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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손의 후손들

무오사화와 사관 김일손 : 7회 유자광, 사초를 가지고 김일손을 축조 심문하다

무오사화와 사관 김일손 : 7회 유자광, 사초를 가지고 김일손을 축조 심문하다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국민권익위원회 청렴 강사)

 

 

1498712일에 창덕궁 빈청(賓廳)에서 유자광은 김일손을 심문하였다. 김일손은 소릉(昭陵)의 재궁(梓宮 무덤)을 파서 바닷가에 버린 사실은 조문숙(趙文琡)에게 들었다고 진술했다.

 

소릉은 문종의 비이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 14181441) 권씨의 능이다. 현덕왕후는 1441723일에 단종을 낳은 후 하루 만에 산후통으로 별세하여 경기도 안산의 와리산에 묻혔는데 능호를 소릉이라 하였다.

 

그런데 1457621일에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당하자 세조는 현덕왕후 권씨를 폐위하여 서인으로 삼고 소릉을 폐하였다.

 

연려실기술에는 “1457년 가을, 세조가 하룻밤에 꿈을 꾸었는데 현덕왕후가 매우 분노하여, ‘네가 죄 없는 내 자식을 죽였으니, 나도 네 자식을 죽이겠다. 너는 알아두어라.’ 하였다. 세조가 놀라 일어나니, 갑자기 의경세자가 죽었다는 기별이 들려왔다. 이에 분노한 세조는 소릉을 파헤쳐 관곽을 강물에 던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조는 소릉을 파헤쳐 관곽을 강물에 던진 뒤 종묘의 현덕왕후 권씨의 신주를 철거했고, 145797일에는 고명(誥命 중국에서 왕과 왕비를 승인한다는 문서)과 책보(冊寶 옥책과 금보), 장구(粧具 꾸미고 단장하는 데 쓰는 도구)를 거두었다. (세조실록 145797)

(옥책(玉冊)은 왕과 왕비의 존호를 올릴 때 송덕문을 옥 조각에 새겨 엮어 맨 책이고, 금보(金寶)는 죽은 임금이나 왕비의 추상존호를 새긴 도장이다.)

 

그런데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가 죽은 것은 1457(세조 3) 92일이고, 단종이 죽은 날짜는 14571024일이다. 의경세자가 단종보다 먼저 사망했으므로 연려실기술가짜 뉴스이다.

 

그러면 소릉의 무덤을 파서 바닷가에 버린 사실을 김일손에게 전한 조문숙은 누구인가? 조문숙을 조선왕조실록에서 검색해보니 성종실록25회 나온다. 눈여겨볼 기록은 조문숙은 14853월 경기도 안산군수 시절에 동궁(東宮)의 역사(役事)에 수군(水軍)을 쓰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다는 밀봉(密封)한 의견서를 성종에게 직접 올렸다.’이다.

(성종실록 148537)

 

이처럼 조문숙이 안산군수를 하였으니 안산에 있던 소릉이 파 헤쳐진 것에 대하여 누구보다 잘 알았으리라.

 

한편 조문숙은 강직한 선비였다. 149211월부터 12월의 성종실록부터 살펴보자. 1117일에 좌승지 조위가 기신재(忌晨齋)에 중(승려)을 대신하여 정병(正兵)을 사역시킬 수 없음을 아뢰었다.

 

1123일에는 도승지 정경조 등이 서계(書啓)하였다.

"우리나라는 신라때부터 불교를 숭상해 풍속을 이루었으나 바로잡는 자가 없었는데, 다행히 태종대왕께서 사찰의 전토와 노비를 모두 혁파하여 동방(東方) 천고(千古)의 폐단을 씻어, 백성의 풍속과 선비의 습관이 다시 바른 길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부역(賦役)을 도피하는 백성이 머리를 깎는 경우가 여전히 많이 있어 군액(軍額)이 줄어드는 것은 오로지 이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전하께서 그 폐단을 밝게 아시어 군액이 늘어나기를 기한하여 도승(度僧)을 허락하지 아니하였으니 신하와 서민들이 서로 경하(慶賀)하면서 거룩한 정치를 보기를 기다렸는데, 이제 대비(인수대비 한씨 1437 ~1504)의 전교(傳敎)로써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시니 일국(一國)의 신민(臣民)으로 실망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습니다. 성상께서 거듭 청하여 대비의 뜻을 돌이키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이러자 성종은 "이단(異端)의 그릇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다만 대비의 뜻을 차마 거스릴 수 없다." 하였다.

 

이날 홍문관 부제학 안침 등이 중을 금하는 법령의 중요함을 아뢰면서 공론에 따르고 성명(成命)을 고치지 말라고 아뢰었다. 이러자 성종은

대비께서 즐겨하지 아니하신다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1129일에 여러 신하들이 중이 되는 것을 금하는 법을 고칠 수 없음을 다시 아뢰었다. 특히 홍문관 부제학 안침은 "대신은 정도(正道)로 임금을 섬겨야 하는 것인데 전번에 수의(收議)할 때에 윤필상 등이 감히 아첨하는 말을 바쳤으니, 이게 대신의 도리입니까?"라고 말하였다.

121일에 대사간 안호 등이 대비의 하교로 중[]이 되는 것을 금하는 법령을 고치는 것이 옳지 못함을 상소하였다. 이어서 대사헌 이세좌 등도 대비의 뜻에 따라 조정의 법을 고치는 것이 부당함을 상소하였다.

하지만 성종은 모두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123일에 대사간 안호등이 합사(合司)하여 영의정 윤필상을 국문(鞫問)하라고 아뢰었지만 성종은 역시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124일에 성균관 생원 이목 등이 일곱 조목에 걸쳐 상소하였다.

 

성균관 생원 이목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상소를 세 번 올렸으나 전하께서 처음 전교에는, ‘너희들의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하셨고, 두 번째 전교에는, ‘너희들의 말을 들어줄 수 없다.’고 하셨으며, 마지막 전교에는, ‘너희들이 지나치게 논한다.’고 하셨으니, 다시 한번 조목(條目)을 열거(列擧)하여 진술하겠습니다.

 

전하께서 대비의 뜻을 어기기 어려워하시어 비록 나라가 어지럽고 망하는 일이라도 반드시 하신다면 지금의 왕비는 다른 날 세자(世子)의 대비(大妃)가 될 것이고 세자빈(世子嬪)도 역시 후사의 대비가 될 것이니, 이제 대비께서 옳지 않은 예()를 처음으로 만드시고 전하께서 그대로 따르시면 후세의 자손도 자지(慈旨 대비의 뜻)를 중하게 여겨서 국법을 어지럽게 고칠 것이며, 모후(母后)는 임금을 가볍게 여겨서 조정 정사에 간여하고 어지럽게 할 것입니다. 우선 당장 편안한 것만 따라 법을 삼으면 비록 지극한 효성으로 의()를 잡은 임금이 나와서 그 폐단을 구하려고 하는 이가 있다 하더라도 중국 송나라의 양궁(兩宮 인종(仁宗)의 비()인 조태후(曹太后)와 영종(英宗)을 가리킴)과 같은 원망이 있을 것이니, 그 전해 내려가는 해()를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인데, 어찌 사직(社稷)의 복이 되겠습니까? 이것이 신 등이 이해하지 못할 바의 첫째입니다.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는 이라면 반드시 그 어버이를 위하여 중(승려)에게 복을 구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것인데, 무뢰(無賴)한 승도(僧徒)가 자기의 일을 끼고 대비의 들으심을 번거롭고 욕되게 하였으니 전하께서 예사로이 여기고 부끄러워할 줄 알지 못하시면 승도가 궁궐에 출입한 뒤에야 이를 금하시겠습니까? 그러면 예전에 간하는 이들이 있어서 울부짖으면서 따라다닌다는 것은 모두 망령된 말입니다. 이것이 신 등이 이해하지 못할 바의 둘째입니다.

 

나라 사람들이 윤필상을 간사한 귀신이라고 지목하는데 전하께서만 홀로 충성스럽다고 여기시는 것입니까? 만약 충성스럽지 못함을 알면서 정승으로 삼으셨다면 반드시 당나라 덕종과 같이 종사(宗社)가 위태롭게 된 뒤에야 마음에 쾌하시겠습니까? 이것이 신등이 이해하지 못할 바의 셋째입니다.

 

반드시 자지(慈旨)를 어기지 아니하는 것으로 효도로 여긴다면, 자지(慈旨)가 만일 자손의 머리를 깎게 하려고 하신다 하여도 전하께서는 또한 어기지 아니하시겠습니까? 이것이 신등이 이해하지 못할 바의 넷째입니다.

 

전하께서 간사한 사람의 말은 믿으시고 바른 선비의 간하는 말은 거절하시어, 상소를 여러 번 올렸는데도, ‘내가 그 잘못을 안다.’고 하시는 데 불과하고, 간하는 말을 자주 올렸는데도 내 마음을 알지 못한다.’고 하시는 데 불과하니, 이는 전하의 마음이 그 옳지 못함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옳지 못함을 아시면서 하시는 것이니, 이것이 신 등이 이해하지 못할 바의 다섯째입니다.

 

전하께서는 스스로 생각하시기를, ‘우리 종사가 튼튼하고 조정이 편안하며 또 나의 지혜로 충분히 꾀할 수 있는데 저 지껄여대는 못난 유학자 가 어찌 망령됨이 많으냐?’고 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전하께서 불의(不義)로 효()를 삼고 간사하고 아첨하는 말을 들어주신다면 종사(宗社)가 어떻게 튼튼해지며 조정이 어떻게 편안해지겠습니까? 이것이 신 등의 이해하지 못하는 바의 여섯째입니다.

 

전하께서는 허물은 대비에게 돌리시고 비방(誹謗)은 대신에게 돌려서 스스로 허물을 면하시려고 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대비의 실수와 대신의 아첨은 모두 전하에게 근본하였으니, 만세(萬世) 후에 의논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이것이 신 등이 이해하지 못하는 바의 일곱째입니다.

 

 

또 신 등은 감히 대신을 헐뜯는 것이 아니라, 헐뜯는 바는 곧 아첨하는 신하입니다. 신 등은 차라리 바른 말을 하다가 죽을지언정 차마 임금에게 아부하면서 살지는 못하겠습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사직(社稷)에 마음을 두시고 간사한 것과 바른 것을 결단하소서."

 

이에 성종은 승정원에 전교하였다.

 

"대간(臺諫)이 지금 바야흐로 논계(論啓)하는데 태학생(太學生)이 또한 상소하기를 그만두지 아니하니, 유생이 스스로 대간이 되고자 하는가? 알지 못하겠다. 상소 가운데 나의 사후(死後)의 일을 논하였으니, 이는 더욱 마땅히 의논할 바가 아니다. 또 윤필상을 간귀(奸鬼)라고 하였으니, 미록 국인(國人)이 지목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말한 자가 있을 것이니, 그것을 물어서 아뢰라. 또 전일 대비께서 언간(諺簡)을 내린 뒤에 의논에 참여하지 아니한 대신이 많이 있으니, 내일 불러서 이 글을 보이고 수의(收議)하는 것이 가하다." (성종실록 14921245번째 기사)

 

이윽고 사헌부 대사헌 이세좌 등과 사간원 대사간 안호 등이 아뢰었다.

 

"대비께서 허종에게 답하시기를, ‘전하께서 대간을 대우하시기를 어린아이 달래듯 하신다.’고 하시고, 또 이르시기를, ‘민간이 소요스럽다.’고 하셨으니, 만약 민간이 소요스럽다면 신 등이 마땅히 먼저 들었을 것입니다. 이제 대간과 시종(侍從)과 유생까지 상소로 항의하고 논계(論啓)하니, 이는 참으로 공론(公論)이므로 따르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종은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마침내 이목 등 8명이 윤필상의 죄를 논하자 성종은 이들을 의금부에 가두게 하였다. (성종실록 14921249번째 기사)

 

이목 등이 서계(書啓)하였다.

"윤필상이 수상(首相)이 되면서부터 마음을 쓰는 것과 행하는 일이 간교(奸巧)하지 아니함이 없는데 나라 사람으로 귀와 눈을 가진 자는 듣지 않은 이가 없으니, 낱낱이 들기는 어려우나, 지금의 시점에서 보건대 태학(太學)에서부터 사학(四學 : 서울의 중앙과 동··서에 세운 네 학교)의 여러 생도들까지 모두 말하기를, ‘간사한 귀신[奸鬼]’이라고 하니, 이들도 나라 사람입니다."

 

이에 성종이 전교하였다.

 

"이른바 간교(奸巧)한 태도는 어떤 일을 가리키며 또 어찌하여 귀신[]이라고 이르는가? 수상은 내가 존경하는 바이니 간교한 귀신이라는 실상을 모름지기 지적하여 말하도록 하라. 만약 바로 말하지 아니하면 이는 면전(面前)에서 속이는 것이다."

 

다시 이목 등이 서계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그 나라에 살면서 그 대부(大夫)를 비난하지 아니한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수상(首相)이겠습니까? 신이 존경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 아닙니다. 그러나 윤필상은 욕심이 많고 마음이 흐려 재물을 늘리므로 논박(論駁)을 당한 적이 한 번이 아닌데, 하물며 이제 뜻을 맞추려고 힘을 쓰고 아첨하여 기쁘게 하며 성상을 불의(不義)로 인도하므로 이를 간사하다고 이르는 것이고, 그 은총을 굳게 하려고 하여 자지(慈旨 대비의 뜻)에 억지로 따르니 이를 교묘[]하다고 이르는 것이며, 행하는 바가 이와 같은데도 사람들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니 이를 귀신이라고 이르는 것입니다. 그 의논한 바가 유교의 도리에 크게 어긋나기 때문에 신 등은 말이 여기에 이르렀음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조정의 신하에게 하문(下問)하시어 신 등의 말과 같지 아니함이 있으면 신 등은 마땅히 면전(面前)에서 속인 죄를 받겠습니다."

 

이러자 성종은 승정원에 전교하였다.

 

" ‘그 나라에 살면서 그 대부를 비난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더구나 수상이겠는가? 또 뜻을 맞추려고 힘을 쓰고 아첨하여 기쁘게 하며 대비의 뜻에 억지로 따른다는 것을 간교하다고 한다면, 이극배와 노사신도 이 의논에 참여하였는데 어찌하여 윤필상만 지적하는가? 또 이것이 어찌 간교함이 되겠는가? 행동하는 바가 이와 같으면서도 사람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을 귀신이라고 이른다면 이극배·노사신도 역시 귀신인가? 이는 반드시 듣고 본 바가 있어서 그것을 말할 것이며, 아니면 몰래 부추긴 자가 있을 것이다. 대간(臺諫)이 대비의 전교를 보고 이르기를, ‘대비가 대신을 능욕하였다.’고 하였는데 이제 유생이 도리어 대신을 능욕하니, 이는 대신이 유생 밑에 있는 것이다. 이목 등을 의금부에 내리도록 하라."

 

이목과 심순문·최광윤·조원기·남곤·송여려·이수함·이윤탁 등이 의금부에 갇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