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기우만,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키다
1895년 8월에 명성황후가 살해당하고 10월에는 단발령이 실시되었다. 유생들은 크게 반발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제천의 유인석을 필두로 ,안동의 권세연, 문경의 이강년, 선산의 허위, 장성의 기우만등이 거의(擧義)하였다.
1896년 2월에 송사 기우만(1846-1916)은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기우만은 고광순, 기삼연, 김익중, 이사유, 이주현, 고기주, 양상태, 기재 등과 함께 의병 200여 명을 거느리고 나주로 이동하였다. 나주에서 장성의병과 나주의병은 호남대의소를 창설하였고, 기우만은 호남대의소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기우만은 2월말을 기해 일제히 광주로 모이도록 하였다. 기우만은 광주향교인 광산관(光山館)에 본영을 설치하였다. 기우만은 광주부를, 이학상은 나주부를 장악하는 데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해남군수 정석진이 처형당하고 담양군수 민종렬이 체포되는 등 나주의병이 관군에 의해 무참하게 진압되었다. 더구나 선유사 신기선이 2월 27일 전주에 도착하여 기우만에게 고종의 칙유를 전달하자 기우만은 4월에 의병을 해산하였다.
이후 기우만은 칩거하면서 학문에 전념하다가 1905년에 을사오적을 죽여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고, 1909년에는 호남의병장 고광순, 기삼연, 김용구 등의 활동을 정리한 <호남의사열전>을 집필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목 놓아 울고 대숲에 굴을 파고 살았다.
라. 을사오적 암살단을 주도한 기산도
1905년11월17일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기산도(1878-1928)는 ‘을사오적(乙巳五賊)’ 처단의 기회를 노리다가 1906년 2월16일 밤에 이범석 · 이근철과 함께 군부대신을 지낸 이근택의 집에 잠입해 거사를 결행했다. 이 날 이근택은 11시 무렵에 침실로 들어갔는데 기산도 일행이 들어가서 한 명은 이근택의 팔을 손으로 잡고 다른 한 명은 칼로 찔렸다. 이근택이 재빨리 방안의 촛불을 끄자 일행은 칼로 이근택의 머리에서부터 어깨와 등 10여 곳을 마구 찔렀으나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하였다. 곧 일본 헌병과 순사들이 출동하였으나 기산도 등은 이미 현장을 벗어난 뒤였다. 그런데 기산도가 빠뜨린 인조수염이 단서가 되어 2월18일에 잡히고 말았다.
기산도는 2년 반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석방된 후에도 그는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모으는 등 민족운동에 헌신하다가 1920년에 다시 체포되어 5년의 옥고를 치렀다. 그는 기정진 문인인 기재의 아들이고, 1907년에 구례 연곡사에서 순절한 의병장 고광순(1848~1907)의 사위이다.
* 고광순의 불원복 不遠復 태극기
태극기 옆에는 “조선 말 전남 구례 일대에서 활약한 의병장 고광순이 사용한 태극기이다. 중앙에 불원복 不遠復이라는 글씨가 홍색으로 수놓아져 있다. 불원복은 머지않아 국권을 회복한다는 의미이다.”라는 설명이 있다.
고광순이 죽자 ‘매천야록’을 쓴 황현은 연곡사로 달려와 다음과 같이 애도하였고 해방 후에는 구례 군민들이 순절비를 세웠다.
연곡의 수많은 봉우리 울창하기 그지없네.
나라 위해 한 평생 싸우다 목숨을 바쳤도다.
전장터의 말들은 흩어져 논두렁에 누웠고
까마귀 떼 내려와 나무 그늘에 앉아있네.
나같이 글만 아는 선비 끝내 어디에다 쓸 것인가.
이름난 가문의 명성 따를 길 없다네.
홀로 서풍 향해 뜨거운 눈물 흘리니
새로 쓴 무덤이 국화 옆에 우뚝 솟았네.
마. 호남창의회맹소 맹주 기삼연
1895년 을미사변 이후 호남에서 의병운동에 앞장 선 인물이 기우만이었다면, 1905년 을사늑약 이후 호남지역 의병항쟁의 기폭제를 마련한 인물은 기삼연(1851-1908)이었다.
장하도다 기삼연
제비같다 전해산
싸움 잘한다 김죽봉
잘도 죽인다 안담살이
되나 못되나 박포대
이 노래는 호남지역에 불리어졌던 의병가로 당시 호남지역 의병항쟁의 실상을 반영하고 있다.
여기서 본명이 전수용인 해산(海山)은 호남창의회맹소의 참모였고, 본명이 김준(金準)이고 자가 태원(泰元)인 죽봉(竹峰)은 호남창의회맹소의 선봉이었다. 안담살이는 보성의 머슴 의병장 안규홍, 박포대는 본명이 박경래로 그가 총을 잘 쏘았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1907년 10월에 기삼연은 김익중 · 김용구 등과 함께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여 호남지역 의병항쟁을 주도하며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기정진의 재종질로서 1896년에 기우만이 주도한 장성의병에도 참여한 바 있으며 백마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는 1902년 5월에도 의병을 일으키려다 체포된 적이 있었다.
1907년 7월19일에 일제는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8월 1일을 기하여 대한제국 군대마저 강제로 해산하였다. 정국은 혼란과 암울 그 자체였다.
1907년 9월 29일 기삼연은 마침내 수연산 중턱 석수암에서 수백 명의 동지들과 함께 ‘의를 들어 적을 토벌할 것(擧義討賊)’을 맹세하고 의병봉기의 횃불을 올렸다. 의병부대의 명칭은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라고 정하였다. 맹주에는 기삼연, 통령에 영광의 김용구, 선봉에 나주의 김준(후에 김태원이라 했다), 중군에 이철형, 후군 함평의 이남규, 참모에 김엽중· 김수봉, 종사에 김익중 · 서석구 · 전수용, 운량에 김태수, 총독에 백효인, 감기 이영화, 좌익에 김창복, 우익에 허경화, 포대에 김기순 등이었다.
이들의 활동은 1907년 10월말에 시작하여 1908년 1월말까지 계속되었고, 2월2일 기삼연이 체포됨으로서 사실상 막을 내렸다.
기삼연 의병부대는 1907년 11월1일 고창의 일본 경찰을 20여명 죽이고 고창읍성에 입성하였고, 12월7일에는 법성포를 습격했다. 12월9일에는 장성우편국을 파괴하고 우편소장을 처형했다.
이후 영광, 나주, 담양, 고창, 함평등지를 습격하여 일본 경찰 및 일진회 회원을 죽였다.
1908년 1월 30일 기삼연은 의병부대를 이끌고 담양 금성산성으로 들어갔다. 이 때 일병들이 기습 공격을 가해 왔다. 기삼연 의병은 밤새 싸웠으나 30여명이 전사하고 30명이 부상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기삼연도 부상당한 환부가 악화되어 군무를 통령인 김용구에게 일임하고, 순창군 복흥면 조동의 집안 동생 기구연의 집으로 몸을 숨겼다.
1908년 2월 2일 설날에 일병 20여 명이 들이닥쳐 집안을 수색하였다. 처음에는 기삼연을 발견하지 못하였으나 쌀가마 밖으로 나온 버선을 보고 기삼연을 체포하였다.
이 날 선봉장 김준 부대는 창평 무동촌에서 일본군 토벌대장 가와미츠와 부하 2명을 죽이고 1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다. 기삼연의 체포 소식을 들은 김준은 기삼연을 구출하기 위해 정병 30여 명을 이끌고 경양역까지 추격했으나 기삼연은 이미 수감된 뒤였다.
기삼연 구출 작전을 알아차린 일본군은 2월3일에 재판 절차도 없이 기삼연을 광주천변 백사장(현 광주공원 앞)에서 총살하였다. 기삼연의 처형 소식을 들은 광주 사람들은 설인데도 불구하고 부녀와 아이들은 화려한 의복으로 거리에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항일 호남의병 수장을 잃은 광주 민중들의 슬픔은 컸다.
기삼연은 죽기 직전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싸움터에 나가 이기지 못하고 먼저 죽으니, 出師未捷身先死,
일찍이 해를 삼킨 꿈은 역시 헛것이었나. 谷日腹年夢亦虛
기삼연이 죽고 나서도 김태원, 전해산, 심남일. 안규홍, 양진여, 오성술 등은 의병활동을 계속하였다.
1908-1909년 사이에 호남의병들은 전국적으로 가장 활발하게 의병투쟁을 하였다. 일제 측 자료에 따르면, 1908년 호남의병들은 일본 군경과 교전횟수및 교전의병수에서 전국대비 25%와 24.7%를, 1909년에는 47.2%와 60%를 차지하였다.
한마디로 호남의병은 의병항쟁 최후의 불꽃이었고, 일본에게는 대한제국을 집어삼키는데 있어 마지막 걸림돌이었다.
1909년 7월6일에 일본각의는 한일병탄 건을 통과시켰다. 일본은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강제병합하기로 하고 병탄을 위한 준비 작업을 착착 진행하였다. 그 중 하나가 ‘남한폭도 대토벌작전’이다.
사실상 호남의병 대학살이었던 이 작전은 1909년 9월1일부터 10월25일까지 이루어졌는데, 일본군 2개 연대 2,300명과 군함 10척이 동원되었고 103인의 의병장과 4,138명의 의병이 피살되거나 체포되었다.
* 애국계몽운동
o 창평 영학숙 : 1906년에 춘강 고정주 (규장각 직각) 설립, 학생 6명(고정주의 아들 고광준, 사위 김성수, 고하 송진우, 장성의 김시중, 영암의 현준호, 장성의 김인수), 이어서 고정주는 창흥의숙(1907),창흥 보통학교(1911)를 설립함
o 호남학회(1907년 7월 설립 112명 모임. 1910년 8월 해체)
- 호남지방 교육진흥 지원, 서울에 유학 온 호남출신 학생 후원, 학교설립운동, 호남학보 발간 (발행인: 이기)
-고정주(高鼎柱)·강엽(姜曄)·강운섭(姜雲燮)·백인기(白寅基)·유희열(劉禧烈)·박영철(朴榮喆)·최준식(崔俊植)·양회원(梁會源)·김낙구(金洛龜)·박남현(朴南鉉)·소석정(蘇錫政)·김봉선(金鳳善)·윤경중(尹敬重)·박해창(朴海昌)·김경중(金璟中)·이기(李沂) 등 전라남북도 출신 인사들이 참여, 회원수는 400여명 (1910년에는 565명)
o 대종교 (1910) : 나철 (나인영)
* 1910년 경술국치 - 매천 황현(1855-1910), 관내시부사 반학영(1840-1910)의 순국
새와 짐승이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무궁화 이 세상 망하고 말았구나.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옛 일을 생각하니
글 깨나 아는 사람 구실 참으로 어렵구나.
<매천야록>을 쓴 황현은 이런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을 하였다.
자결한 이는 황현뿐이 아니었다. 금산 군수 홍범식, 주러 공사 이범진, 승지 이만도, 환관 반학영, 승지 이재윤, 송종규, 참판 송도순, 판서 김석진, 정언 김재건, 감역 김지수, 의관 송익면, 영양 유생 김도현, 태인 유생 김천술등 의사 29인이 순국하였다.
* 관내시부사 반학영 - 장성 출신? 파주 출신? (순절지 파주에서 현창) - 대전 현충현 제2묘역에 있음.
* 餘言 .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 단재 신채호
.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역사뿐이다 - 연산군
< 의병 관련 참고문헌 >
o 김상기, 한말 전기 의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2009
o 박민영, 한말중기 의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2009
o 박은식 저, 김태웅 역해, 한국통사, 아카넷, 2012
o 장성군, 우리가 본받아야 할 장성 사람들, 제이애드, 2013
o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일조각, 2004
o 홍영기, 한말 후기 의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2009
o 역사문제 연구소,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 4, 웅진지식하우스,
o 한국근현대사학회 엮음, 한국근현대사 강의, 한울, 2013
o 이이화, 전봉준, 혁명의 기록, 생각정원, 2014
o 황현 지음 ․ 허경진 옮김, 매천야록, 서해문집, 2006
o 역사채널 e 지음, 역사 -세상을 깨우는 시대의 기록, 북하우스, 2013
'김세곤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탕왕의 반성 6가지, 김세곤 (0) | 2016.01.06 |
---|---|
탕왕의 반성 6가지 (1), 김세곤 (0) | 2016.01.04 |
의병의 고장 장성 (0) | 2016.01.03 |
선비 청백리 의병의 고장, 장성 , 김세곤 (0) | 2016.01.03 |
전라도 천년을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0) | 2015.12.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