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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기행

광주 금남로의 유래

 
 
 광주에는 금남로가 있습니다. 5.18 민주항쟁 역사의 현장이기도 히지요. 이 금남로는  정충신 장군의  군호를 따서 만들어진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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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6(선조 9)~1636(인조 14).
조선 중기의 무신.
정충신 /정충신 영정, 중요민속자료 제36호
정충신 사당 /정충신 사당, 충남 서산시 ...
북방 여진족에 대해 항상 경계하고 방비할 것을 주장했으며, 지략과 덕을 갖춘 명장으로 명성이 높았다.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가행(可行), 호는 만운(晩雲). 아버지는 광주 향청(鄕廳)의 좌수(座首) 윤(綸)이다. 처음 절도영에 속한 정병(正兵) 겸 지인(知印)으로 있다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 권율(權慄) 밑에서 종군했다. 권율의 장계(狀啓)를 가지고 의주 행재소(行在所)에 갔다가 이항복(李恒福)의 눈에 띄어 학문과 무예를 닦아 그해 겨울 무과에 합격했다. 1621년(광해군 13) 만포첨사(滿浦僉使)로 국경을 수비하면서 여진족들과 접촉한 뒤 장차의 우환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1623년(인조 1) 안주목사 겸 방어사를 겸임했다. 다음해 이괄(李适)의 난 때는 도원수 장만(張晩)의 전부대장(前部大將)으로서 반군을 황주·안현에서 물리쳐 난을 진압한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에 책록되었고 금남군(錦南君)에 봉해졌다. 이어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영변대도호부사를 지냈고 1627년 정묘호란 때 부원수로 종군했으며, 1630년 가도(島椵)의 유흥치(劉興治)가 의주를 침입했을 때 역시 부원수로 출전하여 물리쳤다. 1633년 조정에서 후금에 대한 세폐의 증가를 반대하여 단교(斷交)를 결정하자, 이에 반대하여 당진·장연에 유배되었다. 1634년 풀려나 포도대장·경상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천문·지리·복서·의술 등 다방면에 걸쳐 정통했고, 몸집이 작았으나 기상이 늠름했으며 청렴하여 덕장(德將)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에 얽힌 많은 설화가 전하는데, 무등산이 갈라지며 청룡과 백호가 뛰어나와 안겼다는 태몽, 이항복과의 인연, 임진왜란 때의 활약과 여진족을 다루는 영웅담 등이 한문야담집에 전한다. 광주광역시 경렬사(景烈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만운집〉·〈금남집〉·〈백사북천일록 白沙北遷日錄〉 등이 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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