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의 봄은 3가지 모습이다 그 중에 하나가 1968년에 전개된 체코의 민주화운동이다. 둘은 프라하 봄 음악축제이고 셋은
영화 프라하의 봄이다.
프라하의 봄 /프라하의 봄(1968)
체코 사태라고도 한다. 1956년 소련 내에서 흐루시초프에 의한 스탈린 격하운동이 일어난 후에도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스탈린주의자인 노보트니 정권의 보수정책이 계속되었고, 1960년대의 정체된 경제에 대해 국민의 불만이 높았으며, 자치권을 제한받던 슬로바키아 민족의 감정도 악화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화에서 1968년 1월 총회에서 노보트니가 당 제1서기를 사임하고 개혁파인 두프체크가 그 자리를 맡아 국가 주요요직에 개혁파를 임명했으며, 4월에는 다음과 같은 행동강령을 발표했다. ① 재판의 독립, ② 의회제도의 확립, ③ 사전검열제의 폐지, ④ 민주적인 선거법제도의 창설, ⑤ 언론·출판·집회의 자유 보장, ⑥ 국외여행·이주의 자유보장, ⑦ 경찰정치의 종식, ⑧ 공업·농업 부문의 개혁 ⑨ 체코 슬로바키아의 동등한 권리에 의한 연방제 이행, ⑩ 자주독립에 대한 대외정책 추진, ⑪ 과거에 권리를 박탈당한 모든 시민의 완전한 복권 등이다. 두프체크는 이와 같은 개혁조치를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고 했는데, 언론·집회·출판 등이 자유화되면서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잠시 동안의 '프라하의 봄'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 사태가 동유럽으로 파급될 것을 우려한 소련군은 1968년 8월 20일 브레주네프 독트린을 앞세우고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5개국군 약 20만 명으로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해, 두프체크를 비롯한 개혁파 지도자들을 소련으로 연행했다. 이로써 프라하의 봄은 끝나고 1969년 4월 당 제1서기가 된 후사크에 의해 사태가 수습되었다.
프라하의 봄이 일어난 구시가지 광장 . 이곳에 소련 탱크가 진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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