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세곤 칼럼

시모노세키 조약과 춘범루 春汎樓

<김세곤 칼럼>

 

 

시모노세키 조약과 춘범루 春汎樓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895417일에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 청나라 이홍장(李鴻章 1823-1901)은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에게 무릎을 꿇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빌미가 되어 청일전쟁이 시작 된 지 8개월 20일 만이었다. 그리하여 청나라는 조선에서의 종주국 지위를 상실하고, 요동반도와 대만 · 팽호도할양과 은 2억 냥을 배상하는 조약에 조인하였다.

 

지난 2월에 부관페리를 타고 시모노세키 여행을 하였다. 먼저 찾은 곳이 아카마 신궁 옆에 있는 춘범루 春汎樓이다. 춘범루 입구에는 사적 춘범루 · 일청강화담판장이란 표석이 있다. 오른 편에는 복어 동상도 있다. 춘범루는 복요리 1호점이자, 요정 겸 여관인데 이토는 이곳을 자주 찾았다. 여기에서 만난 기생 우메코는 그의 두 번째 부인이 되었다.

 

춘범루앞에 일청강화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으로 들어갔다. 가운데 홀에는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강화회의장이 재현되어 있다. 기념관 삼 면 벽에는 전시물이 여러 개 있다. 일청강화회의 개요, 조약전문, 조약 체결 당시의 춘범루와 이홍장이 머문 인접사 · 회담장 사진 그리고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의 글씨와 사진 등이 걸려 있다.

 

이홍장이 쓴 글씨는 海岳煙霞(해악연하)’이다. 산악과 같은 큰 바다에 안개와 노을. 글귀는 태평양 바다 풍광 속 흥취를 드러낸다. 하지만 일본의 군사력에 굴복한 청나라의 체념 어린 모습으로 비춰진다.

 

 

그러면 일청강화회담의 전개과정을 살펴보자. 1895319일 시모노세키에 청의 전권대신 이홍장이 도착했다. 이 당시 일본은 북경 진격을 앞두고 있었다. 청나라가 일본에 패한 이유는 부패였다. 북양함대는 청나라 해군의 위용을 자랑하였으나 사실은 빈 껍데기였다. 전쟁을 앞둔 청나라 함대에는 사용가능한 포탄이 단 세발밖에 없었다 한다. 청나라의 실세인 여제(女帝) 서태후가 해군 예산을 이화원 조성에 모두 전용한 결과였다.

 

320일에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는 춘범루에서 제1차 강화회담을 시작했다. 10년 전 갑신정변의 실패로 이토가 텐진까지 달려가서 만난 지 10년 만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입장이 바뀌었다. 이홍장은 임시 휴전부터 제안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논의해 보고 회답하겠다고 응수했다. 공식회담 후 이홍장과 이토는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홍장은 10년 전 첫 만남을 회상하며 그동안 일본이 성취한 눈부신 발전을 극구 칭찬했다. 그 발전을 이끈 이토 히로부미도 칭찬했다. 이토는 덤덤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321일 오전에 이홍장은 숙소를 인접사 引接寺로 옮겼다. 당시 73살이었던 이홍장은 배에서 생활하는 것을 힘들어 했다. 이 날 오후에 제2차 강화회담이 속개되었다. 이번에도 의제는 휴전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휴전 조건으로 천진과 산해관을 일본에 양도할 것등 가혹한 조건을 제시했다. 회담은 3일 후에 다시 속개하기로 하고 끝났다.

 

324일 오후 3시에 제3차 회담을 속개하였다. 이홍장은 더 이상 휴전 문제를 논의하지 말고 강화문제를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휴전 문제는 아무리 논의해 보았자 해결될 것 같지 않아서 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다음 날 강화조건을 제시하겠다고 약속 하였다. 3차 회담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회담 후 이홍장은 춘범루를 나와 숙소인 인접사로 향하였다. 그는 가마를 타고 수행원들은 인력거를 탔다. 이홍장이 탄 가마가 모퉁이를 막 돌 때였다. 갑자기 괴한 한 명이 달려들어 권총을 발사했다. 이홍장은 왼쪽 광대 뼈 아래를 뚫고 들어가 왼쪽 눈 밑에 깊이 박혔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쓰고 있던 금테 안경에 총탄이 맞아 위력이 준 것이 행운이었다.

 

저격범은 26세의 극우주의자였다. 그는 끝까지 전쟁을 하여 청나라를 항복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강화회담을 저지시키기 위하여 이홍장을 저격한 것이다. 일본은 발깍 뒤집혔다. 천황이 성명을 발표하고 육군 군의총감을 보내는 등 법석을 떨었다.

 

이홍장이 총을 맞자 강화회담은 청나라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일본은 세계의 이목을 의식하여 기왕의 조건 보다 다소 양보한 것이다. 410일에 이홍장이 회담장에 다시 나왔다. 이후 협상은 급진전되어 417일 제7차 회담에서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런데 조약 체결 6일후인 423일에 러시아 ·프랑스 · 독일이 이른바 3국 간섭을 하였다. 3국은 일본에 요동반도 포기를 요구했다. 일본은 분노하였으나 3국을 상대로 전쟁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일본은 55삼국 간섭에 굴복하여 요동반도 반환에 동의했다.

 

한편 삼국간섭의 주역 러시아가 부상하자, 고종과 민비가 친러로 돌아섰다. 이러하자 일본은 민비를 살해하였다. 바로 을미사변이다.

 

이제 기념관을 나온다. 기념관과 춘범루 사이에 두 사람의 흉상이 있다. 일본 측 두 주역인 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와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의 흉상이다.

 

항구로 가는 길목에 이홍장 도 가 있다. 한글로도 표시되어 있다. 이홍장은 피습을 피하기 위하여 이 길을 따라 인접사를 오갔다 한다. 수모의 길이 역사 유적이 되었으니, 역사란 참 아이러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