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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손과 무오사화

무오사화와 김일손 19회- 김일손, 책문 ‘중흥’에서 1등을 하다

무오사화와 김일손 19

- 김일손, 책문 중흥에서 1등을 하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유몽인의 어우야담과 작자 미상의 기문총화에 실린 김일손의 뛰어난 글솜씨를 계속하여 읽어보자.

 

김일손이 그의 처형제들과 함께 동당시에 응시하였다. 그런데 초장에서 술에 취해 자다가 아무것도 쓰지 않고 돌아왔고, 중장에도 취해 자다가 또 쓰지 않고 돌아왔다. 종장 때가 되자 김일손은 초 · · 종장의 시험 답안지를 모두 붙여 수십 폭을 이어 시험장에 들어갔다. 시관(試官)이 책문의 제목을 중흥이라고 내걸었는데, 역대 중흥주 가운데 송나라 고종이 들어 있었다. 김일손은 제목을 써서 내건 종이를 말아 시관 앞에 나아가 말했다.

 

송나라 고종은 한 귀퉁이에서 피하여 구차하게 안일만 도모하면서 어버이의 원한을 풀어 드리는 일을 잊고, 개돼지 같은 자들에게 화친을 구걸했는데, 어떻게 은나라 고종 및 주나라 선왕과 함께 나란히 중흥주 명단에 놓을 수 있습니까? 고쳐주길 청합니다.”

 

송나라 고종(1107~1187)은 남송(南宋)의 개국황제(開國皇帝)로서 송휘종(宋徽宗)의 아홉째 아들로 송흠종(宋欽宗)의 아우이다. 1127년에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금()나라로 끌려간 후에 남경(南京) 응천부(應天府)에서 즉위했다. 연호를 건염(建炎)으로 삼고, ()나라를 중건했다. 역사서에는 남송(南宋)’이라 일컫는다.

 

그는 금나라에 쫒겨 남쪽으로 도피하여 임안(臨安)을 수도로 삼았다. 악비등 주전론자를 물리치고 진회등 주화론자를 등용하여 금나라와 굴욕적인 화의를 맺었다.

 

이러자 시관이 크게 부끄러하며 그의 말대로 제목을 고쳐 주었다. 김일손은 취기가 거나하게 오르자 일필휘지로 수십폭을 내리 쓰고 돌아왔는데, 해가 아직 기울지도 않았다.

 

그의 장인이 아들에게 물었다.

김서방은 오늘도 또 아무것도 쓰지 않고 왔느냐?”

 

아들이 대답했다.

 

오늘은 황당하고 어지러운 언사를 하며 더럽게 먹칠만 하고 있는데,

무슨 말을 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내걸린 날이 되자 김일손은 사람을 시켜 가보라 하면서 다음과 같이 일렀다.

 

너는 가서 맨 위 첫 번째 이름만 보고 오너라. 그것이 내 이름이 아니거든 즉시 돌아올 것이요. 더는 볼 필요가 없다.”

 

그 사람이 가보니 과연 김일손이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처가에서는 크게 놀라 그제야 그를 대접함에 공경을 다하였다. (유몽인 지음, 신익철 외 3인 옮김, 어우야담, 돌베개, 2006, p 421-422 : 김동욱 옮김, 국역 기문총화 상새벽 강가에 해오라기 우는 소리, 아세아문화사, 2008, p 357-360)

 

탁영선생문집탁영선생 연보를 보면 김일손은 148210월에 두 형(김준손, 김기손)과 함께 정시에 나갔으나 일부러 병을 칭탁해 시험을 보지 않았고, 두 형은 급제하였다. 그런데 그는 1483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1485년에 상복을 벗었다. 김일손은 1486(성종 17) 7월에 초시에 합격하고 8월에 복시에도 합격하였다. 9월에 식년 정시 초시 3장에 연달아 수석으로 합격하고, 10월에 복시 중흥(中興) 책문에 제1인으로 합격하였다.

 

탁영선생문집에는 중흥에 대한 책문과 김일손의 대책이 실려있다.

 

책문의 첫 부분을 읽어보자.

 

자고로 제왕이 나라를 일으킬 때는 한무리의 군사로서 능히 천하를 취하여 대업(大業)을 이루었으나, 그 자손이 도리어 지켜 내지 못할 뿐 아니라 쇠약해져서 떨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나라의 개창(開創)고 수복(收復)이 그 형세가 다른 것인가?”

 

(김일손 지음, 김학곤·조동영 옮김, 탁영선생문집, 탁영선생 숭모사업회, 2012, p 323-339, 688-6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