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와 김일손: 9회 김일손, 노산군의 죽음을 사초에 기록하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498년 7월 13일에 김일손은 노산군의 일에 대하여 공초하였다.
“사초(史草)에 이른바 ‘노산(魯山)의 시체를 숲속에 던져버리고 한 달이 지나도 염습(斂襲)하는 자가 없어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서 쪼았는데, 한 동자가 밤에 와서 시체를 짊어지고 달아났으니, 물에 던졌는지 불에 던졌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한 것은 최맹한에게 들었습니다.
신이 이 사실을 기록하고 이어서 쓰기를 ‘김종직(金宗直)이 과거하기 전에, 꿈속에서 느낀 것이 있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충분(忠憤)을 부쳤다.’ 하고, 드디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썼습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3일 3번째 기사)
노산군 즉 단종(1441∼1457, 재위 1452∼1455)의 시신에 관한 김일손의 공초는 신숙주·한명회가 편찬한 『세조실록』과 정면 배치되는 내용이었다.
1457년(세조 3) 10월 21일자 『세조실록』에는 “이유(李瑜 금성대군)는 사사(賜死)하고, 송현수(단종의 장인)는 교형에 처했다. 노산(魯山)이 이를 듣고 스스로 목을 매어 졸(卒)하니, 예(禮)로써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노산군이 스스로 자살을 하여 예로써 장사를 지냈다는 것이 공식 입장인데, 김일손은 사초에 ‘노산군의 시신이 한 달 이상 방치되었다’고 적었으니 이는 보통 사건이 아니었다.
그러면 단종의 죽음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자.
1456년 6월에 사육신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세조는 상왕 단종에 대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 대신 금성대군(세종의 여섯째 아들) · 화의군 · 한남군 · 영풍군 · 정종(문종의 부마, 단종의 매형)등을 먼 지방에 유배보냈다.(세조실록 1456년 6월 26일)
금성대군은 경상도 순흥에, 한남군 이어는 함양에, 화의군 이영은 전라도 금산에, 영풍군 이전은 임실에, 정종은 광주(光州)에 안치되었다.
그런데 1457년 1월 29일에 세종의 형인 양녕대군이 여러 종친들을 거느리고, 영의정부사 정인지는 육조 참판 이상 관원을 거느리고서 상왕 단종을 밖에 나가 거처하게 하도록 아뢰자, 세조는 단종을 창덕궁에서 금성대군 저택에 유폐했다. (세조실록 1457년 1월 29일)
그런데 2월 8일에 세조는 명나라 정통제(正統帝, 1427~1464)가 1월 17일에 복위(復位)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정통제는 1449년 토목(土木)의 변(變)으로 몽고의 야센(也先)에게 포로가 되자 그 이복아우 경종이 경태황제가 되었는데, 1450년에 정통제가 풀려나오자 형제간에 왕위를 둘러싸고 대립하다가, 1457년에 복위한 것이다.
6월 3일에 세조는 명나라 사신을 모화관에서 맞이하였고, 명 사신은 경복궁에서 복위 조서(詔書)를 반포하였다.
세조와 그의 신하들은 극도로 불안했다. 명나라에서 상황이 복위되었으니 조선에서도 상왕 단종 복위를 도모할 수 있어서 위기감이 돌았다.
이에 정인지 · 신숙주 등 세조의 측근들은 단종을 살려둘 수 없다고 판단하고 계략을 꾸민다. 6월 21일에 백성 김정수가 전 예문제학 윤사윤에게 "판돈녕부사 송현수(단종비 송씨의 아비)와 행 돈녕부판관 권완(단종의 후궁 권씨의 아비)이 반역을 도모합니다."라고 말하니, 윤사윤이 세조에게 아뢰었다.
이러자 세조는 영의정 정인지·우의정 정창손·우찬성 신숙주·도승지 한명회·동부승지 김질 등을 부르고 송현수와 권완을 의금부에 하옥시켰다.
이는 날조된 무옥(誣獄 죄가 있는 듯이 꾸며 죄를 다스림)이었다.
이어서 세조는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시켜 강원도 영월로 유배 보냈다. (세조실록 1457년 6월 21일)
1457년 6월 말에 정국은 또 다시 들끓었다. 6월 27일에 안동의 관노 이동(李同)이 경상도 순흥에서 유배 중인 금성대군(세종의 여섯 째 아들)의 모반을 고변했다. 7월 9일에는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 복위를 도모한 것이 발각되었다.
이러자 9월 10일에 신숙주·정인지 등은 금성대군과 노산군을 사사(賜死)토록 세조에게 청했다. 10월 16일에는 종친, 충훈부·육조에서 노산군과 금성대군의 처벌을 청했고, 10월 18일에는 양녕대군·효령대군까지 나섰다. 10월 21일에는 양녕대군과 영의정 정인지가 주동하여 종친과 대신들을 모두 동원시켜 노산군과 금성대군 · 송현수 · 영풍군 등을 사사(賜死)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세조는 금성대군은 사사하고, 송현수를 교형에 처했다. 노산군은 스스로 목매어서 자살하자 예(禮)로써 장사지냈다 (세조실록 1457년 10월 21일)
그러면 『세조실록』이 사실일까? 단종이 자살한 것이 맞는가? 세조가 단종의 시신을 예(禮)로서 장사지낸 것일까?
후세 사람들은 단종은 자살 안 했다고 말한다. 중종 때 문신 이자(1480∼1533)는 『음애일기(陰崖日記)』에서 “실록에서 ‘노산군이 금성대군의 실패를 듣고 자진(自盡)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당시의 여우나 쥐 같은 무리들의 간악하고 아첨하는 붓장난이다. ‘실록‘을 편수한 자들이 모두 세조를 쫒던 무리들 아닌가?”라고 혹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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