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와 김일손 22회
- 김일손의 행적에 관한 정여창의 공초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498년 7월 13일에 연산군은 어서(御書)를 내려 김일손에게 물었다.
"탄(坦)이라는 선사(禪師)가 정분(鄭苯)의 시구(屍柩)를 보호한 일을 썼는데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느냐? 소릉(昭陵)을 복구하기를 청하고, 난신(亂臣)들을 절개로 죽었다고 쓴 것은 네가 반드시 반심(反心)을 내포한 것이다."
이에 김일손은 공초하였다.
“신의 사초(史草)에, 세조 조에 관한 일은 혹은 허반에게도 들었고 혹은 정여창에게도 들었고 혹은 최맹한·이종준에게 들었는데, 이 무리들이 모두 믿을 만한 자들이기 때문에 실지라 생각하고 쓴 것입니다.
... 소릉의 복구를 청한 것과 난신(亂臣) 등을 사절(死節)로 쓴 것은, 황보인·김종서·정분 등이 섬기는 바에 두 마음을 갖지 않았으니, 제왕이 마땅히 추앙하고 권장할 일이기 때문에 정분을 들어 전조(前朝)의 정몽주에게 비하였고, 황보인·김종서를 쓰면서 절개로 죽었다 한 것입니다.”
정분(1394~1454)은 1452년(단종 즉위년)에 김종서의 천거로 우의정에 올랐다. 1453년 10월에 수양대군이 주도한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인·김종서 등이 주살되자 정분도 하3도 체찰사로 임무 수행 중 충주에서 체포되어 전라도 낙안에 안치되어, 고신(告身)을 추탈 당한 뒤 낙안의 관노가 되었다. 이후 1454년에 광양에서 교형을 당했다.
7월 19일에 정여창(1450∼1504)이 공초하였다.
김일손은 1488년에 진주목학(晉州牧學) 교수로 있을 때 함양에서 정여창을 만났고 1489년 4월에는 함께 두류산(지리산)을 산행할 정도로 두 사람은 친했다.
"지난 기유(1489년) 연간에 일손과 더불어 지리산에서 노니는데, 말이 선가(禪家)의 일에 미쳐서 신이 일손에게 말하기를 ‘탄(坦)이라는 선사(禪師)는 젊어서 우리 아버지와 놀던 사이로, 아버지가 작고한 뒤에도 자주 나를 찾아 왔습니다.
탄 선사가 말하기를 ‘정분이 여묘(廬墓)를 지키고 있을 적에 처음 사귀게 되었고 그가 광양으로 부처(付處)되어서도 역시 찾아가서 상종했다. 하루는 고을 사람이 와서 조관(朝官)이 서울로부터 내려온다고 말하더니, 이윽고 관차(官差)가 와서 정분더러 고을 안으로 들어가자고 재촉하자, 정분은 목욕하고 관을 쓰고 띠를 띠고 그 선대 신주(神主)를 끌어내어 두 번 절한 다음에 쪼개서 불태워 버리고, 드디어 관대를 벗어 버리고 비옷을 입고 수건을 동이고 아내와 더불어 영결하고 나가니, 그 아내가 옷자락을 잡고 곡하므로 정분은 말리며 말하기를 ‘조정의 명령을 거역하기 어려우니 나 죽은 뒤에는 모든 일을 네가 다스리라.’하였다. 관차가 또 재촉하므로 정분은 따라가니, 서울로부터 내려온 감형관(監刑官)이 장차 내일 형을 집행할 계획으로써 구금하고자 하여 관에 들어올 것을 독촉하였다. 정분은 응하지 아니하고 물러가 문밖에 서며 말하기를, ‘어찌 반드시 들어가야만 하느냐. 이 자리에서 죽겠다.’ 하니, 감형관이 현관(縣官)과 더불어 사람을 시켜 장차 목을 매려 하자, 정분은 말하기를, ‘죽는 건 마찬가지다. 그러나 명절(名節)은 다름이 있으니, 내가 만약 두 마음이 있었다면 죽은 뒤에 날씨가 여전히 청명할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반드시 천변(天變)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정분이 죽자 갑자기 구름이 뭉치고 비가 내리기 시작하니, 두 관원은 우산을 받치고 현내(縣內)로 들어가고, 나는 호상(護喪)하여 섬진강에 와서 작별을 고하니, 정분의 아내가 울며 나에게 말하길 ’가옹(家翁)이 평안 관찰사가 되었을 때 중을 대우하기를 몹시 정성스럽게 하더니 오늘을 위한 것이었나보다’ 라고 했습니다.
을묘년(1495년, 연산군 1년)에 신이 안음현감이 되자 김일손이 신에게 편지를 통하여, 탄(坦) 선사의 일을 기록해서 보내달라고 청하므로, 신의 생각에 중이란 본시 농담이 많아서 믿기가 어려울 뿐더러, 그 말한 바 청명한 하늘에 갑자기 비가 내린 것과 명일에 형을 집행하려 하다가 정분이 문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당일로 형을 집행하였다는 등의 일이 사실이 아닌 것 같아서, 처음에는 써서 보내 주려고 아니했다가, 정분이 조용히 사형장에 나아갔고 탄(坦)도 가히 취신(取信)할 만한 것이 있으니, 전(傳)을 만들어도 좋을 것 같아서 써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말미에 ‘탄 선사의 말을 꼭 믿을 수는 없다.’고 썼습니다.
그 후에 황간현감 김전이 신의 임소(任所)에 찾아와서 ‘일손이 탄선사(坦禪師)의 일을 사초에 기록하였다.’고 말하므로, 신은 놀라며 말하기를 ‘그 일은 믿기 어려운데 어떻게 쓴단 말이냐’ 하였습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9일 3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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