), 거문도 사건(1885년),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 갑오개혁(1894년), 을미사변(1895), 아관파천(1896), 독립협회(1896)와 대한제국(1897), 만민공동회(1898년), 러일전쟁(1904-1905), 을사늑약(1905.11.17), 국채보상운동 ․ 헤이그 밀사사건 ․ 고종퇴위와 군대해산 (1907), 안중근 -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1909.10.26), 1910.8.29 일제, 대한제국을 강제병합(경술국치)
이런 격동의 시대에 장성은 어떠했는가?
장성은 역사와 정신이 살아 있는 의향(義鄕)이다. 임진왜란 때는 남문창의를 하였고, 한말에는 호남의병의 중심지였다. 기정진의 위정척사 운동, 기우만의 의병투쟁과 기산도의 을사오적 처단,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가 호남의병을 이끌었다.
가. 기정진의 위정척사운동
노사(蘆沙) 기정진 (1798-1879)은 성리학자였지만 현실에 무관심하지 않았다. 1862년에 농민항쟁이 일어나자 임술의책(壬戌擬策)을 내놓았고, 1866년에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병인소(丙寅疏)를 올려 위정척사(衛正斥邪)운동에 불을 지폈다.
기정진은 1862년의 농민항쟁을 매우 심각하게 인식하였다. 삼정의 문란에서 그 원인을 찾은 노사는 농민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 양민(養民) 위주의 개혁을 요구하였다. 그는 지배층인 사대부들이 도탄에 빠진 농민들을 약탈하는 것은 외국의 도적과 다름없다고 비판하였다.
1866년에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점령하는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났다. 기정진은 1866년 8월16일에 상소하여 위정척사를 주장하였다. 그는 6가지 정책을 주청하였다. 이는 첫째, 외침으로 인한 민심의 동요를 막고 민심을 하나로 모으기 위하여 먼저 조정의 계책을 세우고, 둘째, 외국인과의 접촉에 대비하여 사령(辭令)을 잘 준비하고, 셋째, 육지와 바다의 지형을 잘 살펴야 하고, 넷째, 군사들을 훈련시키며, 다섯째, 널리 방책을 말을 구하며, 여섯째, 내치에 힘쓰고 외적을 막는 것이다. (고종실록 1866년 8월 16일자 참조. 이 상소는 9월12일에 상소한 이항로보다 한 달 빠르다.)
고산서원에는 기정진외에 그의 제자 8명이 배향되어 있다. 정재규, 정의림, 김석구와 그의 손자 기우만 등이 그들이다. 노사학파는 노사에게 글을 배운 제자가 600명이고 그들 제자의 제자까지 합하면 6천 여 명 에 이르는 대학단이었다. 특히, 호남의 의병 지도자 가운데 상당수의 인물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우리나라 근대사에 미친 영향을 짐작케 한다.
나. 동학농민혁명
1894년 1월10일에 전봉준이 주동한 고부농민봉기가 일어났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항거한 집단행동이었다. 그런데 안핵사 이용태는 사태 수습은커녕 조병갑을 옹호하고 봉기 주모자들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전봉준은 3월21일에 다시 봉기하였고, 백산에서 보국안민을 기치 旗幟로 ‘호남창의대장소 湖南倡義大將所’를 창설한 후에 황토현 전투와 4.23 장성 황룡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여세를 몰아 4월27일에는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전주성 점령에 놀란 고종과 민비 일파는 청나라에 진압을 요청하였다. 청군은 5월5일에 아산만에 상륙했고, 천진조약에 근거해 일본군도 인천으로 들어왔다. 외세 개입을 우려하여 전봉준은 전라감사 김학진과 교섭하여 5월7일에 화약 和約을 체결하고 자진 해산하였다.
사태가 진정되자 고종은 청·일 양군의 동시철병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6월21일에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정권을 수립했고, 6월23일에는 선전포고도 없이 아산만 앞바다 풍도에서 청나라의 함정을 공격하여 청군 1,100여명을 익사시켰다.
이어서 일본군은 7월1일에 아산·공주·성환 등지에 포진하고 있던 청군에 공격을 가하여 승리하고, 계속 북상하여 8월에는 평양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청군은 8월16일 밤 평양을 포기하고 압록강을 건너 후퇴했다. 이로써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잃었고, 일본은 한반도에서 우위를 점하였다.
일본이 청나라를 이겼다는 소식을 듣자 전봉준은 척왜(斥倭) 창의하였다. 2차 동학농민 봉기에는 동학교주 최시형도 총동원령을 내렸다. 9월 중순에 전봉준의 1만 농민군은 북상하여 충청도 · 강원도 · 경기도의 동학농민군과 공주에서 합류하였다. 남접과 북접 동학농민군은 4만 명이 넘었다.
그런데 이들은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세력과 싸워 처참하게 무너졌다. 동학농민군은 공주 우금치 일대에서 10.23-25일과 11.8-9일 두 차례에 걸쳐 50여 차례 혈전을 벌였으나 참패하여 겨우 5백 명만 살아남았다. 연발식 라이플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화승총의 농민군이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원평 · 장흥 · 광양 · 순천 등에서 최후 결전을 벌였지만 처절하게 진압되고, 전봉준 · 손화중 · 김개남 · 김덕명 등 동학농민군 지도부가 잇따라 체포되어 처형됨으로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하였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은 새야
녹두꽃이 떨어지면
부지깽이 매 맞는다.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 가나니
* 황룡 전투, 1894.4.23 장태 등장, 이학승과 경군이 죽음
선전관 증 좌승지 이학승 순의비 宣傳官贈左承旨李公殉義碑 (勉菴先生文集卷之二十五) 최익현 찬 1897년에 세움.
嗚呼。此長城府西十里莘峴。故宣傳官李公學承殉義之地也。曩在甲午。東賊猖獗于湖南。連陷郡縣。所過人民。殆魚肉。朝廷差洪啓薰。爲招討使。將兵擊之。公以壯衛營隊官從戎。留陣靈光。時賊徒數萬。盤據長之月坪。公領軍二百人。爲前鋒。夾水而戰。斬賊百餘。然寡不可敵衆。而大軍尙遠。於是賊渡水。三面圍迫。士卒遂潰。麾下士挽公請跳。公笑曰。丈夫死爾。不可臨難而苟活也。挺然獨立。罵賊不屈而死。卽四月二十三日也。雖古之杲卿。何以加焉。迨其反塟。遌賊於路。至有剖棺刺屍之變。公之尤其慘矣。賊未旋踵。墜馬自斃。豈非公精英之氣。不隨死而亡。有此靈驗者歟。事聞。特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命遣官致侑。錄其弟道承。爲金浦郡守。蓋非獨以慰忠魂於九原。實爲萬世樹民彜爲臣子勸也。至矣。鄕之人士相與言曰。昔朱,宋兩夫子。叙列忠義。雖微必書。如唐衛士李士龍之倫。亦皆著之簡編。况以公節義之磊落而可無識乎。將立石以表其忠。寢郞奇宇萬。倡其論。知府金星奎。助其力。儒生宋榮淳,朴萬升。幹其事。朴君以金漢穆所爲傳。北走八百里。徵文於不佞。不佞讀之未半。不覺淚潸然下矣。雖在異世。猶可激昂。况並時同朝耳目所逮者乎。盖嘗論之。人有五常。君親爲大。士有百行。忠孝爲先。所在致死。分定故也。而苟非辨於義者甚明。養於中者有素。則倉卒危迫之際。喪失本心。而忽不自知。其所惡有甚於死者多矣。公以移孝之忠。常懷慷慨之志。及遭王事多難之日。終能蹈白刃。喪其元而不悔。所謂疾風勁草。大冬寒松者。捨公而誰也。天高地下。日月照臨。閱千禩而不朽者。其惟李公之死節也歟。公字景習。成宗王子景明君謚貞敏公諱忱之後也。中葉有諱齊衡。文執義。諱端錫文參判贈吏曹判書號雙壺堂。俱以淸白孝行。享長川書院。於公爲七世,六世。五世諱復淵武統制使。曾祖武副揔管應爀。祖通德郞厚址。考武郡守鍾奎。公以睿陵壬子生。今上甲戌。登武科。筮仕武兼。歷都判經僉壯衛營哨官。兼帶宣傳官。卒年僅四十三。
銘曰。捨生取義。是云大節。士方平居。罔不揭揭。變故臨之。鮮能自立。公惟從容。內篤操執。成敗利鈍。所仗者忠。捐身爲國。無愧蒼穹。生行死歸。王心斯惻。何以贈之。銀臺顯職。龍江不渴。英風俱長。刻詞于石。昭示无彊。
* 1898년 흥덕 영학당 : 이화삼(1866~1910), 이사유 (1856-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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