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와 김일손 - 10회 단종은 죽임 당했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중종 때 문신 호조참의 이맥도 ‘단종은 죽임을 당했다’고 말했다.
“일찍이 듣건대, 노산이 세조께 전위(傳位)하였는데 세조께서 즉위한 뒤 인심이 안정되지 않으므로, 부득이 군(君)으로 강등하여 봉하였다가 죽임을 내렸다 합니다.” (중종실록 1516년 11월 23일)
또한 인조 때 문신 나만갑은 『병자록(丙子錄)』에서 『세조실록』과 전혀 다르게 적었다.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에 이르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나장(羅將)이 시각이 늦어지다고 발을 굴렀다. 왕방연은 하는 수 없이 들어가 뜰 가운데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나와서 온 까닭을 물었으나, 왕방연은 대답을 못하였다.
통인(通引) 하나가 항상 단종을 모시고 있었는데, 스스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겼다. 통인이 미처 문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아홉 구멍에서 피가 흘러 즉사하였다.
시녀와 시종들이 다투어 고을 동강(東江)에 몸을 던져 죽어서 둥둥 뜬 시체가 강에 가득하였고, 이날에 뇌우(雷雨)가 크게 일어나 지척에서도 사람과 물건을 분별할 수 없고 맹렬한 바람이 나무를 쓰러뜨리고 검은 안개가 공중에 가득 깔려 밤이 지나도록 걷히지 않았다.”
한마디로 영월 청령포로 유배 간 단종은 1457년 10월 하순에 영월 관풍헌 앞마당에서 죽임을 당했다.
아울러 『세조실록』에 “예(禮)로써 장사지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단종의 시신은 방치되어 있었는데 고을 향리인 호장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거두었다. 그는 아들 3형제와 함께 미리 준비한 관을 지게에 지고 단종의 시신을 염습하여 영월 엄씨의 선산인 동을지산(冬乙旨山 현재의 장릉)으로 향했다.
주변 사람들이 역적을 비호했다고 화를 입을 것을 염려하여 간곡히 말렸으나, 엄흥도는 “옳은 일을 하다가 그 어떤 화를 당해도 나는 달게 받겠다.”라고 말하면서 단종의 시신을 거두었다.
이때는 10월 하순이어서 산에는 함박눈이 쌓였고 날씨도 추웠다. 엄흥도는 잠깐 쉬려고 하는데, 갑자기 노루 한 마리가 사람들의 인기척에 놀라 달아났다. 노루가 달아난 자리를 보니 눈이 녹아 있었다. 엄흥도는 이곳에 지게를 내려놓고 잠시 쉬었다. 조금 있다가 엄흥도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은 깊은 산속으로 가려고 하자 관이 얹혀 있는 지게가 움직이지 않았다. 엄흥도는 ‘이곳이 명당인가 보다’고 생각하면서 노루가 앉아 있던 그 자리에다가 단종의 시신을 몰래 묻고서 종적을 감추었다.
그런데 1669년 1월 5일의 『현종실록』에는 단종 죽음에 관한 진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노산군이 살해당한 후 아무도 시신을 거두어 돌보지 않았었는데, 그 고을 아전 엄흥도가 곧바로 가서 곡하고, 관곽을 준비해 염하여 장사를 치렀으니, 지금의 노산군 묘가 바로 그 묘입니다.”
한편 1498년 7월 13일에 김일손은 노산군의 시신에 대한 공초 후에 조의제문에 대하여도 공술하였다.
"사초(史草)에 이른바 ‘노산(魯山)의 시체를 숲속에 던져버리고 한 달이 지나도 염습(斂襲)하는 자가 없어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서 쪼았는데, 한 동자가 밤에 와서 시체를 짊어지고 달아났으니, 물에 던졌는지 불에 던졌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한 것은 최맹한에게 들었습니다. 신이 이 사실을 기록하고 이어서 쓰기를 ‘김종직이 과거하기 전에, 꿈속에서 느낀 것이 있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충분(忠憤)을 부쳤다.’ 하고, 드디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썼습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3일 3번째 기사)
조의제문은 서초패왕 항우에게 살해된 초나라 의제(義帝)를 조문하는 글인데 김종직이 1459년 과거에 급제하기 전인 1457년 10월에 지었다.
조의제문의 첫 부분을 읽어보자.
“정축 10월 어느 날에 나는 밀성(密城)으로부터 경산(京山)으로 향하여 답계역(踏溪驛)에서 자는데, 꿈에 신(神)이 헌칠한 모양으로 와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초(楚)나라 회왕(懷王)의 손자 심(心 의제)인데, 서초패왕(항우)에게 살해되어 빈강(郴江)에 잠겼다.」 하고 문득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김일손은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지어 충분(忠憤)을 부쳤다’ 고 사초에 기록하고는 조의제문 전체를 수록했다.
충분(忠憤)은 ‘충의분발(忠義憤發)’ 즉 충의로 인하여 일어나는 분한 마음이다.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지어 충분(忠憤)을 부쳤다’고 했으니 정치공작의 달인 유자광이 눈치 못 챘을 리 없다. 2일 후인 7월 15일에 조의제문이 전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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