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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손의 후손들

무오사화와 사관 김일손 - 3회 연산군, 김일손의 사초(史草)를 들여오라 명하다 입력 2024.04.25 18:09 댓글 0

무오사화와 사관 김일손 - 3회 연산군, 김일손의 사초(史草)를 들여오라 명하다 입력 2024.04.25 18:09 댓글 0

 

1498711일에 연산군은 "김일손의 사초(史草)를 모두 대내(大內 임금이 거처하는 곳)로 들여오라."고 전교하였다. 이에 실록청 당상(實錄廳 堂上) 이극돈·유순·윤효손·안침이 함께 아뢰기를, "옛날부터 사초는 임금이 스스로 보지 않습니다. 임금이 만약 사초를 보면 후세에 직필(直筆)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711)

 

사초(史草)실록 편찬을 담당하는 춘추관의 기사관들이 왕의 언행 하나하나를 기록한 시정기(時政記). 시정기는 임금의 일상부터 신하들과 국정 현안을 논의하는 과정, 인물에 대한 비평도 들어있는 실록의 원천자료이다.

 

그런데 임금을 비롯한 집권 세력은 자신들 악행이 실록에 그대로 실려 후세에 전해지는 걸 극도로 꺼렸다. 이러함에도 조선 시대 초기에는 사초를 빌미삼아 탄압을 가한 적은 없었고, 심지어 선대왕의 실록도 보지 못했다. 조선 최고의 성군인 세종 임금도 태종실록을 보려했으나 편찬에 참여한 황희 등 신하들이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세종

실록 143832)

 

그런데 연산군은 김일손의 사초를 즉시 들이라고 명령한 것이다. 이러자 실록청 당상관들은 예로부터 사초(史草)는 임금이 스스로 보지 않습니다. 임금이 만약 사초를 보면 후세에 직필(直筆)이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아뢰었다.

 

직필(直筆)! 이는 사실(史實)을 바르게 쓰는 일인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올바르게 기록하는 것이 사관의 길이었다. 사실을 왜곡하면서 권력에 아부하는 곡필(曲筆)은 중국 춘추전국시대부터 지탄의 대상이었다.

 

직필은 달리 말하면 춘추필법(春秋筆法)이기도 하다. 공자(BC 551479)춘추(春秋)라는 노나라의 역사책을 저술하면서 객관적이고도 엄정한 비판의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즉 춘추필법은 직필의 대명사였다.

(춘추에는 노나라의 은공 원년(BC 722)부터 애공 14(BC 481)에 이르는 역사가 실려 있다. 맹자(BC 371 289 )는 공자가 춘추를 지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다시 세상이 쇠퇴하고 도가 희미해져 사설(邪說)과 폭행이 일어났다. 신하로서 자신의 군주를 죽이는 자가 생기고 자식으로서 그 아비를 죽이는 자가 생겼다. 공자께서 이런 세태를 두려워하여 춘추라는 역사서를 지었다. 춘추는 천자의 일을 다룬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나를 알아주는 일은 오직 춘추를 통해서 일 것이고, 나를 비난 하는 것도 오직 춘추를 통해서 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맹자등문공 하’ )

 

그러나 연산군은 "김일손의 사초를 즉시 빠짐없이 대내로 들이라."고 재촉했다. 임금이 김일손의 사초를 보겠다는데 감히 말대꾸이냐는 신경질 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이에 이극돈 등이 다시 연산군에게 아뢴다.

 

"여러 사관(史官)들이 드린 사초를 신 등이 보지 않는 것이 없고, 김일손의 초한 것 역시 모두 알고 있사옵니다. 신 등이 나이가 이미 늙었으므로 벼슬한 이후의 조종조(祖宗朝) 일은 알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김일손의 사초가 과연 조종조의 일에 범하여 그른 점이 있다는 것은 신들도 들어 아는 바이므로, 신들이 망령되게 여겨 감히 실록에 싣지 않았는데, 지금 들이라고 명령하시니 신 등은 무슨 일을 상고하려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옛날부터 임금은 스스로 사초를 보지 못하지만, 일이 만일 종묘사직에 관계가 있으면 상고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신 등이 그 상고할 만한 곳을 절취하여 올리겠습니다. 그러면 일을 고열(考閱)할 수 있고 또한 임금은 사초를 보지 않는다는 의()에도 합당합니다.”

(연산군일기 1498711)

 

김일손의 사초 전체를 안 올리고, 왕실의 능멸에 관한 부분만을 절취해서 올리겠다는 이극돈의 입장은 그의 비행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묘책이기도 했다.

 

연산군은 가하다.’고 전교를 내렸다. 이극돈 등은 김일손의 사초에서

6조목을 절취하여 봉해 올렸다.

 

이어서 연산군은 전교하기를, “그 종실(宗室) 등에 관해서 쓴 것도 또한 들이라.” 하였다. 종실들의 비사(秘事)가 김일손의 사초에 실려 있었던 것이다.

 

김일손의 사초(史草) 6 조목을 읽은 연산군은 분노했다. 세조(연산군의 증조부)의 궁금비사(宮禁秘事)등을 사초에 적다니. 이것이 능상(凌上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깔보아 업신여김)이 아니고 무엇인가.

 

연산군은 김일손을 빨리 문초하고자 조바심이 났다. 712일에 연산군은 "별감(別監) 세 사람에게 상등(上等)급의 말을 주어서 세 곳으로 나누어 보냈다. 별감은 기다리다가, 잡아오는 김일손이 보이거든 차례차례로 달려와 아뢰도록 하라."고 전교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7121번째 기사)

 

이때 김일손은 경상도 함양군 청계정사에서 의금부 경력 홍사호와 도사 신극성에게 체포되어 한양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김일손은 1496년 윤3월에 모친상을 당하여 경상도 청도에 있었는데 상복을 벗자 풍병을 앓아 함양에서 요양 중이었다.

 

김일손은 잡혀오면서 사초 때문임을 직감했다. 그는 홍사호에게 처음 체포될 적에 이는 필시 성종실록에 대한 일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홍사호등이 어째서 그렇다고 생각하느냐?” 고 묻자, 김일손은 나의 사초(史草), 이극돈이 세조 조에 불경(佛經)을 잘 외운 것으로 벼슬을 얻어 전라도 관찰사가 된 것과,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의 상()을 당하여 장흥(長興)의 관기(官妓) 등을 가까이한 일을 기록하였는데, 듣건대, 이극돈이 이 조항을 삭제하려다가 오히려 감히 못했다고 한다. 실록이 빨리 편찬되지 못하는 것도 필시 내가 임금에 관계되는 일을 많이 기록해서라고 핑계대고 비어(飛語)를 날조하여 연산군에게 아뢰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니, 지금 내가 잡혀가는 것이 과연 사초(史草)에서 일어났다면 반드시 큰 옥()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연산군일기 7124번째 기사)

 

그랬다. 이극돈은 자신의 비행이 성종실록에 수록되지 않도록 백방으로 노력했던 것이다. (연산군일기 14987123번째 기사 김일손의 집에서 찾아낸 이목의 편지)

 

그런데 김일손과 이극돈의 악연은 오래 전부터의 일이었다. 첫번째 악연은 23세의 김일손이 과거시험을 볼 때 있었다. 1486(성종 17) 병오년에 과거시험이 있었는데 출제와 채점을 담당하는 시관(試官)이 예조 소속의 윤필상·이극돈·유지 등이었다. 이때 이극돈은 좌중에서 김일손에게 1등을 주자고 했으나 2등을 고집하여 김일손의 원망을 받았다. (연산군일기 1498719일 이극돈의 사초의 일에 대한 상소)

 

한편 윤근수(15371616)월정만필에는 김일손의 과거 응시글이 실려 있다.

 

탁영(김일손의 호)이 별시에 응시하였을 때 탁영의 두 형 준손(駿孫)과 기손(驥孫)도 탁영의 손을 빌린 덕택에 탁영과 함께 모두 초시에 합격하였다. 전시를 치르는 날, 탁영은 두 형의 책문을 대신 지어주고, 자기 것은 짓지 않았다. 형에게 장원을 양보하고 자기는 훗날 과거에 장원하려고 한 것이었다. 두 형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준손은 갑과 제1인이었다. 훗날 과거를 치를 때 전시의 시관(試官 곧 이극돈)이 속으로 탁영의 문장인줄 알고서 그 사람됨을 꺼려 2인으로 밀어 두었기에 민첩(閔怗)이 제1인이 되었다. 김일손이 듣고서 성을 내며, “민첩이 어떤 사람이냐?”하였다.

 

두 번째 악연은 이극돈이 이조판서일 때 이조낭청을 뽑을 적에 생겼다. 이조낭청은 이조좌랑과 정랑자리를 말하는 데 인사권을 장악한 막강한 자리다. 전임 낭청들이 김일손을 모두 추천하여 이조낭청을 삼자고 했는데, 이극돈은 장차 홍문관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핑계대고 망(3배수 후보자)에 넣어주지 않았다. 그 후에도 김일손이 이조낭청으로 추천되었는데도 이극돈은 불가하다 했고, 병조당상이 강력히 김일손을 추천한 후에야 김일손은 비로소 병조좌랑을 얻었으니, 이것이 김일손이 제2의 원망을 맺은 곳이었다. (연산군일기 1498719)

 

세 번째 악연은 김일손이 헌납(獻納)이 되었을 때였다. 김일손은 강직하여 권세 있는 사람을 꺼리지 않고 할 말을 다했는데 한번은 이극돈과 성준이 서로 질투하고 모함하는 등 사이가 좋지 않아 장차 당나라의 우승유(牛僧儒)와 이덕유(李德裕)처럼 당()을 만들 것이다.” 라고 상소했다. 이에 이극돈은 크게 노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729일 유자광에 대한 평가 내용과 무오사화의 전말)

 

여기에서 우승유와 이덕유의 당쟁 (우이당쟁)823년부터 40년간 계속된 당나라 관료 집단의 당쟁이다. 우승유 당과 이덕유 당은 파면과 불임용을 거듭하고, 극심하게 대립하며 권력을 주고받았다. 우이는 당나라 목종(穆宗, 재위 820~824)때 붕당이 형성되어 이후 무려 40여 년간 지속되었다. 우이당쟁은 단순히 권력 쟁취를 위한 관료 집단의 다툼이었기 때문에 당쟁의 피해는 백성이 오로지 입었다.

 

그리고 네 번째 악연이 바로 김일손의 사초이다. 이극돈은 김일손을 원망하면서 사초의 기록을 지우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김일손이 서울로 압송당하면서 의금부 관원 홍사호에게 지금 내가 잡혀가는 것이 과연 사초(史草)에서 일어났다면 반드시 큰 옥()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이극돈의 아들 이세전이 이웃 고을의 수령이 되어 왔는데, 맏형에게는 문안을 하면서도 나에게는 오지 않으면서 이 사람이 병을 얻었다는데 아직 죽지 않았소.하였다 하니, 이극돈이 나를 원망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연산군일기 7124번째 기사)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국민권익위원회 청렴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