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와 김일손- 11회 유자광, 조의제문을 지은 김종직의 논죄를 청하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498년 7월 15일에 유자광은 김종직(1431∼1492)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구절마다 풀이해서 아뢰었다.
유자광 : “이 사람이 감히 이러한 부도(不道)한 말을 했다니, 청컨대 법에 의하여 죄를 다스리시옵소서. 문집(文集)과 판본을 다 불태워버리고 간행(刊行)한 사람까지 아울러 죄를 다스리시기를 청하옵니다.”
연산군 : “어찌 이러한 마음 아픈 일이 있단 말이냐. 의의(議擬 의논하고 헤아림)하여 아뢰도록 하라. (후략)”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5일 4번째 기사)
이윽고 유자광과 윤필상이 의논하여 전지(傳旨임금의 명을 받드는 문서)를 만들어 김종직의 죄를 논하려 하였다.
이 때 대사헌 강귀손이 아뢰었다.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이 뜻을 알게 한 후에 죄를 결정하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강귀손은 윤필상과 유자광이 독단으로 죄를 논하는 것을 견제한 것이다.
이러자 연산군은 “오늘에야 비로소 대간이 있음을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이처럼 연산군은 대사헌 강귀손에 대하여 상당히 너그러웠다.
그것은 강귀손과의 특별한 관계 때문이었다. 연산군은 첫 돌도 채 되기 전에 심한 중병을 앓았다. 이러자 왕실에서는 법도 있는 집에 옮겨 병을 낫게 한다는 관례에 따라 좌찬성 강희맹(1424∼1483 강귀손의 부친)의 집에 연산군을 보냈다. 강귀손의 모친 안씨 부인은 지극 정성으로 연산군을 잘 돌보아 쾌유시켰으며, 이후 개구쟁이인 연산군의 위기를 지혜로써 구해 주었다 한다.
한편 유자광은 강귀손이 유자광의 전횡을 견제하는 발언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독단적으로 전지를 만들려고 하였다.
이러자 강귀손은 말하기를 ‘당연히 승정원으로 하여금 주장하게 해야 한다.’ 하매, 여러 재상들이 다 ‘그렇다.’ 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5일 5번째 기사)
임금의 명령문서는 승정원(요즘의 대통령비서실) 소관이다. 설혹 비선 실세가 명령문서에 간여하더라도 명령문은 승정원을 거쳐서 의정부에 보내져야 한다. 이점에 대하여 여러 재상들도 강귀손의 의견에 동조했다.
7월 16일에도 조의제문 논의는 계속되었다. 연산군이 먼저 전교하였다.
"세조께서 일찍이 김종직을 불초(不肖)하다 하셨는데, 김종직이 이것을 원망하였기 때문에 글월을 지어 기롱하고 논평하기를 이에 이른 것이다. 신하가 허물이 있으매 임금이 책했다 해서 이렇게 하는 것이 가한가. 여러 재상들은 알아 두라.“
그런데 김종직이 세조가 꾸지람한 것을 원망하여 조의제문을 지었다는 연산군의 전교는 전후가 안 맞는다. 김종직은 1459년에 과거에 급제했고, 1457년에 조의제문을 지었다. 따라서 세조가 김종직을 문책한 것은 1459년 이후 일이었을 것이니 조의제문과는 관련이 없다. 이렇게 연산군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 김종직을 궁지로 몰았다.
이윽고 윤필상 등이 함께 의논하여 김종직의 문집 편집자를 국문하기를 청하니, 대사헌 강귀손이 말하였다.
"편집한 자가 만약 그 글 뜻을 알았다면 죄가 참으로 크지만, 알지 못했다면 어찌할 것인가?"
이에 윤필상 등이 아뢰었다.
"신 등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보니, 그 의미가 깊고 깊어 김일손의 ‘충분(忠憤 충의로 생기는 분한 마음)을 부쳤다.’는 말이 없었다면 진실로 해독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 뜻을 알고 찬집하여 간행하였다면 그 죄가 크오니, 청컨대 국문하소서."
윤필상 등도 7월 13일의 김일손의 공초가 없었다면, 조의제문의 의미가 깊고 깊어 제대로 해독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하지만 유자광은 "어찌 우물쭈물하는가?"라고 말하면서 "어찌 머뭇머뭇하는가?"라고 채근하였다.
유자광은 대사헌 강귀손을 다그쳤다. 편집 및 간행 관련자를 즉시 국문하라고 한 것이다.
이에 강귀손이 아뢰었다.
"처음 찬집자의 국문을 청하자고 발의할 때에, 신은 말하기를 ‘그 글뜻이 진실로 해득하기 어려우니, 편집한 자가 만약 그 뜻을 알았다면 진실로 죄가 있지만, 알지 못했다면 어찌하랴.’ 하였는데, 유자광의 말이 ‘어찌 우물쭈물하느냐?’ ‘어찌 머뭇머뭇하느냐?고 하니, 신이 실로 미안하옵니다. 김종직의 문집은 신의 집에도 역시 있사온데, 신은 일찍이 보고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신은 듣자오니, 조위가 편집하고 정석견이 간행했다 하옵는데, 이 두 사람은 다 신과 서로 교분이 있는 처지라서, 지금 신의 말은 이러하고 유자광의 말은 저러하니, 유자광은 반드시 신이 조위 등을 비호하고자 하여 그런다고 의심할 것이니, 신은 국문에 참예하기가 미안합니다. 청컨대 피혐하겠습니다."
강귀손도 집에 있는 문집에서 조의제문을 보았으나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윤필상 등도 마찬가지였다. 오로지 유자광만이 조의제문이 세조를 비난한 글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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