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조약의 한국 근대사 (63)
- 러시아와 일본의 <베베르·고무라 각서> 체결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자 그동안 은신 중이었던 정동파 인물들이 대거 내각에 등용되었다. 내각총리대신에 김병시, 궁내부 대신에 이재순, 내부대신 박정양, 외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윤용, 법부 대신과 경무사 겸임 이범진, 학부대신 서리 윤치호, 농상공부 대신 서리 고영희, 경무사에 안경수가 임명되었다. 그런데 총리대신으로 임명된 김병시가 강력 사양하여 박정양이 내각총리대신 서리를 하였다.
새 내각은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고자 단발령을 철회하였고, 백성들이 미납한 조세도 탕감하는 조령을 내렸다.
2월 13일에 고종은 백성들에게 윤음(綸音)을 내렸다.
(고종실록 1896년 2월 13일)
"그저께 (2월 11일) 일은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역적의 우두머리와 반역 무리들의 흉악한 음모와 교활한 계책의 진상이 숨길 수 없게 되자 막아버리고 승복시키는 방도가 혹 허술한가 걱정하여 외국에서 이미 시행한 규례대로 임시방편을 써서 짐이 왕태자를 데리고 대정동(大貞洞)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에 잠시가 있는 뒤에 왕태후는 왕태자비를 데리고 경운궁으로 갔으며 짐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모든 범인을 잡게 하고 그들이 묶인 다음에 곧 돌아오려고 하였다.
그런데 범인을 묶을 때에 우민(愚民)들이 폭동하여 갑자기 살해하고 나머지 범인은 모두 다 목숨을 건지려고 도망쳐버리니 군중의 심리가 더욱 흉흉하여 안정되지 않고 있다. 이때를 당하여 짐이 있는 곳을 너희들 백성들에게 명백히 알릴 겨를이 없었는데 이제 대궐이 무사하고 민심이 여느 때와 같게 되었으니 짐이 경사스럽고 다행하게 여기는 바이다. 며칠 안으로 장차 대궐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래서 확실하게 알리니 너희들 백성들은 각각 의심을 풀고 생업에 안착하라."
그런데 며칠 안으로 환궁하겠다는 고종의 윤음은 새까만 거짓말이었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375일간 피신하다가 1897년 2월 20일에 환궁한 것이다. 더구나 고종은 경복궁이나 창덕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영국 · 미국 · 러시아 공사관이 인접한 경운궁으로 환궁하였다.
한편 일본은 전대미문의 민왕후 시해 사건으로 국제적 신뢰를 잃었고, 아관파천과 반일 감정 고조로 조선에서의 입지도 크게 위축되었다. 그런데 러시아는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면서도 주된 관심은 만주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 일부 양도하는 소극적 태도를 취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896년 5월 14일에 베베르 주한러시아공사와 고무라 주타로 주일일본공사는 <베베르·고무라 각서>를 체결했다. 전체 4항으로 되어 있는 각서의 일부 내용을 살펴보자.
제1조 조선 국왕 폐하의 환궁 문제는 폐하 자신에게 일임하되, 러시아와 일본 양국의 대표자는 폐하가 환궁하더라도 안전상 의구심을 품을 필요가 없다고 인정될 때에 환궁을 충고한다.
제3조 러시아 대표자는 다음 사항에 대해 전적으로 일본 대표와 의견을 같이 한다. 즉 조선국의 현 상황에서 부산과 경성 사이에 놓여 있는 일본 전신선 보호를 위해 몇 몇 지점에 일본 위병을 배치할 필요가 있으며, 현재 3개 중대의 위병은 가급적 속히 철수하고 그 대신 헌병을 배치한다. 그리고 이들 헌병도 장래 조선 정부의 안녕질서가 회복되면 점차 철수한다.
제4조 경성 및 개항장에 있는 일본인 거류지를 보호하기 위해 경성에 2개 중대, 부산에 1개 중대, 원산에 1개 중대의 일본군을 배치할 수 있다. (...) 또 러시아 정부도 러시아 공사관 및 영사관 보호를 위하여 역시 위의 각지역에서 일본군의 숫자를 초과하지 않는 위병을 배치할 수 있다.
그런데 <베베르·고무라 각서>는 조선의 자주권과 독립을 크게 훼손한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비밀에 붙여졌다.
이즈음에 고종은 5월 하순에 있을 러시아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민영환을 축하 사절로 파견하였고, 민영환은 모스크바로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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