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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

해방정국 (18)- (20) 송진우 암살의 배후는?

해방정국 (18)

- 송진우 암살의 배후는?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9451230일 이른 아침에 한민당 수석 총무 송진우가 서울시 원서동 자택에서 한현우, 유근배 등 6명에게 암살당했다. 이들은 송진우에게 13발의 총탄을 난사했고 송진우는 얼굴, 심장, 배에 총알 6발을 맞아 즉사했다. 해방정국에서의 첫 번째 정치암살이었다. 이후 여운형, 장덕수, 김구의 정치암살이 잇따랐다.

 

1231일자 서울신문과 동아일보는 송진우의 피살 소식을 보도했다.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송진우가 30일 오전 610분경 시내 원서정 74번지 자택에서 취침중 괴한 5,6명의 피습을 받고 권총으로 안면에 1, 심장에 1, 복부에 3, 하관절에 1발의 피탄(被彈)을 입고 즉시 서거하였다. 향년은 57세이다. 또 함께 취침 중이던 내종(內從) 양신훈도 하관절에 피탄을 받어 목하 박창훈 외과병원에 입원 가료중이다. 그런데 범인은 산정(山亭)뒤 철양벽을 뛰어 넘어 저택에 침입한 듯 하며 범행후 벽 밖에 계단이 있는 협로로 도주하였는데 아직 체포되지 못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대한민국사 제1> 1945> 한민당 수석총무 송진우 피살)

 

194611일에 동아일보는 송진우 급서에 대한 한국민주당의 성명서를 보도했다.

 

한국민주당에서는 1230일 오후 4시 한민당 회의실에서 긴급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하고 동당 수석총무 송진우가 피습급서한데 대하여 애도를 표하고 장의에 관하여 당장(黨葬)으로 하되 당 총무 원세훈을 위원장으로 하여 일체 일임키로 하고 성명서를 결의한 후 급히 당대회를 개최키로 결정하고 산회하였다.

성명서(聲明書)

 

본당의 수석총무 송진우는 지난 달 30일 오전 6시 원서동74번지 자택에서 흉한에게 피습되어 급서하였다. 본당이 발족한 지 불과 3개월에 또 우리 민족의 광복대업이 완성된다 하는 이때 특히 신탁통치문제를 둘러싸고 국가와 당의 가장 중대한 이 시국에 씨()같은 민족적 투사가 서거한 것은 본당의 일대 손실일 뿐 아니라 조선 국가로 보아 중대한 손실이다. ()는 일생을 통한 민족투사 장리(場裡)에 있어 일찍이 금일이 있을 것을 각오치 않았던 바 아니었지만 본당으로서는 이것이 첫 희생인만큼 가장 애석히 여기고 비통히 생각하는 바이다. 본당은 의 유지를 계승하여 조선 완전독립· 신탁통치 절대 배격의 일로로 매진하기를 맹서한다. 대한민국 27123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대한민국사 제1> 1945> 한민당, 송진우의 피습 급서에 대해 성명서 발표)

 

11일에 하지 사령관과 김구 사이에 군정청 하지 사무실에서 격렬한 충돌이 있었다. 하지는 김구에게 다시 나를 거역하면 죽이겠다.”고 말했고, 김구는 당장 자살하겠다고 대들었다.

 

충돌의 직접 원인은 임정이 발표한 포고 1때문이었다. 임정이 군정청을 마비시키고 행정권과 경찰권을 탈취하겠다는 발표는 군정청 입장에서보면 쿠데타시도였다.

 

그런데 하지가 험하게 나간데는 1230일 송진우 암살의 배후가 김구라는 의심 때문이었다. 송진우는 하지의 신임을 받은 고문이었다.

 

그런데 브루스 커밍스는 김구가 송진우 암살을 조종한 것을 당연한 사실로 여겼다.

 

정무위원회를 이끄는 역할을 임정의 김구 일파에게 맡기려던 구상은 반탁 사태를 통해 배제되었다. 하지는 김구와 그 추종자들에게 경호원과 미제 차량, 그리고 고궁 시설의 이용 등 혜택을 제공했는데, 그들은 하지를 정면으로 배반했다. 김구는 귀국 후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불발로 끝난 쿠데타는 말할 것도 없이, 하지가 신임하던 고문 송진우의 암살을 조종했다. (출처 커밍스 지음, 한국전쟁의 기원)

 

한국 현대사를 연구한 서중석은 이렇게 적었다.

 

1230일 오전 610분경에 한국민주당의 수석총무 송진우가 암살되었다. 그는 전부터 훈정(訓政 미 군정) 지지자로 알려졌고, 암살된 이유도 훈정을 지지하였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점도 유의하여야겠지만, 그의 암살에는 보다 큰 요인이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송진우 측은 정치적 헤게모니와 친일파 문제 등으로 임시정부 측과 갈등이 적지 않았고, 이러한 갈등은 송진우 측의 임정 측에 대한 과거의 이미지가 크게 바뀌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반탁 투쟁이 반 미군정 투쟁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는 미군정과 밀착된 그의 입장은 임정 측의 '즉각 정권 인수' 의지와 대립될 수 있었다. (<한국현대민족운동사연구>, 310~311)

 

서중석은 송진우를 김구와 맞서는 미군정 지지자로 보는 근거로 그가 죽기 직전에 미국 기자에게 말한 것으로 전해지는 내용을 제시했다.

 

우리들은 미군이 적어도 2년 동안은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 만일 미군이 지금 떠나게 되면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잡게 될 염려가 있다. 왜 냐 하면 그들은 우리보다 조직이 더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민족운동사연구>, 310쪽 주26에서 재인용)

 

( 참고자료 )

 

o 김기협 지음, 해방일기 2, 너머북스, 2011, p 320- 326

 

해방정국 (19)

- 송진우 암살의 배후는? (2)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94649일에 송진우 암살자들이 체포되었다. 410일 자 서울 신문을 읽어 보자.

 

작년 1230일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고하 송진우 씨를 저격한 진범인을 체포코자 경기도 경찰국에서는 약 2개월 전부터 비밀리에 맹렬한 활동을 거듭하여 한때는 부녀동맹 간부들도 암살 혐의를 받고 취조를 당하는 등 범인 수사의 귀추가 주목되었는데 8일 밤부터 돌연 단서를 잡고 특별 무장대원들이 수사를 개시하여 9일 정오까지 진범인 한원율(일명 한현우 韓賢宇, 29), 유근배(劉根培 20), 김의현(金義賢 20) 3명을 체포하였다.

 

주범 한원율은 일찍이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수업을 받고 당시 일본 수상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를 암살하려다가 일본 관헌에 체포되어 복역 중 해방 후 출옥하고, 귀국 후 국민대회 준비위원회에서 고 송진우씨를 돕고 있던 자인데 한원율의 지휘하에 유근배, 김의현 두 명이 권총을 발사하여 암살한 것이다.

 

체포 경위 : 도 경찰부 발표

 

그런데 범인을 체포하게 된 경위는 이렇다.

 

경기도 경찰부 수사과장은 사건 발생 후 과원 이만종, 노훈경 양인을 지휘하여 각종 정보를 수집하던 중 213일 오후 3시경 장택상 경찰부장으로부터 송진우 신변 보호자로 있던 자가 해안경비대에 입대하게 되었다니 그 관계를 조사하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해안경비대원으로 입대하게 된 자는 미국인이 인솔하여 가게 되었으므로 장택상 경찰부장이 스톤 부장의 양해를 얻어 미군 2명을 파견하여 노 형사과장과 과원 이만종은 동 오후 두 시에 경성역에 출장하여 송진우 신변 보호 책임자 정종칠(鄭鍾七)과 해안경비대 대원으로 입대하게 된 김일수(金日洙) 두 사람을 동행하여 취조한 결과, 송진우 신변 보호자이던 백남석(白南錫), 김의현(金義賢), 신동운(申東雲), 박민석(朴閔錫), 유근배(劉根培) 등이 작년 11월 말경에 주의 주장이 상치됨으로 인하여 신변 보호자로써 탈퇴하였던 것인데, 송씨가 암살당한 후 김일수(가명)가 시내 종로통에서 김의현을 만났을 때 "송 씨를 암살한 자는 누구냐?"고 물은즉 김의현이 답하여 말하되 "그것은 왜 묻느냐? 누구이면 알아서 무엇을 할 터이냐? 그만 두어라." 이와 같은 문답이 있었는데 김일수 생각에 김의현을 체포하면 진상을 알 수 있으리라고 진술하였으므로 이상 관계자 중 214일에 신동운, 백남석, 김의현을 각각 체포하여 엄밀히 취조하였으나 직접 하수자 즉 주범을 체포하기에 난점이 있었으므로, 동월 18일에 전기(前記) 3인을 석방하여 이들을 연락자로 정하고 1개월 10여 일간 각종 정보를 수집한 결과, 마침내 48일 오후에 유근배가 인천 부내에 잠복중이라는 사실이 판명되었으므로 어제 (49) 아침 미명에 수사과원을 자동차로 급파하여 오후 830분에 인천부 화평정에서 유근배를 체포하여 취조한 결과, 주범자인 한현우를 오후 1020분에 시내 신당정 304번지에서 공범자 김의현과 동시에 체포하였다. 이상 체포자 3인은 송진우 암살 진범으로 자백하였으며 남은 2명은 불일 체포될 예정이다.

(출처: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자료 대한민국사 제2> 1946> 경기도경찰부, 송진우 암살범 한현우, 유근배, 김의현 체포,‘서울신문’1946410)

 

411일에 동아일보는 송진우암살범 체포, 취조사항을 보도했다.

 

9일 경기도 경찰부에 검거된 고 송진우 선생 암살주범 한현우(일명 한원율) 4명의 범인은 어제도 오늘도 엄중한 취조를 받고 있는데 그 배후에는 어떠한 사주와 지시가 있었는지 자못 그 취조의 경과가 주목된다. 그리고 주범 한현우가 체포된 동시에 모든 것을 자백하고 이렇게 검거되고 보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하다라고 진술하여 범행을 뉘우치고 있다. 이런 것을 보면 범행 후 각처로 전전하며 은신 피신하는 동안 극도의 정신적 고통을 받아 가슴을 졸이던 것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이 범행후 범행 당시에 사용한 권총을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경찰 당국에 바친 것 등을 미루어 보면 범인 자신들이 교묘히 범죄 사실을 은폐하고 있었다.

(출처: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자료대한민국사 제2>1946> 송진우암살범 체포, 취조, 동아일보 1946411)

 

( 참고자료 )

 

o 김기협 지음, 해방일기 3, 너머북스, 2012, p 352-360

 

 

해방정국 (20)

- 송진우 암살의 배후는? (3)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946424일에 서울신문과 동아일보는 경기도 경찰부의 암살범 취조 결과 발표기사를 보도했다. 이를 살펴보자.

 

 

경기도 경찰부, 송진우 암살범들의 취조결과 발표

 

1 관구 (경기도)경찰청 발표

 

송진우 암살피의자 한현우에 대하여 그 배후와 사상 관계를 엄밀히 취조한 결과 한현우는 194112월에 동경 와세다 대학교 정경과를 졸업하고 19435월경 동경에서 국수주의자 일인 중야(中野正剛)와 그의 동지 혜적(穗積五一)을 숭배하고 이와 5년간 직접 간접으로 교양을 받고 혜적(穗積)의 지지로 재일조선인 유학생 5천 명으로 조선독립동맹(朝鮮獨立聯盟)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지하운동을 한 자인데 당시 일본 경비청의 탄압이 심하므로 혜적(穗積)의 지도로 한현우는 일본단체연구소(日本國體硏究所)라는 간판을 내걸고 일본황실중심주의를 표방하다가 19443월에 비밀이 탄로되어 인심교란죄로 징역 10개월, 4년 집행유예를 받고 1945225일경 강원도 춘천 한현우의 처가 집에서 수양하다가 817일 상경하여 시내 종로 2정목, 마포 노량진 신당정 등으로 전전하던 중 1230일 미명 송진우를 암살한 주범자이다.

 

한현우는 동경 시대로부터 철저한 민족주의자인데 해방 직후 상경하여 각 방면의 정세와 동향을 정시한즉 자주독립촉성을 표방하는 정당이 속출하여 자유 해방이다 하기만 하고 통일이 안 됨을 보고 동경 시대의 동무인 이용봉(李龍鳳)의 소개로 8월 하순에 현재 시내 신당정 3336의 경남 양산 출신 전백(全柏 42)을 방문하고 의견을 교환한 다음 11월 초순 경에 이 두 사람은 이론 투쟁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하여 정치적 야심가, 브로커 등을 암살 숙청할 계획을 세우고 무기를 얻는 한편 심복 부하를 물색하여 여운형, 박헌영, 송진우 씨 등을 매국적 행동자로 규정하고 이상 제씨를 살해하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아니하여 첫째로 신탁 문제가 일어나 격분하고 있을 즈음 1229일 하오 5시경 부하를 소집하고 내일 미명에 먼저 송진우를 암살할 것을 부하들에게 발표한 다음 유근배가 30일 상오 610분경 송진우를 권총으로 암살하였다.

 

그리고 한현우는 전백의 명령을 받고 194613일경 서북 지방으로 반탁을 선전하러 갔다가 117일 서울에 돌아왔는데 그 후로 여운형과 박헌영의 거소를 찾고 있었다. 주범들은 공산주의자라고는 인정할 수 없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자료 대한민국사 제2> 1946> 경기도경찰부, 송진우암살범들의 취조결과 발표, 서울신문, 동아일보 1946424)

 

경기도 경찰청 발표 끝에 범인들이 공산주의자 즉 좌익의 소행이 아니라고 밝힌 것이 이채롭다.

 

요컨대 경찰청 발표에는 송진우 암살의 주범인 한현우와 한현우 배후에 전백이 등장한다.

 

한현우는 법정에서 왜 송진우 선생을 죽였냐고 물으니 좌익에선 여운형, 우익에선 송진우가 나라를 망치려 해서 둘 다 죽이려고 했다고 진술했다. 이어서 한현우는 이어 '둘 다 죽일 생각이었는데, 먼저 여운형 선생을 죽이려고 따라다녔다. 그러다 한현우는 종로3가 파고다 공원 근처에서 여운형이 걸어오는 걸 보고 죽이려 했는데, 여운형이 멀리서 자신을 알아보고 , 현우군! 오랜만일세하고 다가와서 어깨를 탁탁 두드리니 차마 못 죽이겠더라고 진술했다.

 

이어서 한현우는 법정에서 '송진우는 미국의 후견을 지지했다'고 주장했다.

 

전백(全柏)은 한현우 일당에게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준 사람이다. 그는 한현우에게 범행에 쓸 권총을 주었고, 10여만 원의 현금도 주었다.

 

그런데 전백은 한현우에게 범행에 쓸 권총을 준 것을 시인하면서도 권총을 고쳐달라고 준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한현우가 계몽의숙(啓蒙義塾)같은 것을 만들어 청소년을 훈련한다기에 자금을 줬다고 허위진술 했다.

 

송진우 암살 후에 한현우는 북한에도 다녀왔다. 북한에서 누구를 만나고, 어떤 대화를 가졌는지, 어떤 새로운 모의를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여운형과 박헌영을 암살하려 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