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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칼럼

이완구 총리와 황희 정승 - 남도일보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김세곤 칼럼-이완구 총리와 황희 정승

오치남 기자  |  ocn@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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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4.29  18: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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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구 총리와 황희 정승

4월 20일에 이완구 총리가 성완종 리스트 파문으로 사의를 표명했다. 그런데 김진태 국회의원이 22일 CBS 라디오에서 이완구 총리를 황희 정승과 비교해 논란이 확산됐다.

김 의원은 “조선 시대 명재상으로 추앙받는 황희 정승이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뭐 간통도 하고 온갖 부정청탁과 뇌물 같은 이런 일이 많았지만 세종대왕이 이 분을 다 감싸서 명재상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김 의원의 발언에 황희 후손들은 뿔났다. 황희 정승과 이 총리를 ‘동급’으로 만들어 조상을 모욕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황희(1363~1452)는 부패 정승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다.
황희는 태종 때 대사헌, 이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런데 1418년에 양녕대군이 폐위되고 충녕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이를 반대하다가 남원에 유배되었다.
1422년 2월에 황희는 유배가 풀렸다. 상왕 태종은 세종(1397∼1450)에게 “황희의 지난 일은 덮어두라. 이 사람은 끝내 버릴 수 없다. 나라를 다스리려면 이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된다”라고 한 것이다.
1422년 10월에 60세의 황희는 의정부 참찬에 임명되었다. 이후 황희는 승승장구하여 1426년에는 우의정, 1427년 1월에는 좌의정이 되었다.

그런데 1427년 6월17일에 황희는 사위 서달이 신창현의 아전을 죽인 사건에 연루되어 우의정 맹사성, 형조판서 서선과 함께 의금부에 갇혔다. 황희는 사건을 무마하고자 신창현 출신인 맹사성에게 부탁을 하였고, 사건은 은폐·조작되어 서달의 종이 죄를 뒤집어썼다. 형조도 가담하였는데, 세종이 사건을 살피다가 사헌부에 재조사를 시켜 전모가 드러난 것이다.
6월21일에 황희와 맹사성은 파직당하였으나, 세종은 곧 복직시켰다.
 

7월15일에 대사헌 이맹균이 상소하여 이를 문제 삼았다. 그러자 세종은 “그대들의 말한 것이 옳다. 그러나 대신을 진용퇴출(進用退出)시키는 일은 경솔히 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1년 뒤에 추문이 또 터졌다. 이번에는 뇌물 스캔들이었다. 1428년 6월14일에 집의 남지는 세종에게 황희가 역리(驛吏) 박용의 아내로부터 말(馬)한 필을 뇌물로 받고 박용을 비호하는 청탁성 편지 한 통을 써 주었고, 대제학 오승, 도총제 권희달, 도총제 이순몽도 뇌물을 받았다고 아뢰었다.
6월25일에 황희는 뜬소문이라고 사직을 청하였다. 세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에 대한 세종의 신임은 두터웠다.

그런데 1428년 6월25일자 실록에는 사신(史臣)의 평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는 자기의 종과 간통하는 것을 안 우두머리 종을 죽이고 황희의 집 마당 북쪽 토굴 속에 숨어 여러 해 동안 살았던 박포의 아내가 황희와 간통하였고, 박용의 아내가 말을 뇌물로 준 일은 허언(虛言)이 아니라고 적혀 있다.
1430년에 황희는 또 한 번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말 1천여 마리 이상을 폐사하게 하여 재물 손실과 근무태만 혐의로 투옥된 제주도 감목관 태석균의 치죄(治罪)에 개입하여 사헌부에 선처를 부탁한 것이다.

이러함에도 세종은 1431년 9월에 황희를 영의정에 임명하였다. 이후 황희는 여러 번 사직을 청하였으나, 1449년 87세로 그만 둘 때까지 18년간 영의정으로 일했다.
세종은 황희, 맹사성 등 삼정승에게 조정의 대소사를 처리하도록 하였다. 1436년에 세종은 왕권강화를 위해 태종이 도입했던 육조직할체계를 포기하고 의정부서사제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세종은 창조에 몰두하여 1441년에 측우기 발명, 1443년에 훈민정음을 창제할 수 있었다.
황희는 익성(翼成)이란 시호를 받았다. 사려(思慮)가 심원(深遠)한 것이 익(翼)이고, 재상이 되어 종말까지 잘 마친 것이 성(成)이다.

한편, 황희의 졸기에는 청렴에 문제가 있다고 적혀 있다. (문종실록 1452년 2월 8일) 성품이 지나치게 관대하여 제가(齊家)에 단점이 있었으며, 청렴결백한 지조가 모자라서 정권을 오랫동안 잡고 있었으므로, 자못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난이 있었다.
단순 비교는 오류를 낳는다. 거짓말 릴레이로 국민을 헛웃음 치게 한 사퇴총리 이완구가 흠결은 있지만 세종시대를 이끈 황희 정승과 결코 동급일 수는 없다. <호남역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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