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칼럼> 해방정국 3년 톺아보기 (9) 미군정 시대 (2)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대한제국 망국사’ 저자 )
조선총독부의 항복을 받은 이틀 후인 1945년 9월 11일 오후 2시 40분에 하지 중장은 아놀드 소장과 헤이워드 중령을 대동하고 첫 기자회견을 하였다. 기자회견은 2시간 40분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자.
“나의 사명을 말한다면,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였는데 그것을 힘써 행하는 데 첫째 사명이고, 둘째 사명은 조선인의 인권과 종교상의 권리를 확보하여 안녕질서를 유지함으로써 정부가 수립되면 그 정부로 하여금 조선을 맡도록 하는데 있다.
포고를 마음에 새기라. 여러분이 알고자 원하고 주목해야 할 것은 맥아더 원수의 제1, 제2, 제3 각호의 포고문일 것이다. 아직도 안 읽지 못한 분이 있다면 잘 읽어주기 바란다.
카이로 회담에서 작성한 것으로 말하면, 조선의 자주독립은 곧 되는 것이 아니고 어느 정도의 시간을 거쳐 적당한 시기가 도래한 후라야 되리라고 했다. 이 적당한 시기라고 하면 곧 조선인의 치안이 잘 되고 못됨에 달렸다. 조선 정부가 수립된다면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에 입각한 정부로서 조선 백성을 위하고 조선 백성으로 되는 정부라야 할 것이다.
나는 조선에 온 뒤로 조선의 역사와 조선의 신문사를 통해서 조선이 어떠한 지경에 처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런만큼 나는 바라노니 부디 여러분은 이 기회를 조선 신문 사상의 일대 혁신 전환 단계로 삼아주기를 바란다. 미국의 여러 신문과 같이 신문의 역할을 다하는데 있어서는 대중을 지도하고 여론을 일으키는 지대한 역할을 하여야 할 것이다.
나는 기왕의 용어를 빌려 말한다면 조선 총독인 셈으로 38도 이남 조선에 있어서 여러 가지 시책을 펴기에 주력하겠다. 행정의 중점은 가급적 속히 조선정부가 수립되고 조선 사람이 조선을 다스려 주기를 원하는데 있다.
나는 군문(軍門)의 무관으로서 외교관이 아닌 동시에 외교관이 되려고도 하지 않는다. 다만 앞으로 조선에 대한 시정방침이 확립되면 그때는 종래의 예와 같은 기만정책을 쓰는 것이 아니라 정정당당히 일반에 공개하고자 한다. 여러분이 대동단결해서 각 직능에 따라 충실히 종사하여 재산을 지키면 그것이 곧 여러분의 것이 되고 국가의 것이 될 것이다.
(...) 현재 조선 안에는 여러 종류의 단체와 조직체가 있으며 이들 중에는 나에게 면담을 청하는 사람도 많은데 이들의 의견은 거의 다 ‘위대한 조선 (Great Korea)’ 건설을 바란다는 한 가지 점에 귀착되고 있다. (...) 나는 통일된 의견과 방책을 듣고자 12일 오후 2시 반에 부민관에서 각계 각 조직체의 대표 2인씩을 만나 나의 일에 협조할 것을 희망한다. (후략)”
이어서 하지 사령관은 개인적 소신을 밝힌 후 기자들과 일문일답에 들어갔다. 주요 사항만 소개한다.
(문) 북위 38도 이남이라지만 그 경계는 어디며, 경성은 미소가 공동 관리를 하게 되는가?
(답) 38도의 경계를 조사하고자 12일 조사대가 출발한다. 경성을 공동 관리한다는 말은 들은 일이 없다.
(문) 조선은 남북으로 양단되고 미소의 정책이 다르기 때문에 조선 통일에 지장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가?
(답) 분할 점령은 한 방편으로 앞으로 조선정부가 생길 때 까지이다. 미국은 역사상으로 본다면 여러 나라가 점령하였지만 그중에서도 연면한 민본주의는 기어코 오늘날과 같이 통일된 것을 나는 역사에서 보았다. 조선도 마찬가지라고 믿는다.
(김기협 지음, 해방일기 1, p 202-215)
9월 12일에 하지 중장은 육군소장 아놀드를 군정장관, 헌병사령관 육군 준장 로렌섬을 경찰책임자, 육군 소장 키량프를 서울시장에 임명하였다.
이어서 하지 중장은 오후 2시 반에 한국 정치인들과 대화를 가졌는데 이를 보고서로 남겼다.
”한국에 정당 혹은 정치단체가 얼마나 있는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랜 탄압과 지하 활동이 빚은 역기능으로 인해 한국인을 하나로 응집시킬 정치적 기능은 완전히 갈래갈래 쪼개진 상태입니다.
(...) 본인은 어제 단체당 2명 참석을 기준으로 정한 정치단체 모임에 갔습니다. 강당에 입장할 때 그들에게 어느 단체에서 왔는지 등록하도록 했습니다. 그날 모임에 참석한 인원은 1,200명이 넘었습니다.
그만큼 의견도 제각각이고 다양했습니다. 단 하나 공통된 것은 일본인 재산을 몰수하고 한국에서 몰아내며 한국의 독립을 즉시 부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들을 빼놓고는 달리 무엇을 바라는지 그들 누구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지난 8월15일에 일본이 항복한 이후 줄곧 휴가를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독립이 되었으므로 모든 걱정에서 자유롭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고, 또 세계가 그들을 도울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미군이 이곳에 진주한 이후 경인지역에서는 산업활동의 기미조차 없습니다. (후략)
(김택곤 지음, 미국 비밀문서로 읽는 한국 현대사 1945-1950, 맥스미디어, 2021, p 136-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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