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와 김일손 8회 – 사육신의 절개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498년 7월 12일에 김일손은 “이개·최숙손이 서로 이야기한 일과 박팽년 등의 일과 김담이 하위지의 집에 가서 위태로운 나라에는 거하지 않는다고 말한 일과, 이윤인이 박팽년과 더불어 서로 이야기 한 일과, 세조가 그 재주를 애석히 여기어 살리고자 해서 신숙주를 보내어 효유하였으나 모두 듣지 않고 나아가 죽었다는 일은 모두 고(故) 진사(進士) 최맹한에게 들었다."고 진술하였다. (1498년 7월 12일 5번째 기사)
그러면 김일손의 진술을 하나씩 살펴보자. 먼저 이개·최숙손이 서로 이야기한 일이다. 이개와 최숙손이 서로 이야기 한 일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이개는 사육신의 한 사람이고 최숙손은 최윤덕 장군의 맏아들이다. 최숙손은 1456년(세조 2) 6월 26일에 단종복위운동과 관련되어 아들 최맹한과 함께 직첩이 거두어지고 유배되었다.
둘째, 박팽년 등의 일이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다. 사육신 박팽년은 부친 박중림, 형제들인 박인년 · 박기년 · 박대년 · 박영년, 박팽년의 아들 박헌 · 박순 · 박분, 매제 봉여해가 모두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었다.
셋째, 하위지의 집에 가서 위태로운 나라에는 거하지 않는다고 말한 김담(金淡)이 누구인지도 알 수가 없다.
넷째, 이윤인이 박팽년과 더불어 서로 이야기 한 일도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다섯째, ‘세조가 그 재주를 애석히 여기어 살리고자 해서 신숙주를 보내어 효유하였으나 모두 듣지 않고 나아가 죽었다는 일’은 『홍재전서』 등 여러 사료에 자세히 나온다.
1456년 6월 3일에 세조는 믿었던 신하들이 반역을 했다고 생각하여 화가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세조는 집현전 학사 출신 박팽년 · 하위지 등의 재주를 아껴서 그들이 죄를 뉘우치면 살려줄 생각도 있었다. 세조는 비밀리에 신숙주를 시켜서 박팽년과 하위지를 회유했다.
신숙주는 의금부 감옥에서 은밀하게 박팽년부터 만났다. 신숙주는 집현전 시절부터 박팽년과 친했으니 말이 통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박팽년은 죽음의 길을 택했다. 신숙주는 하위지도 접촉했으나 하위지는 ‘반역자는 응당 죽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했고, 이개도 마찬가지였다.
한편 박팽년 등은 의금부 감옥 안에서 그 유명한 ‘사육신 충의가’를 불렀다.
먼저 박팽년이 읊었다.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 밤인 듯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개도 폐부를 도려내는 애잔한 시를 읊었다.
창안에 혔는 촛불 눌과 이별하였관대
겉으로 눈물지고 속 타는 줄 모르는가
저 촛불 나와 같아서 속 타는 줄 모르더라.
곁들여서 성삼문의 절의시도 살펴본다.
이 몸이 죽어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1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그런데 박팽년은 의금부 감옥에서 죽었다. 『홍재전서(弘齋全書)』 ‘제60권 잡저(雜著) 7’을 읽어보자
”증 이조판서 행 형조 참판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 판서 중림(仲林)의 아들이며, 자는 인수(仁叟)이다. (중략) 1456년(세조 2)에 성삼문 등과 상왕의 복위를 모의하다가 수감되었을 적에 세조가 그의 재주를 아까워 하여 몰래 타이르기를, “네가 나를 섬기면 마땅히 너를 사면하리라.” 하니, 박팽년이 웃으며 대답도 않고, 상을 부를 적이면 그때마다 ‘나리(進賜)’라고 하여, 상이 “그대가 일찍이 나에게 신하라고 하고서 감히 그럴 수 있는가.” 하자, 답하기를, “내가 어떻게 나리의 신하라는 말이오. 저번에 관찰사로 있을 적의 장독(狀牘)에도 신(臣)이라 일컬은 적은 없습니다.” 하였는데, 장독을 비교하여 보니 모두 ‘거(巨)’ 글자였다.
옥중에서 죽자 광묘(세조)가 일컫기를, “팽년 등은 당세의 난신이요, 후세의 충신이다.” 하였다. (후략)”
사육신, 이들은 세조도 후세의 충신이라고 했듯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화신(化身)이 되었다.
그런데 사육신이 충절의 아이콘이 된 것은 생육신 남효온(1454∼1492)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에 기인한다. 그는 1489년에 고향 의령에서 박팽년·성삼문·하위지·이개·류성원·유응부의 충절을 기리는 ‘육신전’을 집필했는데, 각종 역사 기록은 이들 여섯 사람을 ‘육신(六臣)’으로 지칭했다. 아울러 남효온의 ‘육신전’을 감수한 이가 바로 김일손이었다.
'김일손과 무오사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오사화와 김일손 - 10회 단종은 죽임 당했다. (0) | 2023.06.29 |
---|---|
무오사화와 김일손: 9회 김일손, 노산군의 죽음을 사초에 기록하다 (0) | 2023.06.27 |
길 위의 역사 2부 – 무오사화 119회 김종직의 화도연명 술주시 (4) (0) | 2021.03.29 |
[RBS역사칼럼-길 위의 역사] (2부 무오사화) - 115회 김종직이 ‘도연명의 술주시를 화답한 시’ (3)•김세곤 칼럼니스트 (0) | 2020.11.09 |
[RBS역사칼럼-길 위의 역사] (2부 무오사화) - 114회 김종직이 ‘도연명의 술주시를 화답한 시’ (2) (0) | 2020.1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