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신안 흑산도 - 면암 최익현 |
"왜적을 물리치지 않으려면 내 목을 베라" 지장암에 새긴 '…洪武日月' 선명해 신비함 담은 '설화' 입에서 입으로 |
입력시간 : 2008. 01.02. 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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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다경진(多慶鎭ㆍ무안)까지 860리 길. 다경진에서 다시 소흑산(우이도)을 거쳐 대흑산까지 오는 동안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ㆍ1833~1906)이 가슴 속에 품은 것은 오직 시퍼런 도끼 한 자루였다.
1876년 조선이 일본과 맺은 강화도 조약을 면암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오불가척화의소(五不可斥和議疏)를 내세우며 도끼를 메고 광화문에 나가 엎드려 상소(일명 '도끼상소')했다. 면암은 일본과 화친할 경우 우환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는 점 등을 주장하고, '왜적을 물리치지 않으려면 차라리 자신의 목을 쳐라'고 외쳤다. 하지만 면암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흑산도 유배라는 중벌이 내려졌다.
절해고도 흑산도로 가는 배 위에서 저무는 해를 바라보는 면암의 심정은 미어졌다. 바다의 너울을 따라 흩어지는 선홍빛이 슬프게 출렁일 때마다 가슴 속 도끼가 날을 세웠고, 어억~억, 아픈 피를 토해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시나브로 수평선 아래로 기우는 해를 볼 때면 자신의 몸도 밑으로 밑으로 가라앉는 것 같아 앙가슴을 움켜쥐어야 했다.
강직성이 뛰어나 불의나 부정을 보면 참지 못하는 면암의 상소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1868년(고종 5년)에는 경복궁 중건을 중지할 것과 당백전(當百錢)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 대원군의 실정을 상소함으로써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관직을 삭탈당했다. 이어 1873년에는 서원철폐 등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고, 호조참판이 된 후에는 다시 대원군의 실정 사례를 낱낱이 열거하며 왕의 친정(親政)과 대원군의 퇴출 등을 노골적으로 주장함으로써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우이도를 거쳐 흑산면 진리마을에 여장을 푼 면암은 일신당(日新堂)이라는 서당을 지어 아이들을 지도하다가 다시 흑산면 천촌리(여트미)로 거처를 옮겨 마을 아래 바닷가에 오두막을 짓고 학동들을 가르쳤다.
면암은 면암집에 '대흑산도에 들어가서 서재를 정돈하고 현판을 일신당이라 했다. 마침 예닐곱 동자들이 조석으로 와서 글을 물으니 심히 귀향살이에 위로가 된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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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을 배우는 아이들 못지 않게 면암에게 큰 힘을 준 것은 지역민들의 따뜻한 시선이었다.
지역민들은 그를 서울에서 내려온 지식인으로 예우했고, 틈틈이 서울의 소식과 나라의 운명을 묻기도 했다.
그는 먹을 갈아 문집 '지장암기'에 지역민에 대한 느낌을 담았다.
'이 고장은 서울에서 수천리나 떨어져 날씨가 무더운 해양 가운데 있기 때문에 직방(職方ㆍ토지나 지도를 관장하는 관청)의 판도에는 그 존재가 그리 중시되지 않는 듯하지만 모두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흘러들어온 구족(舊族)들이고, 그 풍속도 소박하고 검약하여 사치스러운 태도가 없을뿐 아니라 서당을 세워 교육에 힘써서 준수한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면암은 흑산도의 삶에 안주할 수 없었다.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고, 아름다운 흑산도 절경을 돌아보아도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순간일 뿐이었다. 뉘엿뉘엿 해가 기울며 바다를 붉게 적실 때마다 날을 곧추세우고 달려드는 것은 언제나 가슴 속에 묻혀있던 도끼였다.
면암이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일본과 결탁하려는 간신들이었다. 면면히 이어온 자주국가, 독립국가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는 이들을 생각할 때마다 피가 거꾸로 솟으며, 당장이라도 배를 대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라의 앞날에 대한 걱정을 떨치지 못하던 면암은 천촌마을 입구의 바위에 석공을 시켜 '기봉강산(箕封江山) 홍무일월(洪武日月)'이라 새기고, 바위 이름을 주자의 '위아중지장(爲我重指掌)'이라는 시구에서 따온 지장암(指掌品+山)이라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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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봉강산 홍무일월'은 '이 나라의 금수강산은 고조선 시절부터 있어왔고, 이 나라의 해와 달은 조선 5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면암은 이를 통해 우리나라가 유구한 역사를 지닌 독립국가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현재 흑산도 진리마을에 '일신당'이라는 서당은 남아있지 않고 그 위치만 전할 뿐이다. 다만 일신당 터 앞에 작은 샘이 하나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를 면암과 관련해 '서당샘'이라고 부르고 있다.
일신당 터 뒷산을 오르면 면암이 아이들과 야외수업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남아있다.
또 천촌마을 입구 지장암에는 면암이 그토록 독립국가임을 강조한 글이 새겨져 있고, 지장암 바로 앞에는 지난 1924년 9월 그의 문하생 오준선, 임동선 등이 면암의 애국정신과 후학양성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면암 최선생 적려 유허비'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 많을 수록 전하는 이야기 역시 많아지는 것인가.
면암의 강직함과 높은 학식 때문인지 그의 숨결을 간직하고 싶은 후손들은 기인이나 도술을 부리는 신비한 인물로 만들어 입에서 입으로 전하고 있다.
'면암은 우이도의 '굴봉'에 올라 글을 읽고는 했다. 어느 날 굴봉에서 글을 읽는 데 갑자기 큰 비가 내리는 것이었다. 면암은 종이에 무엇인가 글씨를 써서 마을로 날려보냈고, 마을 쪽에서는 큰 삿갓이 떠올라 굴봉으로 올라갔다. 결국 면암은 그 삿갓을 쓰고 비를 피해 내려왔다.'
면암이 다경진으로 향하는 배에 오른 것은 1879년 3월이었다. 3년여의 유배생활을 마치게 된 것이다.
밤잠을 설쳤기 때문인가, 눈이 침침했다. 고개를 드니 옅은 안개가 내려 앉아 있었다. 둥싯 떠오른 해는 흐릿한 잔영만을 내비칠 뿐, 제 기를 발산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다경진으로 가는 동안 면암은 침묵했다. 자신이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관직에 들어간다고 한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많지 않을 것이었다. 또다시 상소를 올리고, 관직을 삭탈당하거나 유배를 가는 것이 정해진 순서일 터였다. 그렇다고 '조선의 내일'이 어찌될 지 알 수 없는 형국에 자신과는 상관도 없다고 뒷짐만 지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애가 타는 듯 미간을 찌푸린 면암은 해를 주시했다. 언제부터인지 안개는 짙어져만 갔고, 해는 그 뒤 어느 켠에 몸을 숨긴 채 보이지 않았다.
순간, 면암은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자신의 가슴 속에 묻혀있던 도끼가 다시 한 번 번쩍 날을 세웠던 것이다. 매일 저녁 선홍빛 햇살에 불끈 솟아오르곤 하던 도끼가 왜 갑자기 아침에 튀어나온 것인지는 면암 자신도 알지 못했다.
밀려드는 안개가 어지럽다고 느끼던 순간, 흐릿한 해를 주시하며 현기증을 느끼던 순간, 자신도 모르게 선홍빛으로 타오른 것은 다름아닌 자신의 눈빛이었다.
김만선 기자 mskim@jnilbo.com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최익현과 연관된 유배지 지도읍
■ 이재근 신안군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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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면암 최익현 선생의 또 다른 유적이 신안군 지도읍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그러나 지도에는 구한말 유학자들의 우국충정의 정신이 곳곳에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의 지도읍은 무안 해제와 연륙되는 1970년대 이전까지는 섬으로 존재했다. 또한 신안군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지도군이 1896년 신설되면서 군의 치소였으며, 향교가 설립되어 운영된 곳이었다.
지도는 구한말 위정척사파의 대표적인 학자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ㆍ1792~1868)에게서 영향을 받은 중암(重菴) 김평묵(1819~1888)과 면암 최익현이 구한말 이곳에 유배를 왔던 까닭에 유교유적들이 곳곳에 남아있기도 하다. 그 중 두류단과 주변 유적을 소개해 본다.
지도읍 감정리 백련동 두류산 정상부에 위치한 두류단(신안군 향토유적 제7호)은 1720년께 주자, 정여창, 김굉필 세 분을 모시는 정자를 세워 제향을 지내왔던 것에서 유래한다.
그 후 1914년 호남지방의 선비들이 그들의 학문과 사상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이항로, 기정진, 김평묵 세 분의 단비(가로 33㎝, 세로 68㎝)로 모시고 삼현단이라 칭하다가, 5년 뒤에 최익현 선생도 함께 모시면서 사현단이라 부르게 되었다.
광복 이후인 1948년 중암 김평묵의 제자였던 지도 출신의 나유영(羅有英) 선생을 단비로 모시게 되어 오선생단 또는 오선비라 불러지고 있다. 이곳에서는 음력 9월 15일 지도, 증도, 임자도, 무안 일대의 유림들이 모여서 선현들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있다. 한편 두류단 뒤편의 바위에는 최익현과 김평묵과 관련된 암각명문이 남겨져 있다.
흑산도에서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바위에 새긴 '기봉강산 홍무일월'의 의미와 유사한 '대명일월(大明日月) 소화강산(小華江山) 최익현서(崔益鉉書)' 란 글씨가 두류산에서 바다를 내려다 보는 위치의 바위에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가 유구한 역한 역사를 지닌 정통성 있는 국가임을 강조한 말이다.
그리고 인근에 '지제여운(智齊餘韻)' '중암유촉' '주기예(周幾張豫) 정일주직(程一朱直)' 등의 명문이 새겨진 바위들이 있다. 이는 중암 김평묵 선생이 지도에 유배 왔던 시절 학문을 배웠던 9명의 제자들이 마음을 모아 새긴 것으로, 최익현, 김평묵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화서 이항로 선생이 항상 마음에 새기고 있던 문구도 포함되어 있다.
지도군의 초기 역사를 설명한 '지도군지(智島郡誌)' 등의 기록을 근거해 볼 때 이 글씨들은 중암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그를 기리기 위해 면암 최익현 선생의 지시로 중암의 제자들에 의해 새겨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유서 깊은 두류단 유적 일대에는 김평묵과 최익현 관련 글씨들이 잘 남아 있어 유학관련 유적지로 잘 보전하고 널리 알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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