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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

[김세곤의 근현대사 기행(2)] 대구 근대 골목투어(2) - 박정희와 육영수, 계산성당에서 결혼하다.

[김세곤의 근현대사 기행(2)] 대구 근대 골목투어(2) - 박정희와 육영수, 계산성당에서 결혼하다.

  • 기자명 푸드n라이프 
  •  입력 2023.10.20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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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산 성당 
                      
‘구 제일예배당’에서 조금 걸어가니 서상돈·이상화 고택 가는 이정표가 나온다. 이상화 고택까지 110m라고 표시되어 있다. 

이정표

이정표를 따라 50m도 못 가니 계산성당 후문이 나온다. 계산성당의   정식 명칭은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교좌 계산대성당’이다. 계산성당은 1903년 11월에 두 개의 종탑을 갖춘 고딕양식 벽돌 건물로 건립하였는데, 1911년 대구교구가 설정됨에 따라 주교좌성당이 되었다. 1918년  초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에 의해 증축되어 1919년 5월에 봉헌식을 거행하였고,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방문한 바 있다.

그런데 필자의 관심은 1950년 12월 12일에 계산성당에서 박정희(1917∼1979) 대통령과 육영수(1925∽1974) 여사가 결혼식을 올린 일이다.

박정희 가족은 큰형 박동희, 조카 박재석, 박영옥(셋째 형 박상희의 딸, 김종필의 부인)이 참석했고, 육영수 가족은 결혼을 반대한 부친 육종관은 끝내 불참했고, 모친 이경령 등이 참석했다.

대구시장 허억이 주례석에 오르자 모닝코트를 입은 박정희가 입장헸다. 육영수는 꽃바구니를 든 두 소녀를 앞세우고 박정희의 대구사범학교   은사 김영기의 손에 이끌려 들어왔다. 

허억은 신랑, 신부가 입장하자 엄숙한 목소리로 주례사를 하였다.  

“신랑 육영수 군과 신부 박정희 양은 ...”

이러자 장내는 웃음바다가 되었다. 

신랑, 신부를 만나지 않고 주례를 섰던 허억이 이름을 바꿔 부른 것이다. 흔히 '정희'는 여자 이름, '영수'는 남자 이름이다 보니 이런 해프닝이 일어난 것이다.

계산 성당
계산 성당 내부 

33세의 육군 소령 박정희와 25세의 육영수는 6.25 전쟁 중인 1950년 8월에 부산에서 처음 만나 4개월 만에 결혼하였다. 당시 육영수는 충북 옥천의 대지주인 부친 육종관을 따라 부산 영도에서 피난살이 하고 있었다. 

# 박정희의 세 여인 

그런데 박정희에게 육영수는 세 번째 여인이었고, 육영수에게 박정희는 첫 번째 남자였다. 박정희에게 이혼한 첫 번째 부인 김호남과 가출한 이화여대 출신 이현란이 있었다. 

그러면 박정희의 첫 번째, 두 번째 여인에 대하여 전인권과 조갑제의 박정희 관련 책과 ‘조갑제 TV’ 등을 참고하여 자세히 살펴보자.

박정희는 1936년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에 김호남(1920∽1990)과 결혼 하였다. 박정희는 1917년 11월 14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현  경상북도 구미시 박정희로 107 상모동)에서 아버지 박성빈(1871∽1938)과 어머니 백남의(1872∽1949) 사이에서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박성빈은 전형적인 몰락 양반이었다. 그는 본래 부유한 중산계층이었는데 1894년에 동학혁명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처형의 위기를 맞은 이후 술 마시기를 소일거리로 삼은 빈농으로 전락했다.  

박정희는 모친 백남의가 여러 차례 낙태 시도를 하였으나 결국 태어났다. 태중에 워낙 고생한 탓인지 박정희는 훤칠한 아버지나 형들과 비교하여 왜소한 체격이었다. 

모친은 박정희를 극진히 사랑했다. 낙태에 대한 죄의식도 작용했으리라. 박정희는 셋째 형 박상희처럼 구미보통학교에 입학하여 근대식 교육을 받았고, 1932년 3월 구미보통학교를 졸업하고 4월에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19세의 박정희는 1936년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에 16세의 김호남과 억지 결혼을 하였다. 병을 앓고 있던 아버지 박성빈이 죽기 전에 막내 아들이 결혼하는 것을 봐야 한다며  박성빈의 친구 딸과 결혼시킨 것이다. 그런데 박정희는 본인이 원하지 않았던 결혼인지라 김호남에게는 그다지 정이 없었다. 그래도 1937년 11월에 딸 박재옥(1937∽2020)이 태어났다. 

한편 1937년 3월 대구사범을 졸업한 박정희는 4월부터 문경 공립보통  학교 교사로 재직했고, 부인 김호남은 구미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살았다. 

그런데 박정희는 어린 시절부터 군인에 대한 동경과 한국인 교사 차별 문제 등으로 군인의 길을 걸어 1940년 4월에 만주국 육군 군관학교에 입교하였다. 2년제 만주 육사를 수석으로 졸업한 박정희는 1942년 10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1944년 4월에 졸업하였다. 

1944년 7월에 소위 박정희는 일본제국 육군 만주군 보병 제8단(연대 규모)에 배속되었다. 그런데 8월 15일에 해방이 되자, 박정희는 9월에 북경의 한국광복군 제3지대 중대장을 하다가 1946년 5월에 귀국하여 9월에 조선 국방경비사관학교에 입학했다. 

한편 1946년 10월 1일 대구 폭동 사건의 여파로 10월 5일에 셋째 형 박상희(1905∽1946)가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박상희는 일제강점기에   신간회, 1934년 조선중앙일보 지국장, 1935년 동아일보 기자 등 언론인으로 활동하였고, 1940년대 여운형이 결성한 건국동맹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구미지부를 창설하였고, 1946년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산군 지부 사무국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박정희는 박상희의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못하고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올라갔지만, 12월 부터 형 박상희에 대한 복수심과 이재복의 권유로 국군 내 남로당 군사총책으로 활동하였다.   

“셋째 형 박상희의 집을 찾아갔더니 이재복이가 유족을 돌봐주고 있더랍니다. 이재복은 「공산당선언」 같은 책자를 주면서 남로당에 가입하고 형의 원수를 갚으라고 권유하더랍니다.”(전인권, 박정희 평전, p 104-105)

# 이현란과 동거와 남로당 사건  

1947년 가을에 박정희는 춘천에서 있었던 동료 박경원 대위 결혼식에서 이현란(1925∽1993)을 만났다. 이현란은 루시고등여학교 동문인 신부 고금옥의 결혼식에서 신부 들러리를 맡았다. 그녀는 공산당이 싫어서 혈혈단신으로 월남하여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아동교육학과 1학년에 재학중이었다. 결혼식이 끝난 후 이어진 피로연에서, 신혼부부와 하객들은 모두 함께 즐겁게 놀았다.

박정희는 동료이자 이현란의 6촌 오빠 이효 대위에게 부탁하여 이현란를 만났고, 1948년 6월부터 교제를 시작했다. 9월 2일에 박정희는 조선경비사관학교 중대장으로 부임하면서 서울로 올라왔다. 이때부터 박정희는 이현란에게 적극적인 구애 작전을 펴서 이현란과 약혼하고 서울 용산의 관사에서 동거에 들어갔다. 

1948년 8월에 박정희는 소령으로 진급하여 육군본부 작전정보과에서 근무했다. 그런데 10월 19일에 여순(여수 순천)사건이 일어났다.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전라남도 동부 6개 군을 점거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이승만 정부는 대규모 진압군을 파견하여 일주일여 만에 전 지역을 수복하였고, 이 사건을 계기로 강력한 숙군 작업이 단행 되었다.

먼저 남로당 군 총책 이재복이 잡혔다. 이재복에 이어 군사 연락책 김영식이 체포되면서 숙군수사가 급진되었고, 수사팀은 김영식을 통해 명단을 얻게 돠었는데, 이 명단에 '박정희'가 포함되어 있었다. 1948년 11월 11일 박정희는 체포되었다.

얼마 후에 김창룡 소령이 이현란을 찾아와서 경위를 설명해주고 박정희의 메모를 전해주었다. 메모를 읽어보자.

“미안해 어쩔 줄 모르겠다. 이것 하나만 믿어주라. 7기생의 육사 졸업식에 간다고 면도도 하고 아침에 국방부로 출근하니 어떤 사람이 귀뜸해 주더라. 내가 얼마든지 차 타고 달아날 수 있었는데 현란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안 갔다. 이것이 나에게 얼마나 불리한 것인지 아나?” 

그런데 박정희는 수사 과정에서 순순히 자백하면서 군대 내부 남로당  조직원 명단을 제공하고 숙군사업에 적극 협조했다. 이 점을 인정받아 1949년 2월 13일 1심에서 사형을 면하고 “파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2심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되었고 형 집행면제를 받았다. 

1949년 4월부터 박정희는 백선엽의 배려로 비공식 문관으로 육군 전투정보과에서 근무하였다.   

1949년 8월 12일에 박정희의 모친 백남의가 별세했다. 이때 박정희는 동거녀 이현란을 데리고 고향을 찾았다. 모든 가족이 ‘대학생 제수가 온다. 서울 멋쟁이가 온다’고 야단이었지만 이현란의 증언에 따르면 ‘집을 기어서 들어가야 했다’며 박정희 가문의 가난에 너무 놀랐을 뿐이었다. 

더구나 박정희가 결혼하여 딸까지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 이현란은 도망칠 궁리만 했다.  

“그는 요만큼을 가도 나를 데려가려고 해요. 화장실에 오래 있어도 드려다봐요. 내가 달아날까 봐 (전인권, p 103)

두 사람은 싸움이 잦아졌고, 박정희가 손찌검을 할 정도로 발전하여 용산 관사촌에서 알려졌고, 이현란은 멍이 든 얼굴을 하고 다니고 옆집으로 피신한 적도 있었다. 

마침내 1950년 2월 6일 밤에 이현란은 메모를 남기고 영원히 가출하였다. 

메모는 ”그동안 고마웠어요. 마음이 돌아서질 않으니 나를 찾지 마세요. 나를 찾으러 오면 투신자살 하겠어요.“라는 요지였다. 이현란의 가출은 박정희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는 그녀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조갑제 지음, 박정희 2, p 78-79) (계속) 

근대골목투어 2코스

( 참고문헌 )
o 전인권 지음, 박정희 평전, 이학사, 2006
o 조갑제 지음, 박정희 1- 군인의 길, 조갑제 닷컴, 2007
o 조갑제 지음, 박정희 2- 전쟁과 사랑, 조갑제 닷컴, 2007
o 이영호·문무일 지음, 육영수의 사랑 그리고 또 사랑, 행복에너지, 2012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국민권익위원회 청렴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