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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손과 무오사화

무오사화와 김일손 21회- 김일손의 행적에 관한 이종준의 공초

무오사화와 김일손 21

- 김일손의 행적에 관한 이종준의 공초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498719일에 이종준(李宗準 1458~1499)이 김일손의 행적에 대하여 공초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7193번째 기사)

 

이종준은 김종직 문하에서 수학하여 김일손과 친했는데, 이 공초는 김일손이 713일에 진사(進士) 권작(權綽)의 일은 이종준에게 듣고 졸()이라 쓰고, 드디어 기사(記事)를 한 것이라고 진술한 것에 대한 공초였다. 이를 살펴보자.

 

병오(丙午정미(丁未) 연간에 신이 내자직장(內資直長)이 되고 김일손이 내섬 직장(內贍直長)이 되었사온데, 하루는 임금께서 후원에 납시어 활쏘는 것을 구경하옵기로, 신과 일손이 설비를 맡게 되었습니다.”

 

1486-1487년 사이에 이종준은 내자직장(內資直長 7)이고 김일손은 내섬 직장(內贍直長 7)이었다. 내자시(內資寺)는 왕실에서 필요한 각종 물자를 관장하던 호조 소속의 관청으로 왕실에서 사용되는 쌀, 국수, , 간장, 기름, , 채소, 과일 및 내연 직조(內宴織造) 등을 관장하였다. 소속 관원으로는 정(3), 부정(副正3), 첨정(僉正4), 판관(判官5), 주부(主簿6), 직장(直長7), 봉사(奉事8) 1인이 배속되었다. 또 왕실에서 필요한 물품을 직접 제작하기 위하여 옹장(翁匠) 8, 화장(花匠) 2, 방직장(紡織匠) 30, 성장(筬匠) 2인의 공장(工匠)이 배속되었는데, 이들은 도자기 생산과 직조에 관련된 장인(匠人)이었다.

 

 

내섬시(內贍寺)는 각 궁()과 각 전(殿)에 대한 물품을 올리는 일과 2품 이상 관리에게 주는 술, 왜인과 야인에 대한 공궤(供饋), 직조(織造) 등을 관장하던 호조 소속의 관서이다. 관원으로는 제조, (3), 부정(副正3), 첨정(僉正4), 판관(判官5), 주부(主簿6), 직장(直長7), 봉사(奉事8) 1인을 두었다.

 

이종준의 공초는 이어진다.

 

신의 동료 허계(許誡)가 신에게 묻기를 그대가 바로 권작(權綽)의 사위인가?’ 하므로, 신은 대답하기를,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김일손이 말하기를, ‘권작의 사람됨이 어떠한가?’ 하기에 말하기를 신은 말하기를,

권작은 계유년(1453) 진사에 합격하였고, 그 뒤에 죽산(竹山청산현(靑山縣)의 훈도(訓導)가 되었는데, 그 당시 백관의 가자(加資)가 잦았는데도 권작은 성질이 옹졸하여 고신(告身)을 내놓지 아니하고 단지 청산 훈도의 고신만을 내놓았을 따름이다.’라고 말하자, 다시 다른 말이 없었습니다.

 

정미년에 신이 평안도 평사(評事)가 되었는데, 권작은 신에게 편지를 통하여 말하기를, ‘김일손이 청주(淸州)를 지나면서 시를 부쳐 왔다. 이 시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르러 왔느냐?’ 하면서, 그 시를 신에게 부쳤는데, 바로 오언 절구였습니다.

 

그런데 위 두 구는 글자가 지워져서 볼 수가 없었고, 아래 두 구에 이르기를,

 

세상에 자양(紫陽 송나라 유학자 주자)의 붓이 없으니, 世無紫陽筆,

누가 진대(晉代)춘추를 기록하랴? 誰記晋 春秋?

 

하였는데, 신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평안도)평사에서 체임되자, 권작은 신에게 말하기를 일손은 어떤 사람이며, 그 시는 어떠하더냐?’ 하므로, 신은 알지 못하겠다 대답하고, 나중에 일손을 보고서 물었더니, 김일손은 말하기를 계유년(1453년 에 계유정난靖難이 일어났다. 수양대군이 단종의 측근인 황보 인·김종서 등 수십 인을 살해, 제거하고 정권을 잡았다.)에 진사에 합격하고 마침내 벼슬을 아니했으니, 나는 그를 조행(操行)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리 쓴 것이다.’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장인이 두 번째 훈도가 되었으니 벼슬을 안 한 것도 아닌데, 너는 어찌 망령이냐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처럼 김일손은 이종준의 장인 권작을 절개를 지킨 선비라고 사초에 썼는데, 이종준은 김일손의 사초가 망령스럽다고 공초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