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칼럼> 해방정국 3년 톺아보기 (14) 정치암살 희생자
제1호, 북한의 현준혁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대한제국 망국사’ 저자 )
1945년 9월 어느 날,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 책임 비서이자 평남 인민정치위원회 부위원장인 현준혁(玄俊爀)이 평남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 조만식과 함께 소련군 정치사령부 로마넨코 소장에게 들렀다가 트럭을 타고 돌아가던 중 평양시청 앞에서 괴한의 총격에 암살되었다. 나이 39세였다. 현준혁은 정치암살 희생자 제1호였다.
현준혁은 일제강점기에 유명한 사회주의자였으며, 해뱅 후에는 이북에서 활동한 주요 정치가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906년 평남 개천군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상경하여 1929년 3월에 경성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1929년 5월에 대구사범학교 교사가 되어 심리학· 영어· 한문 ·교육사들을 가르쳤고, 1930년 가을부터 교내 비밀결사인 ‘사회과학 연구그룹’을 지도했다. 또한 1932년 4월에 대구사범에 입학한 박정희 대통령을 가르쳤다. 바로 그 당시 현준혁은 학생들과 함께 항일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1932년 12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고향으로 돌아온 현준혁은 개천 및 영변 일대에서 공산당 활동을 하다 1935년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 6개월 복역했다. 1940년에 출소한 그는 고향에서 은신했다. 해방이 되자 현준혁은 조만식과 함께 평남 인민 정치위원회 활동을 하였다.
(박태균·정창현 지음, 암살, 역사인, 2006, p 32-34)
그런데 암살 시기에 관해서는 ‘9월3∽4일 설’과 ‘9월28일 설’로 나뉜다.
‘9월3일 설’을 주장한 사람은 당시 동평양보안(경찰)서장이었던 류기선이다. 자신이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지만 암살 현장을 관할하는 경찰서장으로서 같이 탑승한 조만식으로부터 다음 증언을 들었다,
” 갑자기 17,18세 정도로 보이는 적위대 차림을 한 청년이 올라타는 거야. 운전자 옆 가운데에 내가 앉고 문 옆에는 현준혁 군이 있었지.
커브 길이니까 속력이 줄어든 트럭에 골목에 서 있던 이 청년이 달려오더니 올라타. 그러면서 트럭 문을 잡고 안을 흘끗 보더니 현군의 가슴에 대고 권총을 쏘는 거야. 땅, 땅하는 소리가 몇 번 들렸던 것 같은데 현군이 내 무릎위로 푹 쓰러졌오. 그레서 ‘현군 현군’하고 소리를 치며 일으켜 세웠더니 가슴에서 피가 콸콸 쏟아졌어. 정신이 다득해 지더군.
총을 쏜 청년은 뒤를 흘끗흘끗 보면서 천천히 골목안으로 사라졌어”
(중앙일보 특별 취재반, 비록 조선인민민주주의 공화국 상, p 130-131, 박태균 · 정창현 지음, 암살, 역사인, 2006, p 23에서 재인용)
또한 ‘일본우방협회’의 지원을 받아 1964년에 출간된 모리타 요시오의 『조선 종전의 기록』은 현준혁이 9월 4일에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준혁은 45년 9월 4일 소련군 환영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도(道)인민정치위원회 근처에서 저격당했는데 범인은 자동차가 서행하는 틈을 타서 뛰어 올라 현(玄)을 확인한 다음 권총 한발로 즉사시켰다.”
(박태균·정창현 지음, 암살, 2006, p 249)
한편 ‘9월 28일설’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을 지낸 박병엽의 증언이다.
“9월 28일 조만식·홍기주와 함께 소련군 제25군 부사령관 로마넨코를 만난 후 돌아가는 길에 지금의 김일성 광장 입구 근처에서 저격당했다고 한다. 그 부근에 사람들이 모여 있어 타고 가던 삼륜차에서 잠시 내렸다고 총에 맞았다는 것이다.” (안문석 지음, 북한현대사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6, p 88)
해방 직후 평북 의주의 「평북신보」 책임 주필을 역임하고, 1948년 정부기관지 「민주조선」의 임시 부 주필로 활동하다가 6.25 전쟁때 월남한 김창순 전 북한연구소장은 1961년에 펴낸 『북한 15년사』에서 “1945년 9월28일 대낮에 현준혁은 평양시청 앞 노상에서 흉탄을 맞고 쓰러졌다. 현이 총에 맞아 즉사하자 소련 사령부는 교통을 차단하고 시건의 보도를 금지했다.”라고 서술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와 「두산동아대백과」의 현준혁 항목에도 현준혁이 9월 28일에 암살된 것으로 나온다. (박태균· 정창현 지음, 암살, 2006, p 27)
그런데 주목할 것은 미 24군단 평양 연락사무소가 1946년 11월 14일에 작성한 보고서이다. 여기엔 ‘1946년 11월 7일에 현준혁 사망 1주기 추도식을 거행했다’고 적었다.
“1년 전 평양에서 조만식과 함께 차를 타고 있던 중 암살당한 공산주의 지도자 현준혁에 추도식이 11월 7일에 열렸다. 추도식은 경찰본부 맞은 편 광장에서 대규모 장례 행렬로 시작했다. 추도사에 나선 사람들은 그의 열렬한 공산주의 신념을 칭송했다. 경찰도 총동원되었다. 장례 행렬이 광장을 떠날 때 쇼팽의 장송행진곡이 울러퍼졌다. 행렬은 24군단 평양 연락사무소 북쪽, 일제의 신사가 있던 방향으로 향했다. 행렬은 다시 경찰본부로 돌아왔다. 거기엔 50개의 조화가 놓여 있었다.”
(안문석 지음, 북한현대사산책 1, 2016, p 89-90)
아무튼 현준혁의 암살 일시는 여전히 미스테리이다. 그리고 암살 일시는 암살 배후와 연관되어 있다. (계속)
<김세곤 칼럼> 해방정국 3년 톺아보기 (15) 정치암살 희생자
제1호, 북한의 현준혁 (2)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대한제국 망국사’ 저자 )
현준혁 암살 일시는 ‘9월3일 설’과 ‘9월28일 설’로 나뉜다. 그리고 암살 일시는 암살 배후와 직접 연관되어 있다. 특히 ‘9월 28일’은 김일성이 그 배후로 알려져 있다.
‘9월 3일 설’은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자발적인 조직으로 공산진영 군대 역할을 했던 적위대의 대장 장시우가 암살을 지휘했을 가능성이 높다.
동평양보안(경찰)서장이었던 류기선은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지만 암살 현장을 관할하는 경찰서장으로서 “조만식으로부터 적위대 복장의 청년이 현준혁을 쏘았다”고 증언했다.
이는 어떤 식으로 든지 적위대 책임자 장시우와 관련 있다는 말이다.
장시우는 소련군의 도움을 받아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옳다고 보았다. 그는 우파와도 연합해 국가 건설에 나서야 한다는 현준혁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소련군은 평양지역에 활동하던 장시우 김용범 박정애 최경덕 리주애등을 조기에 친소파로 포섭했다. 하지만 현준혁은 민족주의자 조만식과 협력하면서 소련군에도 자기 주장을 내세우면서 정국을 주도하려고 했다.
이러한 주도권 경쟁과정에서 현준혁과 장시우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결국 소련군의 후광을 입은 장시우가 현준혁을 암살했다는 주장이다.
( 안문석 지음, 북한현대사산책 1, 2016, p 88)
9월 28일 암살설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을 지낸 박병엽이 말 한 내용이다.
“ 9월28일에 현준혁은 조만식· 홍기주와 함께
9월28일 설이 맞다면 김일성이 현준혁 암살을 주도했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9월 22일에 평양에 들어와 활동하던 김일성은 국내 공산세력의 실력자로 독자 노선을 걷고 있던 현준혁이 상당히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전 북한 『민주조선』 주필 한재덕은 「김일성을 고발한다」에서 소련 군정의 한국인 2세 통역관인 유채일이 “김일성 세력이 현준혁을 함살했다”고 한 증언을 전한다.
“ 김일성·김책 등 소련파와 장시우·김용범 등은 현준혁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공산당이 북한에서 패배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로마넨코 소장실에 이들 4명이 찾아와 현준혁 처리에 대한 비밀 회담을 하였고 이 자리에서 현준혁의 살해를 결정했다.”
유채일의 말이 사실이라면 김일성 세력은 조만식과 가까운 현준혁을 제거함으로써 조만식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공작을 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당시에 평양에는 “현준혁 암살은 김일성 세력이 국내 공산 세력의 약화를 노리고 저질렀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
(안문석 지음, 북한현대사산책 1, p 88-90)
박태균 · 정창현 지음, 암살, 역사인, 2006, p 23 ;
박태균 정창현은 저서 암살에서
한편 염동진의 대동단에서 암살설
(박태균·정창현 지음, 암살, 2006, p 249)
한편 현준혁 암살은 이후 송진우(1945.12.30)·여운형(1947.7.19)·장덕수(1947.12.2.) · 김구(1949.6.26)로 이어지는 주요 정치가에 대한 암살의 서곡(序曲)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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