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노래 (47)
- 남효온, 행주(幸州)에서 은거하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483년 3월 19일에 김시습은 서울 수락산 생활을 접고 강원도 춘천으로 떠났다. 남효온은 김시습을 동대문 밖에서 전송했다. 이 당시에 남효온은 과거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효온 꿈에 죽은 증조모가 나타났다. 『추강집』 ‘추강냉화’에 나온다.
“2월 17일에 증조모가 내 꿈에 나타났다. 내가 묻기를 “제가 급제하겠습니까?” 하니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묻자 “너는 급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였다. 조금 있다가 나에게 이르기를 “금년 5월에 네가 분명 급제할 것이다. 지은 글이 여러 선비 중에 으뜸이겠지만, 원수진 자가 들어와서 시관(試官)이 된다면 반드시 너의 글을 빼내어 낙제(落第)에 둘 것이니, 이것이 네가 급제하기 어려운 이유이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천지신명이 위에서 굽어보시고 곁에서 바로 잡으시니 , 비록 원수진 사람이 있을지라도 어찌 사사로운 뜻을 그 사이에 부릴 수 있겠습니까.” 하니, 증조모가 “네 말이 옳다.” 하였다.”
3월 29일에 창덕궁에서 식년시가 열렸다. 남효온이 과거 시험을 보고 낙방했는지, 아예 시험을 포기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남효온은 과거 급제는 못했다. 이후 그는 서울을 떠나 선대(先代)의 전장(田莊)이 있던 행주로 들어갔다. (정출현 지음, 남효온 평전, 한겨레출판, 2020, p 178-183)
1483년 가을밤에 남효온은 행주 전장(田莊)에서 흠뻑 술에 취하여 김시습을 생각하며 김시습의 이별 시를 읽었다. 그리고 차운시를 지었는데, 차운은 2구와 4구의 마지막 한자인 人과 春, 峋과 囷이었다.
가을장마가 띳집 처마 적시는데 秋霖濕茅榮
밤에 일어나 먼 곳 사람 생각하네 夜起憶遠人
도를 배우다 어정쩡한 사람 되어 學道反類狗
앉아서 하릴없이 세월만 보내고 있네 坐度秋與春
시 첫머리에 ‘가을장마’가 나오는 것을 보니 이 시는 가을에 쓴 것이다.
유구(類狗)는 ‘범을 그리다 제대로 그리지 못하면 개를 닮고 만다.〔畫虎不成反類狗〕’는 뜻으로, 도를 배우긴 했으나 어정쩡한 사람만 되는 비유이다.
세상은 이 풍한객을 기억하지 못하니 世不記風漢
우리의 도가 깊은 산속에 묻혀버렸네 吾道屬嶙峋
부질없이 술에 흠뻑 취한 가운데 空然醉鄕裏
허둥지둥 집 헛간에서 고꾸라졌네. 顚沛倒吾囷
남효온은 세상 사람들이 김시습을 풍한객(미치광이)이라 불렀지만, 참된 도를 보존한 인물로 추억하였다.
그러면 김시습이 남효온에게 준 이별시를 읽어보자.
옛 사람도 지금 사람과 비슷하고 昔人似今人
지금 사람도 나중 사람과 비슷하겠지 今人猶後人
인간 세상은 흐르는 물과 같아 世間若流水
유유히 흘러 가을 가고 봄이 오네 悠悠秋復春
‘옛사람도 지금 사람과 비슷하고, 지금 사람도 나중 사람과 비슷하겠지’ 라니, 이 무슨 뜻인가? 『장자(莊子)』 외편 ‘지북유(知北遊)’에 이런 글이 나온다.
염구가 스승 공자에게 물었다.
염구 : 천지가 있기 이전의 일을 알수 있습니까?
공자 : 알 수 있다. 옛날도 지금과 같았다.
다음 날 염구가 다시 찾아와 물었다.
염구 : 어제 하신 말이 무슨 뜻입니까?
공자 : 어제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은 신명으로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이고, 오늘 어두워진 것은 신려하지 못한 사려로 궁구하려 했기 때문이다. 옛날도 없고 지금도 없고 (無古無今),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이다(無始無終)
(기세춘 옮김, 장자, 바이북스, 2007, p 457-458)
아마도 김시습은 이런 의미에서 전별시를 지어 주었을리라.
“옛날도 지금과 같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세상에서 만남과 이별 또한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인연이 되면 언젠가 또 만나겠지.”
오늘은 소나무 아래서 술을 나누지만 今日松下飮
내일 아침엔 깊은 산으로 향하려오. 明朝向嶙峋
깊은 산 푸른 봉우리 속에서 嶙峋碧峰裏
그대를 그리는 정 실타래 같으리 思爾情輪囷
(한국고전번역원, 추강집 제2권/시(詩)오언고시, 심경호 지음, 김시습 평전, 돌베개, 2021, p 483-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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