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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

<김세곤 칼럼> 해방정국 3년 톺아보기(17-19) - 이승만의 귀국

<김세곤 칼럼> 해방정국 3년 톺아보기(17) - 이승만의 귀국 (1)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대한제국 망국사저자 )

 

19451016일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18751965)이 미국에서 귀국했다. 이승만은 40여년 간의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1945104일에 뉴욕을 출발하여 일본을 거쳐 귀국한 것이다.

 

이승만은 양녕대군 후손으로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났다. 1877년 서울로 이사해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과거제도 폐지는 이승만에게 신학문을 접하는 행운을 가져왔다. 그는 18954월에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기독교 학교인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 18965월부터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 서재필(1864-1951)이 배재학당에서 매주 목요일에 특강을 하였다. 이승만은 서재필의 강의에 크게

감명받았다.

 

서재필이 특강을 한 지 반 년 쯤 지났을 때, 서재필은 학생들에게 토론회 모임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그리하여 189612월에 협성회(協成會)가 창립되었으며 이승만은 협성회에 적극 참여하였다. 189778일에 배재학당을 졸업한 이승만은 독립협회 활동에 참여하면서, 협성회 활동에도 열정을 쏟았다. 그리하여 189811일에 협성회의 주간신문인 협성회회보창간에 참여하여 논설을 썼다. 그런데 협성회회보3개월 만에 큰 호응을 얻자 협성회회보189842 일자 제14호로 마감을 하고, 15호 발행일인 49일에 우리나라 최초의 일간신문인 매일신문이 창간되었다.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일조각, 1970,p 330-331)

 

1898310일에 독립협회는 서울 종로에서 민회(民會)를 열었다.

민회에는 1만여 명의 시민들이 모였는데 당시 서울인구의 5%가 모인 것이다. (나중에 이 민회는 만민공동회라 불렸다.) 이 민회에는 연사들이 자주독립권 수호를 위한 확고한 결의를 내외에 과시했는데, 연사로 이승만도 참여하였다. 이후 독립협회는 중추원을 의회로 바꾸는데 성공하여 중추원 관제가 통과되었으나, 1898114일 조병식 등의 익명서 투서 사건으로 독립협회 간부 17명이 구속당하는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수만 명의 시민들이 고등재판소 앞에서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자 당황한 고종은 1110일에 구속자를 전원 석방하였다. 그러나 1898126일 이후 재개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서 급진파 인사들이 대정부 공세를 강화하고, 박영효 소환 운동을 벌이자 불안감을 느낀 고종은 1223일 군대와 보부상(褓負商)을 동원해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시켰고, 독립협회와 지도부를 체포하였다. 1225일에는 만민공동회를 불법화한다는 조칙을 발포하여 독립협회는 실질적으로 해산되었다.

 

189913일에 고종은 중추원 의관(議官) 신해영, 이승만등을 해임시킨데 이어, 박영효와 내통해서 고종 폐위와 공화제 시행 음모를 기도했다는 혐의로 이승만·연홍식·연홍기·임만용·김봉구·조문식을 체포 투옥했다. 이승만이 구금되자 주한 미국공사 알렌은 이승만의 석방을 요구하였지만 거부당했다. 18991월 말에 이승만은 탈옥을 시도하다 실패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다행히도 종신형으로 감형되었고, 19048월 초까지 57개월간 한성 감옥에서 지냈다. 한성 감옥에서 이승만은 청일전기(淸日戰紀)를 편역하고, 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독립정신책을 저술하였다. (독립정신은 그가 출옥한 이후인 1910LA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고, 청일전기(淸日戰紀)1917년 하와이에서 출간되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190489일 특별 사면령을 받고 석방되었고, 이 해 11월에 민영환과 한규설의 주선으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미국 하와이로 건너 갔다.

 

이승만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체결 5일 후인 190584일에 목사 윤병구과 함께 미국 사가모어 힐 별장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났다.

 

두 사람은 하와이 교민 8천 명을 대표하여 한국의 주권과 독립보전에 대한 희망을 담은 청원서를 제출했다. 이 자리에서 루즈벨트는 공식 창구를 거치기 전에는 검토할 수가 없다고 대답했다.

 

일본이 한국 외교의 공식적 창구를 지배하고 있음을 알고도 교묘하게 답변한 것이다. 순진한 이승만 일행은 미국 워싱턴의 한국공사관을 찾아갔다.

 

하지만 대리공사 김윤정은 본국 정부의 훈령이 없이는 청원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하소연도 하고 윽박지르기도 하였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19064월에 이승만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난 소식이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에 알려졌다. 이러자 이승만은 한국에 널리 알려졌다.

 

( 참고문헌 )

 

o 김세곤, 대한제국 망국사, 온새미로, 2023

o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일조각, 1970

 

<김세곤 칼럼> 해방정국 3년 톺아보기(18) 이승만의 귀국 (2)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대한제국 망국사저자 )

 

미국에 머문 이승만은 1907년 워싱톤 DC의 조지워싱턴대학에서 학사, 하버드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1910년 프린스턴대학에서 미국 영향 하의 중립론(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108월에 이승만은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이승만은 황성기독교 청년회(YMCA) 청년부 간사이자 감리교 선교사로 활동하던 중 1912‘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의 압박을 받았다. 이러자 그는 19124월 감리교 선교부의 도움으로 미국 미네소타에서 열린 국제감리교대회 참석을 빌미로 도미(渡美)하였다. 이후 이승만은 미국에서 활동하였다.

 

1918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면서 국제연맹을 구상하였다.

 

이승만은 1919225일에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하에 둘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하였다. 장차 완전한 독립을 준다는 보장 하에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받는 것이 일본의 식민지로 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승전국이었기 때문에 한국은 국제연맹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이승만은 19193·1운동 직후 노령(露領) 임시정부에 의해 외무총장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410일 구성된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국무총리로, 423일 선포된 한성 임시정부에서는 집정관총재(執政官總裁)에 임명되었다.

 

한편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은 191996일에 이승만을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이승만은 192012월부터 약 6개월 동안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이후 이승만은 19215월 미국 워싱턴DC에서 개최될 군축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상해에서 미국으로 갔다.

 

1930년대에 이승만은 미국에서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계속하였다. 193211월에 그는 국제연맹에 한국의 독립을 탄원할 임무를 받고 전권대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19331월과 2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 연맹 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국제연맹에서의 활동이 인정받으면서 193311월에 이승만은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출되었고, 1934년에는 외무위원회 외교위원, 1940년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1940년에 그는 태평양 전쟁을 예상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를 출간하였다.

 

1941128일에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다. 이승만은 1942829일부터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라디오 방송에서 일본의 패망과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방송을 하였다. 이승만이 출연하는 미국의 소리방송은 국내 인사들도 은밀하게 청취했고 한국의 서울 사람들에게 입소문이 났다.

 

19429월에 이승만은 미국 전략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과 연락해 임시정부의 광복군이 미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연결하는 활동을 하였다. 또한 태평양 전쟁 시기 미국과 소련이 얄타회담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해 합의한 후에는 소련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1945815일에 드디어 해방이 되었다. 이승만은 1945104일에 뉴욕에서 귀국길에 나섰다. 이승만은 하와이와 괌을 거쳐 12일 도쿄에 도착하여 3일 동안 맥아더 연합군 총사령관 · 하지 미군정 사령관과 3자 회합을 한 다음, 미군 군용기를 이용하여 1016일 오후 5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하지 미군정 사령관은 이승만에게 자신이 묵고 있는 반도 호텔 근처에 있는 조선호텔 특실 3개와 순종이 탔던 승용차를 쓰게 했다.

 

<김세곤 칼럼>해방정국 3년 톺아보기(19) 이승만과 박헌영, 완전히 헤어지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대한제국 망국사저자 )

 

 

이승만은 귀국 다음 날인 1017일 오전 10시에 하지의 안내로 미 군정청(중앙청) 1 회의실에서 기자 회견을 가졌는데 하지의 대접은 각별했다.

 

이승만은 이 날 저녁 830분 서울 중앙방송국의 전파를 통해 첫 방송을 했다. 그의 방송 요지는 나를 따르시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였다.

 

1020일에 경성시민 주최의 연합군 환영회가 개최되었다. 5만 명의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미군정청 건물 앞에서 열린 환영회에서도 하지 사령관은 이승만에게 다음과 같은 찬사를 보냈다.

 

이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일생 바쳐 해외에서 싸운 분이 지금 우리 앞에 계신다. 그분은 압박자에게 쫓기어 조국을 떠났었지만 그분의 세력은 크다.”

 

당시 해방공간에서 좌·우익을 통틀어서 이승만처럼 영향력 있는 정치인은 없었다. 임시정부 김구 주석은 아직 국내에 들어오지 못한 때여서 더욱 그랬다. 각 정당들은 다투어 이승만을 모시고자 했다.

 

우익진영의 한국민주당은 이승만의 귀국을 알리는 전단을 시내에 배포하였고 이승만에게 숙소로 돈암장을 제공하고 정치자금도 주었다. 좌익진영도 기관지 해방일보를 통해 일생을 통해 조국을 위하여 투쟁해 온 노혁명가가 귀국하다라고 크게 보도했다.

이미 이승만을 주석으로 추대했던 조선인민공화국(96일에 수립)위대한 지도자에게 충심의 감사와 만강의 환영을 바친다는 담화까지 발표했다. 1021일에 이승만은 나는 공산당에 대해 호감을 가진 사람이다. 우리나라 경제정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를 채용할 점이 많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바로 그 날 자신과 매우 친한 미국의 로버트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스꽝스러운 것은 공산당이 나를 수반으로 하는 정부를 조직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들에게 모스크바는 나를 반공주의자라고 통박하고 있는데 공산주의자가 되라니 큰 영광이라고 했지요라고 썼다. (강준만 지음, 한국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1, p 106-109 )

 

1023일에 조선호텔에서 한국민주당·국민당·건국동맹·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우익의 거의 모든 정당 및 사회·문화 단체 대표등 200여명이 모여 독립촉성중앙협의회(약칭 독촉’)’를 결성하였다.

 

회장에는 이승만이 추대되었는데 이승만은 수락 연설에서 우리의 염원은 하나뿐이니 힘도 하나, 소리도 하나로 뭉치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좌우익의 평화공존은 오래가지 못했다. 김구의 임시정부와 여운형과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인민공화국이 분열의 핵이었다. 송진우의 한국민주당은 임시정부를 지지했고,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지지했다.

 

112일 오후 2시 천도교 대강당에서 한국민주당·국민당·건국동맹·조선공산당의 대표자와 50여 군소정당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제2차 독립촉성중앙협의회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좌익과 우익은 임시정부냐 인민공화국이냐를 왈가왈부하며 다시 격론을 벌였다.

 

이 날 회장 이승만이 기초한 분단반대, 신탁통치 반대, 조선에 대한 점령국 대우 반대 등을 내용으로 하는 ‘4대 연합국에 보내는 선언서를 채택하려는 순간, 박헌영은 친일파 제거에 의한 민족통일 원칙을 포함할 것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승만은 싸우지말고 합심하여 하나로 뭉치자고 거듭 호소했지만 박헌영은 무조건 하나로 뭉치자는 것은 무원칙론이다. 그런 통합은 친일파 민족반역자들까지 들어간 것이니,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은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튿날인 113일에 조선공산당은 독촉비판 성명을 냈다.

 

금일에 있어 조선 문제를 해결함에는 반드시 아래와 같은 원칙적 조건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첫째로 우리 민족의 완전 독립을 달성하기 위하여 일본 제국주의 세력과 친일파 및 민족 반역자를 철저히 조선으로부터 구축 숙청할 것, 이것은 조선 민족 전체의 요망이며 절대 명령이다.

둘째는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을 내걸고 이 원칙 밑에서 모든 민주주의 요소(각 당, 각 파, 각 계급을 물론하고)의 집결로서 전조선 민족 통일 전선을 결성하고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을 선포할 것이다.

셋째는 이 통일전선을 기초로 하고 통일 정권을 수립할 것이요, 이 통일 정부는 진보적 민주주의 기본 과업을 실시할 것이며 특히 조선 근로 인민의 이익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넷째는 전조선 민족 통일 전선은 통일 정부를 지지하되 이것이 민주주의적 원칙을 밟아 나가는 가를 항상 검토하여 자기 의견을 세상에 발표할 것이다. 조선공산당에서는 적어도 이러한 의미의 원칙적 통일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2일에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모인 조선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이상과 같은 진실한 의미의 통일 전선과는 퍽 멀리 떨어져 있음을 지적한다.”

 

116일에 좌익계의 전국청년대표자대회는 만일 이박사가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을 거부한다면 지도자로 지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민족 통일전선 분열의 최고 책임자로 규정한다.”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이러자 이승만은 다음 날인 7일에 방송을 통해 조선인민공화국과 조선공산당 등에 대하여 비난을 퍼부었다.

 

1121일에 이승만은 공산당에 관한 나의 관념이란 방송 연설을 통해 공산당을 비난하였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은 각 지방에 소요를 일으키며 외국인을 배척하는 선전과 김구가 이끄는 임시정부를 반대하는 운동으로 인심을 이반시키며 결국에는 중국과 폴란드처럼 내전을 일으켜 민족 간에 피를 흘리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이승만은 반공(反共)주의자로서의 노선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러자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125일에 독촉과 결별을 선언하고 이승만과 완전히 헤어졌다. (강준만 지음, 한국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1, p 11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