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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

해방정국 3년 (11) 임시정부 환국 환영회와 모스크바 삼상 회의 개최

해방정국 3(11)

- 임시정부 환국 환영회와 모스크바 삼상 회의 개최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9451212일 저녁, 한민당 수석총무 송진우는 김구 · 김규식 · 이시영 등 임정요인들을 초청하여 서울 종로 국일관에서 봉영회’(환영대회) 개최를 위한 간담회 겸 만찬을 베풀었다.

 

술잔이 돌면서 임정 측 해공 신익희가 한민당 측 인사들을 가리켜 친일파 운운하면서 싸움판이 벌어지고 말았다.

 

국내파들은 총독부에 크든 작든 협력한 친일파들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오늘날까지 어떻게 생명 부지할 수 있었을 것인가

 

이에 한민당 측 설산 장덕수가 벌떡 일어나 맞섰다.

 

임정이 그런 색안경을 끼고 우리 국민들을 보다니. 해공, 그럼 난 숙청감이로군

 

이러자 신익희는 어디 설산뿐인가?”라고 응수했다.

 

마침내 고하 송진우가 끼어들었다.

 

여보 해공, 국내에 발붙일 곳도 없이 된 임정을 누가 모셔왔기에 그런 큰 소리를 하는거요? 인공이 했을 것 같애? 해외에서 헛고생들 했군. 우리가 임정을 국민들이 떠받들게 하려는 것은 3.1운동 이후 임정의 법통 때문이지, 노형들 위해서인줄 알고 있나? 여봐요. 중국에서 궁할 때 당신들이 뭣들 해 먹고서 살았는지 여기서는 모르고 있는 줄 알아?

국외에서는 배는 고팠을 테지만 마음의 고통은 적었을 것 아니야.

가만히들 있기나 해요. 하여간 환국했으면 모두 힘을 합해서 건국에 힘쓸 생각들이나 먼저 하도록 해요. 국내 숙청 문제 같은 것은 급할 것 없으니, 임정 내부에서 이러한 말들을 삼가도록 하는 것이 현명할 거요.”

 

김구도 괴로운 표정으로 이 말싸움을 옆에서 다 들었다. 이후 임정 측의 한민당 인사 숙청론이 고개를 숙였다.

(김학준, 고하 송진우 평전, 동아일보사, 1990, p 248 ;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1, 인물과 사상사, 2004, p 130-131에서 재인용)

 

1219일에 임시정부 환국 환영회가 서울운동장(현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에서 15만 명의 국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광복 후 서울대 사학과 교수를 지내다 39(1951)에 괴한의 저격으로 숨진 김성칠은 1219일 임시정부 환국 환영 행진을 보고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거리에는 꽃 전차가 화려하고 광복군과 소년군(少年軍)의 행진이 장엄하고 유량한 나팔 소리에 울려 나오는 애국가의 멜로디가 눈물겹도록 기쁜 현상이지만 한편으론 인민공화국 측과 한국민주당 측이 서로를 민족 반역자라 욕하고 죽일 놈 살릴 놈 하는 격렬한 삐라를 돌리는 것이 마음 아픈 노릇이다. 이 우매한 정치광(政治狂)들과 탐권배(貪權輩)들이 선량한 동포들을 항쟁의 구렁으로 몰아넣고 조국의 광복에 일말의 암운을 끼치게 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랬다. 1230일에 송진우는 원성동 자택을 침입한 한현우 등 7명에 의해 총맞아 죽었다. 남한 최초의 정치암살이었다. 이어서 1947719일에 여운형, 122일에 장덕수가 암살당했고, 1949년에는 김구도 암살 당했다.

 

 

한편 1216일부터 모스크바에서 미국과 영국 그리고 소련의 외상들이

전후 문제를 논의하였다. 모스크바 삼상회담에서는 한반도와 일본,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의 문제가 논의되었다.

 

그런데 한국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다소 복잡했다. 미 국무성과 남한의 미 군정청은 견해를 달리했다.

 

1020일에 미 국무성 극동국장 존 빈센트는 미국은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안을 지지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히고, 그것을 주한미군에게도 주지시켰다. 그러나 미군정청은 신탁 통치안의 포기 또는 회피를 원했고, 그것을 본국 정부에 강력히 건의했다.

 

1216일에 미군정 사령관 하지는 지난 3개월간의 통치 결과에 근거하여 자신의 심정을 담은 편지를 미국 정부에 보냈다.

 

한국인들은 무엇보다도 독립을, 그것도 지금 당장 독립을 원하고 있으며, 만약 신탁통치 계획이 발표된다면 이들은 실제로 물리적 저항에 나설것입니다. 서구적 기준으로 본다면 한국인은 아직 독립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지만,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이들의 자치 능력이 크게 향상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미소 양군이 한반도에서 동시에 철군하고 이로 인해 필연적으로 발생할 대혼란은 한국인들 스스로 해결하도록 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1, p 142-143)

 

이처럼 군인 중 군인인 하지 사령관의 견해는 어느 정치가들보다 더 통찰력이 있었다.