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일손의 후손들

탁영집

 

 탁영집  김일손 문집

 

 

형태서지
권수제  濯纓先生文集
판심제  濯纓先生文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925年刊
권책  目錄ㆍ本集 8권ㆍ續集 2권 합 4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19.4×15.6(㎝)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도서번호  일산古3648-文10-93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17
 저자
성명  김일손(金馹孫)
생년  1464년(세조 10)
몰년  1498년(연산군 4)
 季雲
 濯纓子, 伊堂, 雲溪隱士, 少微山人, 咏歸學人, 臥龍樵夫, 磻溪居士
본관  金海
시호  文愍
 가계도
 金克一
 節孝先生
 金孟
 執義
 龍仁李氏
 刑曹參議 李讓의 女
 金駿孫
 直提學
 金驥孫
 佐郞
 金馹孫
 
 丹陽禹氏
 參判 禹克寬의 女
 金大壯(金駿孫의 子)  
 主簿
 禮山金氏
 參奉 金尾孫의 女

기사전거 : 濯纓先生年譜(1903年刊)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세조 10 1464 갑신 天順 8 1 1월 7일, 淸道郡 雲溪里 少微洞에서 태어나다.
성종 2 1471 신묘 成化 7 8 봄, 부친이 예문관 봉교로 부임하자 外家 근처인 龍仁 鴨皐里로 이사하다. ○ 玉樹精舍에서 형들과 함께 독서하다.
성종 9 1478 무술 成化 14 15 2월, 성균관에서 독서하다. ○ 3월, 丹陽 禹氏와 결혼하다.
성종 10 1479 기해 成化 15 16 8월, 仲兄 金驥孫과 漢城府 進士初試에 합격하다.
성종 11 1480 경자 成化 16 17 3월, 양친을 따라 雲溪로 돌아가다. ○ 9월, 密陽에서 居喪中인 金宗直에게 학문을 배우다. 이때 金宏弼ㆍ鄭汝昌 등 12명과 神交를 맺다.
성종 12 1481 신축 成化 17 18 2월, 김종직에게 韓愈의 글을 배우다. ○ 7월, 남효온과 龍門山을 유람하다. ○ 8월, 原州의 酒泉山으로 元昊를 방문하다.
성종 13 1482 임인 成化 18 19 10월, 庭試에 응시하여 두 兄의 장원급제를 위해 병을 핑계하고 退場하다. 이때 두 형이 1, 2등을 하다.
성종 14 1483 계묘 成化 19 20 9월, 부친상을 당하다. ○ 11월, 淸道 水也山에 장사 지내다.
성종 17 1486 병오 成化 22 23 봄, 淸道郡學이 되다. ○ 8월, 生員ㆍ進士가 되다. ○ 10월, 文科覆試에서 〈中興策〉으로 장원하다. ○ 12월, 承文院正字가 되다.
성종 18 1487 정미 成化 23 24 1월, 홍문관 정자가 되다. ○ 4월, 부인상을 당하다. ○ 9월, 부모 봉양을 위해 晉州牧學이 되다.
성종 19 1488 무신 弘治 1 25 3월, 牧使 慶太素 및 遊官諸公 21人과 矗石樓에서 修禊하고 序를 짓다. ○ 7월, 병을 핑계로 敎授職을 그만두다. ○ 9월, 舊室의 동편 臥龍峯 아래에 雲溪精舍를 세우고 이에 ‘臥龍樵夫’로 號를 삼다.
성종 20 1489 기유 弘治 2 26 4월, 藍溪에 가서 鄭汝昌을 방문하고 함께 頭流山을 유람하다.〈頭流紀行錄〉 ○ 6월, 예문관 검열이 되다. ○ 〈送崔玉果序〉를 짓다. ○ 7월, 忠淸道 木川에서 禮山 金氏와 결혼하다. ○ 사직소를 올리고 三事(酒色射)를 아뢰어 加資되다. ○ 朱溪君 李深源과 治道를 논하다. ○ 경연에 入侍하여 李胄와 함께 史官의 記事之規를 논하여 윤허받다. ○ 9월, 차자를 올려 治道에 관한 12事를 아뢰다. ○ 10월, 탄핵을 받고 金寧(金海)에 유배되었다가, 석방되어 田里로 돌아가다. ○ 11월, 遼東質正官이 되어 중국에 가다.
성종 21 1490 경술 弘治 3 27 1월, 烏蠻館에 머무르다. 이때 입고 있던 옷으로 周旺이 소장한 古畫 14幅과 바꾸다. ○ 2월, 귀국하다. ○ 3월, 駱山의 園亭을 하사받다. ○ 承政院注書가 되어 檢閱을 겸하다. ○ 金宗直의 〈吊義帝文〉을 史草에 싣다. ○ 4월, 史館과 本院의 일기를 참조하여 남효온의 〈六臣傳〉을 改撰하다. ○ 모친의 병으로 사직하다. ○ 5월, 김굉필과 伽耶山을 유람하고 釣賢堂에 머물며 講學하다. ○ 8월, 홍문관부수찬 지제교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이 되다. ○ 9월, 中興寺에 있던 金時習을 방문하다. ○ 성균관 전적이 되다. ○ 10월, 사헌부 감찰이 되다. ○ 11월, 陳賀使 書狀官으로 중국에 가다.
성종 22 1491 신해 弘治 4 28 2월, 禮部員外郞 程愈에게서 「小學集說」을 얻다. ○ 3월, 귀국하여 「소학집설」을 바치자, 상이 校書館에 명하여 中外에 간행ㆍ반포하도록 하다. ○ 사간원 정언이 되다. ○ 4월, 홍문관 수찬이 되다. ○ 5월, 龍驤衛司正으로서 「綱目」을 校讐하다. ○ 10월, 「강목」의 교수를 마치고 箋과 함께 올리다. ○ 忠淸都事가 되다.
성종 23 1492 임자 弘治 5 29 1월, 木川 別墅에 ‘竹林精舍’를 짓다. ○ 4월, 수찬이 되다. ○ 7월, 홍문관 부교리가 되다. ○ 8월, 성균관 直講이 되다. ○ 9월, 사간원 헌납이 되다. ○ 李克墩ㆍ成俊을 탄핵하여 파직시키다. ○ 사가독서하다. ○ 11월, 김종직의 시호를 ‘文正’과 ‘文忠’으로 논의하다.
성종 24 1493 계축 弘治 6 30 1월, 홍문관 교리가 되다. ○ 頒諭御史로 嶺南에 가다. ○ 3월, 密陽에 가서 김종직의 墓에 제사하다. ○ 5월, 서울로 돌아와 백성의 고통을 아뢰고 時政을 논하다. ○ 사헌부 지평, 홍문관 교리가 되다. ○ 7월, 사가독서하다. ○ 8월, 〈御製四十八詠詩〉에 和答하고 跋文을 짓다. ○ 9월, 〈秋懷賦〉를 짓다.
성종 25 1494 갑인 弘治 7 31 2월, 獻納이 되다. ○ 3월, 병조정랑이 되다. ○ 5월, 홍문관 교리가 되다. ○ 7월, 모친의 병으로 사직하다. ○ 9월, 이조정랑이 되다. ○ 11월, 本職으로써 兩館應敎, 經筵侍講, 史官編修, 春坊弼善을 겸하다. ○ 12월, 編修官으로서 史草에 이극돈의 醜行을 直書하다.
연산군 1 1495 을묘 弘治 8 32 3월, 戒辭 10條를 상소하다. ○ 사직소를 올리고 田里로 돌아가다. ○ 10월, 〈疾風知勁草賦〉를 짓다.
연산군 2 1496 병진 弘治 9 33 1월, 獻納이 되다. ○ 昭陵復位를 청하다. ○ 2월, 사직하고 雲溪로 돌아가다. ○ 3월, 모친상을 당하다.
연산군 4 1498 무오 弘治 11 35 1월, 〈遊月宮賦〉를 짓다. ○ 6월, 風疾이 있어 靑溪精舍에서 調養하다. ○ 7월, 김종직의 〈吊義帝文〉을 史草에 실은 일로 국문을 받다. ○ 7월 27일, 저자에서 權五福ㆍ權景裕ㆍ李穆ㆍ許磐과 함께 처형되다. ○ 楊州의 石橋에 가매장하다.
중종 1 1506 병인 正德 1 - 9월, 伸寃復爵되다. ○ 10월, 木川 鵲城山에 改葬하다. ○ 伯兄의 둘째 아들 金大壯이 奉祀하다.
중종 3 1508 무진 正德 3 - 8월, 水也山에 返葬하다.
중종 7 1512 임신 正德 7 - 9월, 홍문관 직제학에 추증되다. ○ 10월, 선생의 遺文을 구하라는 敎旨가 내리다.
중종 13 1518 무인 正德 13 - 2월, 자손을 錄用하게 하다. ○ 4월, 淸道의 儒生이 선생의 故宅인 雲溪精舍를 고쳐 紫溪祠를 세우다.
중종 14 1519 기묘 正德 14 - 2월, 문집이 初刊되다.
선조 11 1578 무인 萬曆 6 - 가을, 紫溪祠를 書院으로 만들다.
선조 41 1608 무신 萬曆 36 - 봄, 紫溪書院이 중건되다.
현종 2 1661 신축 永曆 15 - 4월, 도승지에 추증되고, 紫溪書院으로 賜額되다.
현종 5 1664 갑진 康熙 3 - 3월, 木川 竹林祠에 배향되다.
현종 9 1668 무신 康熙 7 - 5월, 문집이 重刊되다.
숙종 2 1676 병진 康熙 15 - 가을, 竹林祠가 道東書院으로 사액되다
순조 27 1827 정해 道光 7 - 문집이 三刊되다.
순조 30 1830 경인 道光 10 - 12월, 이조판서에 추증되다.
순조 34 1834 갑오 道光 14 - 6월, ‘文愍’(博聞多見曰文 使民悲傷曰愍)의 시호가 내리다.
헌종 4 1838 무술 道光 18 - 문집이 四刊되다.
고종 11 1874 갑술 同治 13 - 年譜가 처음 간행되다.
고종 40 1903 계묘 光武 7 - 本集ㆍ續集ㆍ年譜ㆍ年譜續이 간행되다.
- - 1925 을축 - - - 문집이 간행되다.
- - 1962 임인 - - - 石印本이 간행되다.

기사전거 : 濯纓先生年譜(1903年刊)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의 시문은 柳子光과 李克墩에 의하여 대부분 燒失되었다. 이는 〈吊義帝文〉을 史草에 넣고, 이극돈의 추행을 直書하였기 때문이다. 중종이 즉위하자 伸寃復爵되고, 1512년에는 校書館에 명하여 遺稿를 구하게 하였다. 이에 조카 三足堂 金大有가 若干卷을 수집하여 時諱에 저촉되지 않는 것을 바쳤다. 그 후 1519년 紫溪祠에서 경상도 관찰사 金安國이 木板本 2권 1책으로 간행하였다. 이때 金安國이 序를 지었다고 하는데 「濯纓集」과 「慕齋集」에는 실려 있지 않다.《초간본》 이 초간본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貴188, 한-46-가1767) 등에 소장되어 있으나 보존상태가 좋지 않다.
초간본에 완결이 많게되자 1668년 宋時烈의 序文을 받아 다시 木板本 6권 2책으로 간행하였다.《중간본》 이 중간본은 〈世系圖〉 등이 추가되고 초간본과 編次와 構成이 다르며, 頭註가 있다. 현재 서울대 규장각(奎4033) 등에 소장되어 있다.
그 후 舊本에 遺漏文字가 많고 板本에 완결이 많아 性潭 宋煥箕가 遺文을 添入하고 編次와 世系ㆍ凡例를 교정하여 〈世系〉ㆍ〈節孝門銘跋〉ㆍ〈三足遺詩〉를 附錄에 싣고 1827년에 趙寅永의 跋을 받아 木板本 7권 3책으로 간행하였다.《삼간본》 그런데 이 삼간본의 체제는 중간본을 거의 따랐으나, 초간본과 같이 頭註가 없다. 현재 장서각(4-6588) 등에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삼간본은 失板이 많아 글씨를 달리하여 追刻하여 책 모양이 不精하였다. 그러던 중 1834년 6월에 ‘文愍’의 시호가 내리자 삼간본에 請諡事蹟을 추가하고 다시 板을 새겨 1838년 士林들이 紫溪書院에서 木板本 8권 2책으로 간행하였다.《사간본》 이 본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무구재古3648-文10-282) 등에 소장되어 있다.
1903년에는 祀孫 金榮灝가 義城 縣監으로 있을 때 本集 3권ㆍ續集 1권ㆍ年譜 2권ㆍ年譜續 1권 합 7권 7책의 木板本으로 간행하였다.《오간본》 이 오간본은 〈賡進詩四十八詠〉과 詩ㆍ詞ㆍ疏ㆍ箚 약간 편을 수집하여 續集을 만들고, 世系圖ㆍ八高祖圖ㆍ師友錄ㆍ科榜錄ㆍ同僚錄으로 年譜續을 만들었다. 이때 舊本의 체제를 따랐으나, 〈世系〉와 先生의 諱日이 잘못된 것은 實蹟을 참고하여 宗議를 따라 개정하였다. 續集과 年譜의 간행으로 지금껏 禍를 염려하여 간행하지 못한 저자의 詩文과 行蹟이 비로소 전부 公刊되었다. 이 본은 현재 성균관대 도서관(D3B-1081a)에 소장되어 있다.
1925년에는 金榮灝가 다시 本集 8권ㆍ續集 2권 합 4책의 木板本으로 간행하였다.《육간본》 이 본은 오간본과 비교하여 저자의 詩文이 거의 수록된 점은 같으나, 年譜가 빠지고 〈請從祀聖廡疏〉 4편 등이 추가된 점이 다르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일산古3648-文10-93)에 소장되어 있다. 그 밖에 1962년 淸道의 紫溪書院에서 8권 3책의 石印本이 간행되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古3648-文10-33) 등에 소장되어 있다.
「濯纓先生年譜」는 1548년 조카 三足堂 金大有가 저자의 手筆日記와 자신의 見聞을 참고하여 雲門의 愚淵精舍에서 편집했으나 禍를 염려하여 간행하지 못하였다. 300여 년 뒤 春川에 사는 후손 金晉炯의 집에서 年譜草本이 나와서, 1874년에 洪淳穆의 序를 받아 비로소 2권 1책의 木板으로 서울에서 간행하였다. 그런데 原譜 간행에 참여했던 淸道의 族人 金昌潤이 고향에 돌아와 자신을 宗孫으로 하여 年譜를 改竄 간행하였으나 宗議와 儒生의 상소로 1902년 王命에 의하여 燒却당하였다. 이에 1903년 祀孫 金榮灝가 義城縣監으로 있을 때 重刊을 도모하여 柳道獻의 校正을 받아 年譜上ㆍ下, 年譜續上ㆍ下 합 4권 3책의 木板本으로 「탁영선생연보」를 1915년 서울에서 간행하였다.
본서의 저본은 1925年刊 오간본으로 국립중앙도서관장본이다.

기사전거 : 序ㆍ跋ㆍ重刊事實ㆍ年譜跋ㆍ年譜續跋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本集 8권ㆍ續集 2권 합 4책으로 되어 있다.
권수에는 1668년에 쓴 宋時烈의 序와 目錄이 실려 있다.
권1에는 賦 6편, 雜著 12편이 실려 있다. 賦는 小人이 정치를 문란하게 하고 임금을 오도하는 것을 탄식한 〈疾風知勁草賦〉와 같이 거의 時事에 대한 글이다. 雜著는 說ㆍ題ㆍ書ㆍ跋 등의 文體가 섞여 있다. 권2에는 序 7편이 실려 있다. 執政者를 諷諫한 〈送崔玉果序〉, 李穆이 道를 구하러 중국에 갈 때 전송한 〈感舊遊賦後序〉, 金寧 유배 시에 지은 〈贈山人知楫序〉 등이다. 권3에는 記 10편이 실려 있다. 堤川縣을 지나며 權景裕에게 지어 준 〈痴軒記〉, 盆山別墅에서 지은 〈涵虛亭記〉, 金海에 가서 지은 〈會老堂記〉 등 주로 地方을 유람하며 지은 것이다. 권4에는 哀辭 2편, 祭文 9편, 墓碣 3편, 墓誌 2편, 銘 7편이 실려 있다. 〈祭仲兄梅軒公文〉은 韓愈의 〈祭十二郞文〉과 비견된다는 평을 받은 글이고, 銘은 1493년 賜暇讀書 때 지은 것이다. 권5에 策 1편, 錄 1편, 書 1편, 詩 5제, 詞 1편이 실려 있다. 文科覆試에서 장원한 〈中興對策〉, 鄭汝昌과 지리산을 유람한 기록인 〈頭流紀行錄〉, 睡軒 權五福과 수창한 시이다. 권6은 附錄으로서, 黃宗海가 지은 記實, 尹鳳朝가 지은 神道碑銘, 金錫胄가 올린 紫溪書院請額疏 등이 실려 있다. 권7은 附錄으로서, 請諡疏ㆍ吏曹回啓ㆍ贈職敎旨ㆍ諡狀 등 請諡事蹟에 관한 글이 실려 있다. 권8은 別附로서, 저자의 祖父 金克一과 조카 金大有에 관한 글 2편과 金大有의 遺詩 3수가 실려 있다.
續集 上에는 詞 3편, 詩 114수, 疏 4편, 箚 1편이 실려 있다. 이것은 秘藏되어 오던 年譜가 金晉炯의 집에서 나오자, 祀孫 김영호가 本集에 없는 것을 수집하고 年譜에서 발췌하여 1책으로 만들어 1903년 비로소 公刊한 저자의 詩文이다. 詞는 元昊의 〈歎世詞〉, 曺尙治의 〈子規詞〉, 단종의 〈御製子規詞〉에 次韻한 것으로 原韻이 附記되어 있다. 詩는 詩體別로 오언절구 2수, 칠언절구 12수, 칠언절구 2수, 칠언율시 98수가 실려 있는데, 이 중 〈賡詩四十八詠〉은 48종의 花卉ㆍ竹石ㆍ鳥獸ㆍ烟雲 등을 읊은 安平大君의 〈四十八詠〉에 和答한 詩로서 原韻이 附記되어 있다.
續集下는 附錄이다. 저자를 문묘에 종사하도록 청한 〈請從祀聖廡疏〉 4편, 年譜의 宗系를 바로잡은 전말을 기록한 〈宗系歸正禮院奏本及奉旨〉, 修禊錄인 〈金蘭契錄〉이 실려 있다.
권미에는 속집 跋(柳道獻), 識(방손 金顯溎), 敍(15대손 金榮灝), 識(14대손 金相元)가 실려 있다. 끝에 1925년에 간행된 사실을 알 수 있는 판권지가 있다.

필자 : 金圻彬

'김일손의 후손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일손에 관한 책 읽기  (0) 2008.11.13
해바라기 -한시  (0) 2007.02.01
탁영금 - 거문고  (0) 2006.10.16
김일손의 글 재주  (0) 2006.10.16
김일손의 수필 -충과 효에 대하여...  (0) 2006.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