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와 김일손 17회
- 실록청 당상 이극돈의 상소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7월 19일에 이극돈(1435∼1503)이 사초 일로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이극돈은 김일손의 사초를 고치지 않고 7월 9일에 어세겸 이하 실록청 관원들이 모여 함께 보고, 무릇 국가의 일에 관계된 것은 모두 부표하여 봉해 두었다가 7월 16일에 입계하였다고 변명하면서, 김일손과의 개인적인 원한(怨恨) 세 가지를 언급했다.
“첫 번째는 1486년(성종 17년)에 신이 윤필상·유지와 함께 시관(試官 과거 시험관)이 되어 예조에 있는데, 김일손(1464∽1498)이 거자(擧子 과거 보는 선비)가 되었습니다. 신은 본래 김일손이 문장에는 능하나 심술이 범람하다는 말을 듣고, 대작(代作)이 있을까 두려워 중장(中場)·종장(終場)의 제술을 모두 월대(月臺) 위에 두고 제술하게 했습니다. 고시하는 날이 되어 한 권의 잘 지은 것이 있었는데 말이 격식에 많이 맞지 않았습니다.
좌중이 능작(能作)이라 하여 1등을 주고자 하였으나 신은 홀로 말하기를, ‘과장의 제술은 정식(程式)이 있는데, 이 시권(詩卷)이 아무리 능작이라 할지라도 정식에 맞지 아니하니 1등에 두어서는 안 된다.’ 하였더니, 좌중에서 다 그렇게 여기어 마침내 2등에 두었습니다.
나는 사사로 좌중에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김일손의 제작일 것이다. 이 사람이 본시 격식에 구애받지 아니하니 마땅히 제재하여 중(中)에 가게 해야할 것이다.’하였사온데, 이것이 김일손의 맨 처음 원망을 맺은 곳이었습니다.”
두 번째 원한은 김일손의 이조낭청 추천 때문이었다.
“그 후에 신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김일손이 근친하는 일로 인해 고향에 돌아왔으나 한 번도 대면하지 않았었고, 또 뒤에 신이 이조 판서가 되었을 적에 이·병조 낭청들이 다 추천하여 (김일손을) 낭청으로 삼자고 했는데, 신은 그 사람(김일손을 말함)이 착하지 못하기 때문에 장차 홍문관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핑계대고 망(望)에 갖추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 이조 낭청이 다시 추천했는데도 신은 역시 불가하다 했었고, 그 후에 병조 당상이 강력히 추천한 후에야 비로소 병조좌랑을 얻었으니, 이것이 제2의 원망을 맺은 곳입니다.”
이어서 이극돈은 세 번째 원한을 언급했다.
“지금 또 그 사초(史草)를 봉하고 일이 발로되게 하였으니, 이것이 제3의 원망을 맺은 곳입니다. 신은 김일손과 나이가 너무도 차이가 있을 뿐더러 사는 곳도 서울과 시골이 각각 다른 까닭에 잠깐도 서로 구하는 일이 없었으니, 신이 김일손에게 무슨 혐의가 있사오리까. 신이 하는 바는 다 공사로 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극돈은 사실대로 아뢰지 않았다. 이극돈은 김일손이 사초에 기록한 자신의 비행을 사전에 열람했다. 이극돈의 비행은 세조 때 불경을 잘 외운 덕으로 전라도 관찰사가 된 것과, 전라도 관찰사 시절에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貞熹王后 1418∼1483)가 상(喪)을 당했는데, 이극돈은 전라도 장흥의 관기(官妓)와 더불어 술자리를 베풀었다는 사실이었다.
이극돈은 김일손에게 이 비행을 사초에서 빼어 달라고 요청 했지만 김일손은 거부했다. 이러자 이극돈은 김일손의 사초에 세조 때의 불온한 일이 있다는 사실을 한치형·노사신·유자광 등에게 알린 것이다.
이어서 이극돈은 이목과 임희재이 자기를 모함하여 반드시 사지(死地)에 몰아넣으려고 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라고 아뢰었다.
이극돈의 상소는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그 밖에도 이 무리들이 나를 원망하고 나를 꾸짖은 욕설을 어찌 다 성명하신 전하께 아뢰오리까. 신의 나이 70이 가까운데 젊어서부터 사람들을 해롭게 하거나 탐욕 부리는 일이 없사온데, 유독 김일손·이목·임희재에게만 사사로운 원한이 있을 리 있사오리까.
신이 이미 죄과를 범했사옵고 또 사람의 훼방을 입었사옵기로, 신경이 착란하여 말의 지루함을 망각하였사오니, 개운하지 못하고 번거롭게 한 죄는 피할 길이 없사옵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9일 2번째 기사)
이극돈의 상소를 읽은 연산군은 이극돈의 소(疏)를 추관(推官 중죄인을 심문하는 관원)에게 보이며 "이 소(疏)가 어떠하냐?"며 의견을 물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9일 9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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