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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손의 후손들

순례자의 노래 (48)- 김시습, 강원도 춘천 등을 방랑하다.

순례자의 노래 (48)

- 김시습, 강원도 춘천 등을 방랑하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483319일에 김시습은 서울 수락산에서 육경(六經 시경·서경·역경·예기·춘추·주례),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역사서를 수레에 싣고 두타(頭陀) 즉 탁발승(托鉢僧)의 모습으로 강원도 춘천으로 떠났다. 두타는 간단한 옷을 걸치고 걸식을 하되 음식을 줄이고 나무 아래나 묘지에 살며, 앉을 때는 가부좌를 하고 잘 때도 눕지 않는 방랑길이었다.

 

춘천에서 김시습은 소양정(昭陽亭)을 둘러보고 오언 율시 3수를 지었다.

 

1수를 읽어보자

 

새 너머 하늘은 끝나려 하고 鳥外天將盡

근심 끝에 한은 그지없어라 吟邊恨未休

산은 첩첩 북을 따라 굽이쳐 가고 山多從北轉

강은 절로 서쪽 향하여 흐르는구나 江自向西流

 

먼 물가에 기러기 내려와 앉고 雁下汀洲遠

그윽한 옛 기슭엔 배 돌아오네 舟回古岸幽

어느 때에야 속세 그물 벗어나 何時抛世網

흥 타고 여기서 다시 놀아볼까 乘興此重遊

 

이어서 김시습은 청평사(淸平寺) 세향원(細香院)에 한동안 머물렀다. 청평사는 973(고려 광종 4)에 중국의 영현 선사가 경운산(오봉산의 옛 이름)에 절을 짓고 백암서원이라 했는데, 1068년에 춘주도(春州道) 감창사 이의가 보현원을 세웠고, 이의의 아들 이자현(10611125)이 곡란암을 짓고 참선을 하였다.

 

김시습은 청평사에서 길손이 있어(有客)’을 시를 지어 고독과 초탈의식을 드러냈다. (‘유객(有客)’이라는 제목은 두보의 시에서 나온 것으로, 자조와 자기 성찰의 뜻이 담겨있다.)

 

청평사에 객()이 있어

봄 산에서 자적(自適)한다.

새 울어 외로운 탑 고요하고

꽃은 떨어져 실개울에 흐르네

 

맛난 나물은 때를 알아 빼어나고

향기로운 버섯은 비 맞아 부드럽다.

시 읊으며 신설골에 들어가매

인생 백년의 시름이 사라지네

 

또한 김시습은 청평산 세향원 남쪽 창에 쓰다.’시도 지었다.

도가적 삶의 냄새가 물씬난다.

 

아침 해 돋으려 하니 새벽빛이 밝아오고 朝日將暾曙色分

숲 안개 걷힌 곳에 새들이 짝을 부르네 林霏開處鳥呼群

먼 봉우리 푸른 빛은 창 열면 보이고 遠峯浮翠排窓看

이웃 절 종소리는 고개 너머 들리네 隣寺鍾聲隔巘聞

 

파랑새는 소식 전하러 약 달이는 부엌을 엿보고 靑鳥信傳窺藥竈

벽도화(碧桃花)는 져서 이끼에 떨어지네 碧桃花下照苔紋

아마도 신선이 조원각(朝元閣)에서 돌아왔나 보네 定應羽客朝元返

소나무 아래 소전(小篆) 글씨 한가로이 펼쳐지니 松下閑披小篆文

(심경호 지음, 김시습 평전, 돌베개, 2021, p 483-500)

 

그런데 소양정세향원시는 홍길동전을 지은 교산 허균(1569~1618)1611년 함열(咸悅) 유배지에서 지은 성수시화(惺叟詩話)에 수록되어 있다.

성수시화관련 부분을 읽어보자

 

김열경(金悅卿 김시습의 자)의 높은 절개는 우뚝하니 더할 나위가 없다. 그 시문도 초매하나 마음 쓰지 않고 유희삼아 지었기 때문에 억센 화살의 최후와 같아서 매양 허튼 말이 섞이니 장타유(張打油)와 같아 싫증이 난다.

 

그가 세향원(細香院)에 쓴 시는 朝日將暾曙色分...松下閑披小篆文라 했고, 소양정(昭陽亭)에서는 鳥外天將盡 ... 乘興此重遊라 했으며,

 

산행(山行)에서는,

아이는 잠자리 잡고 노인네는 울타리 고치고 兒捕蜻蜓翁補籬

작은 개울 봄 물에 가마우지 목욕하네 小溪春水浴鸕鶿

푸른 산 끊긴 곳에 돌아갈 길은 먼데 靑山斷處歸程遠

등나무 한 지팡이 비껴 메고 오누나 橫擔烏藤一個枝

라 했는데,

모두 속기(俗氣)를 떨쳐버려 화평(和平)하고 담아(澹雅)하니 저 섬세하게 다듬는 자들은 응당 앞자리를 양보해야 할 것이다.”

 

성수시화는 허균이 최치원 이래 우리나라 8백년 간의 시를 96관에 걸쳐 평설(評說)한 시평집이다.

 

허균은 성수시화인(惺叟詩話引)’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나라는 당 나라 말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붓을 쥐고 시를 지은 사람들이 거의 수천 명이 될 것이나 세대가 멀어져서 인몰되고 전하지 못하는 자 또한 그 반을 넘고 있다. 더구나 전란을 겪음으로써 서적이 거의 없어지고 말았으니 뒷날 공부하는 자가 무엇을 가지고 그 남긴 자취를 살필 수 있을지 깊이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 신해년(1611, 광해군 3)에 함열(咸悅)에 귀양 가게 되자 한가하므로 일찍이 담화(談話)하던 것을 기술하여 종이에 옮겨쓰고 시화(詩話)라 하니 무릇 96()이었다. 8백 년 사이에 뽑은 것이 다만 이에 그치니 너무 간략한 것 같지만, 이 역시 마음을 다 썼을 뿐이니 보는 자는 짐작하리라.

 

1611420일 교산(蛟山)은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